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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사회

아모레 퍼시픽이 3년 연속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가 된 이유는?

서성환 창업주와 서경배 회장의 2대에 걸친 좋은 기업 만들기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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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이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이 주관하는 '2018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조사에서 올스타(All Star) 기업 및 화장품 산업 부문 1위 기업에 선정됐다고 28일 밝혔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은 소비자, 증권사 애널리스트, 산업계 관계자 등 1만2000명을 대상으로 혁신능력, 주주가치, 직원가치, 고객가치, 사회가치, 이미지 가치 등 6대 가치 12개 항목에 대해 설문한 결과를 종합해, 전체 산업계 내 가장 존경받는 기업을 선정하는 ‘올스타(All Star) 기업’과 ‘산업별 1위 기업’을 발표했다.
 
아모레퍼시픽은 모든 요소 평가에서 타사 대비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3년 연속 올스타(All Star) 기업 및 화장품 산업 부문 1위 기업에 선정됐다. 특히 전년도에 이어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업계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혁신성,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아모레퍼시픽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일까. 아래의 글은 2015년 7월 기자가 조선일보에 재직할 당시 아모레퍼시픽의 가계(家系)를 살피면서 ‘서성환은 우리나라 고유 차문화 찾아나선 농업왕’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과 그 뒤를 이은 서경배 회장의 인물됨이 이 회사를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로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전남 강진 유배지를 헤매던 중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었습니다. 영암에 가면 잘 알려진 보성(寶城) 차밭 못지않은 풍광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시 해남으로 갔습니다. 근육질의 울퉁불퉁한 바위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월출산(月出山)이었습니다. ‘월출산 국립공원’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한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둘러봐도 차밭은커녕 민물장어집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행인에게 물어보니 씩 웃으며 차밭을 보려면 ‘경포대’라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만든 강진의 차 문화는 서성환에 이르러 대중화됐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만든 강진의 차 문화는 서성환에 이르러 대중화됐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만든 강진의 차 문화는 서성환에 이르러 대중화됐다. 월출산 경포대라는 이름을 보고 언뜻 강릉 경포대가 생각났지만 한자가 달랐습니다. 이곳의 경포대(鏡布臺)는 월출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모습이 무명 베를 길게 늘어뜨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여름철에는 천혜의 피서지라고 합니다. 과연 경포대 쪽으로 접어들자 광활한 차밭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보는 녹차밭은 색다른 묘미가 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보는 녹차밭은 색다른 묘미가 있다.
 
뒤로는 험준한 월출산의 바위들이 차렷 자세로 도열해 있고 앞으로 차밭이 융단처럼 펼쳐진 광경은 제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연수할 때 가봤던 프랑스 와이너리의 풍경보다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전남 강진과 해남은 차의 고향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일전에 경남 하동 쌍계사 근처에서 우리나라에서 차를 처음 재배한 시배지(始培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전라도 쪽도 차에 관해서는 하동과 쌍벽을 이루는 고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서 한국 현대사의 거인(巨人)이 남긴 족적을 만나게 됐습니다. 고 서성환(徐成煥ㆍ1924~2003) 태평양화학 창업주입니다. 그는 1924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성장했습니다. 한국 기업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개성(開城)상인의 대표적 인물이지요. 그의 호 ‘장원(粧源)’ 가운데 ‘장’은 화장이라고 할 때 쓰는 말로 꾸민다는 뜻입니다. ‘원’자는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호의 뜻만 봐도 그가 우리 주식 가운데 최고가인 태평양화학, 즉 아모레퍼시픽으로 유명한 화장품 재벌의 창업자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찻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명이 약동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된다.
찻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명이 약동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잠깐 그의 생애를 일별해 보겠습니다. 서성환은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서 창업주의 가족은 1930년부터 개성으로 이사 오면서 바뀝니다. 서성환이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주소는 개성시 동현동이었는데 이곳은 개성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상인의 도시’ 개성 생활에서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 윤독정씨가 책임졌다고 합니다.
 
윤씨는 전 재산을 털어 작은 상점을 열고 잡화를 취급하다가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습니다. 윤씨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비상한 머리를 지녔기에 이런 착안을 한 것인데 별명이 ‘여중군자(女中君子)’였습니다. 그만큼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의 그녀에게 개성은 인삼 매매업 종사자가 많은 곳, 소득이 높은 곳, 우수한 품질의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치장하는 여성이 많은 곳으로 인식됐습니다. 이에 착안해 직접 동백기름을 짜서 만든 머릿기름을 팔기로 한 것입니다.
 
유럽에 와인가도가 있다면 한국에는 녹차가도가 있다.
유럽에 와인가도가 있다면 한국에는 녹차가도가 있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기름을 썼습니다. 상류층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애용했지요.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 찐 머리에 머릿기름을 바른 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의 척도였던 것을 서성환의 어머니 윤씨는 정확히 포착했고 상업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동백기름에서 자신을 얻은 서성환의 어머니는 1932년부터 민간에서 내려오던 미안수(美顔水)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는데 여기 소년이었던 서성환이 가세한 겁니다.
 
