- 원래 빅토르 유셴코의 얼굴(왼쪽)과 다이옥신으로 암살될 뻔하다 살아난 후의 얼굴.
러시아는 3월 17일 러시아 주재 영국외교관 23명을 추방한다고 발표했다. 영국이 자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하기로 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양국의 외교관 추방전은 지난 3월 4일 영국에서 발생한 이중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 독살 미수사건이 발단이 됐다. 영국은 부녀의 신체에서 러시아 군사용 신경작용제인 '노비촉'이 발견되자, 러시아 정부의 해명을 요구했었다.
영국이 대뜸 러시아 당국을 범인으로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다. 러시아가 희귀 독극물을 이용해 암살을 저질러온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방사능 홍차' 사건-리트비넨코 암살
대표적인 사건이 2006년 11월 발생한 리트비넨코 독살 사건이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전직 FSB(러시아연방보안국. KGB의 후신) 요원이었다. 그는 1998년 기자회견을 열어 러시아 정보당국의 음모를 고발했고, 2000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리트비넨코는 영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푸틴 정권의 음모들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유리 펠쉬틴스키와 함께 쓴 <러시아 폭파;KGB공포정치를 위한 비밀음모>라는 책에서 1999년 푸틴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체첸반군들에 의한 테러사건들이 실은 푸틴이 집권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FSB의 음모라고 폭로했다. 이어 그는 <루비얀카 범죄집단>이라는 책을 통해 푸틴 집권 이후 전직 KGB 출신들로 구성된 푸틴 정권의 실세들이 마피아를 구성, 반대파들을 압살하고 권력을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는 현실을 고발했다.
특히 리트비넨코는 2006년 10월 7일 발생한 반체제 기자 안나 폴리트로코프스카야 암살사건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안나 폴리트로코프스카야 정도의 지위에 있는 기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사람은 러시아에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압니다. 그 사람은 바로 푸틴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리트비넨코는 푸틴의 비정(秕政)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전직 러시아 정보기관원들과 자주 접촉했다. 그들 가운데는 안드레이 루고보이와 드미트리 코브툰이라는 자들이 있었다. 리트비넨코는 2006년 11월 1일 런던 시내 메이페어 밀레니엄 호텔 바에서 이들과 만나 홍차를 마셨다. 그 직후부터 리트비넨코는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11월 23일 저녁 사망했다.
리트비넨코를 죽인 물질은 폴로늄-210이라는 방사능 물질이었다. 영국 당국의 수사 결과, 루고보이와 코브툰이 묵었던 영국과 독일의 숙소, 그들이 탑승했던 항공기에서 폴로늄-210이 검출됐다. 폴로늄-210은 비교적 손쉽고 안전하게 다룰 수 있지만 인체에 치명적 손상을 주는 물질이다. 전 세계 산업용 폴로늄-210의 97%를 러시아의 핵시설 아방가르드에서 공급한다.
리트비넨코는 죽기 전 유언에서 푸틴을 지목해 저주를 퍼부었다.
“당신은 사람을 침묵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침묵에는 대가가 따를 것이다. 당신은 사람을 이렇게 만듦으로써 당신을 호되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당신이 야만적이고 잔인한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당신은 사람의 목숨과 자유, 그리고 어떤 문명세계의 가치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당신은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으며, 문명세계에 사는 모든 남자와 여자로부터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미스터 푸틴, 당신은 한 사람을 침묵시켰을지 모르나, 전 세계에서 들려오는 항의의 울부짖음이 평생 당신의 두 귓속을 파고들 것이다.”
유셴코 암살미수사건
우크라이나 대통령 후보 빅토르 유셴코 독살 미수사건도 푸틴 휘하 러시아 정보기관이 간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빅토르 유셴코는 2004년 11월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야당 지도자였다. 그는 친서방노선을 주장해 푸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푸틴은 여당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지지했지만, 그가 승리할 수 있는 지는 미지수였다.
2004년 9월 5일 빅토르 유셴코는 정보기관인 우크라이나 보안위원회(SBU)의 국장인 이호르 스메시코 장군의 초청을 받았다. 이튿날부터 유셴코는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등골이 아프고 얼굴색이 변하고, 얼굴에 물집에 생겼다. 9월 10일 유셴코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들은 유셴코가 스메시코와 만나 먹은 음식에 ‘2,3,7,8-테트라클로디벤도-파라-다이옥신(TCDD)'이라는 맹독성 물질이 대량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록상 유셴코에게서 발견된 TCDD의 양은 지금까지 사람에게 투여된 양으로는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꿏미남’처럼 잘생겼던 유셴코의 얼굴은 유자껍질처럼 변했다. 9월 21일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유셴코는 의회에서 “내 얼굴을 보시오!”라고 외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간지대에 있던 민심들까지 유셴코 지지로 돌아섰다. 10월 31일 실시된 대선에서 유셴코는 총 유효표의 39.87%를, 야누코비치는 39.2%를 얻었다. 2차 투표가 실시됐다.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미국·유럽에서 온 NGO들은 유셴코가 11% 정도 앞설 것으로 보았지만, 개표 결과는 야누코비치가 49%를 득표해 유셴코를 3% 앞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재선거에서 유셴코가 승리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이다.
유셴코는 대통령이 된 후 자기를 죽이려 했던 자로 우크라이나보안위원회 부국장 볼로디미르 사추코를 지목했다. 사추코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사추코 등이 푸틴과 마찬가지로 옛 소련 KGB 출신이라는 점, 우크라이나 대선 기간 중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두 차례나 방문해 노골적으로 야누코비치 지지운동을 한 점 등으로 보아 사추코의 뒤에는 러시아 정보기관이 있었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우산 암살'
냉전 시절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독살 사례는 1978년 발생한 불가리아 반체제 작가 게오르기 마르코프 암살사건이다. 그는 인체에 치명적 독극물인 리신(Ricin)이 묻은 우산에 찔려 사망했다. 누군가 마르코프의 뒤에서 실수를 가장해 우산으로 찔렀고, 그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라졌다. 나흘 뒤 사망한 마르코프의 시신을 부검했더니 우산으로 찌를 때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지름 1.7㎜ 크기의 캡슐이 발견됐다. 그 안에서 리신 성분이 검출됐다. 마르코프는 사망하기 전 동료들에게 “뭔가에 찔려 고개를 돌렸을 때, 우산을 집는 남자를 봤다”고 했다.
마르코프 독살은 2005년 기밀 해제된 불가리아 공산당 문건을 통해 불가리아 비밀경찰(DS)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암살범은 골동품 판매상으로 위장한 DS요원(암호명 ‘피카디리’)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워낙 드라마틱해서 ‘우산 암살’로 널리 알려졌다. 2006년에는 ‘우산 암살’이라는 다큐멘타리도 만들어졌다. 리신 캡슐(‘리친 펠릿(총알)’로도 불림)을 개발한 것은 옛 소련 KGB였다. 불가리아는 옛 동구권 국가들 가운데서도 소련에 가장 충실한 나라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마르코프 암살 뒤에 KGB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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