참고로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예전에 방물장수들이 ‘동동 구리무’라고 외치며 화장품을 팔던 광경을 떠올릴 것입니다. 구리무는 크림의 일본식 발음이고 동동은 방물장수들이 북을 둥둥 치면서 팔았다고 해서 붙은 의성어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녹차밭. 이곳은 차를 재배하는데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있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녹차밭. 이곳은 차를 재배하는 데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성환은 어머니가 만든 물건을 도매상에 배달해 주는 등 심부름을 하며 가업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당시 화장품은 가내 수공업으로 만들었습니다. 솥을 걸어놓고 그 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직접 젓는 수준이었는데 품질만은 우수하다는 평을 얻었습니다. 하는 것마다 성공하자 어머니는 아예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회사 이름을 짓고 제품마다 ‘창성당제품’ ‘오리지날’이라는 표기를 붙였습니다. 어머니의 사업이 본격화되자 서성환도 바빠졌습니다. 그는 아침에 도시락 세 개를 자전거에 싣고 일을 시작했다지요.
 
 
 어둠이 내릴 때의 차밭은 녹색 이불을 깔아놓은 것 같다.
어둠이 내릴 때의 차밭은 녹색 이불을 깔아놓은 것 같다.
 
해뜨기 전에 개성에서 출발해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는 일을 계속했는데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는 도매상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자전거로 직접 화장품을 팔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몸소 화장품을 팔면서 그는 서서히 유통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10대 소년 서성환은 나중에는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서울로 내려와 남대문시장에서 글리세린과 향료, 빈병을 사서 다시 개성으로 가져가는 일도 도맡았다고도 합니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백화점’에도 들어갔습니다. 백화점에 작은 코너를 개설해 자기 집에서 만든 화장품뿐 아니라 당시 인기가 높았던 다른 회사의 제품까지 위탁 판매했는데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마침내 서성환은 화장품 제조법까지 어머니로부터 직접 배웁니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열을 가하는 정도, 가성소다, 즉 수산화나트륨의 비율에 따른 미묘한 차이까지 익힌 것입니다. 처음에는 유통을, 나중에는 제조까지 경험한 그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스물한 살이던 1944년 일제에 강제징용된 것입니다.
  
서성환 전 태평양그룹 창업주(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황무지 앞에서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이 황무지가 지금은 차밭으로 변신했다.
서성환 전 태평양그룹 창업주(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황무지 앞에서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이 황무지가 지금은 차밭으로 변신했다.

천운(天運)이 있었는지, 일제가 망하면서 서성환은 1년 반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옵니다. 광복을 맞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청년 서성환은 화장품에 집중했습니다.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 이름엔 사연이 있습니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雄志)와 세계에 진출하겠다는 도전 의지를 담은 것입니다. 광복 직후의 혼란 속에서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 회현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이즈음 부인 변금주 여사도 만났습니다.
 
모조품과 위조 화장품이 넘치던 50년대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값에 팔 수 있다”며 품질을 강조했는데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은 태평양 1호 제품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하던 차에 6ㆍ25가 터졌습니다. 그는 피란길에도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의 집념을 보여줬습니다. 당시 화장품업계는 ‘원료확보=고급제품’이란 등식이 성립할 때였습니다. 집안에서 화장품을 제조해 왔기에 원료가 확보되자 날림제품과는 차별성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서성환 전 태평양그룹 창업주는 어느 곳에서나 차를 마셨다. 공사장에 마련된 평상에서 차를 따르는 서 창업주(사진 맨왼쪽).
서성환 전 태평양그룹 창업주는 어느 곳에서나 차를 마셨다. 공사장에 마련된 평상에서 차를 따르는 서 창업주(사진 맨왼쪽).
 
전쟁은 누구에겐 기회가 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광복 직후와 달리 미군이 들어오면서 질 좋은 원료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다음 관건은 뭘까요? 바로 판매조직을 어떻게 추스리느냐였습니다. 서성환은 획기적인 판매방식을 택했습니다. 생산과 판매를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기업은 생산과 판매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판매만 신경 쓰게 함으로써 생산파트는 연구개발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인데 마침내 ‘대박 제품’이 탄생합니다.
  
 
 위조제품보다 월등한 제품으로 돌파구를 찾아
 
지금도 잊지 못할 ‘ABC포마드’라는 제품이었습니다. ABC포마드는 돼지기름이 원료여서 머리에 바르면 뻣뻣하고 광택도 안 날 뿐 아니라 머리를 감아도 끈적거리는 물질이 남았던 다른 제품과 달리 식물성 피마자기름을 원료로 써 광택도 뛰어나고 세척도 편리했는데 여기에 플러스 알파도 가미했습니다. 일본에서 들여온 고급 향료를 배합함으로써 경쟁제품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서성환이 직접 작명했다는 ABC포마드는 60년대까지 히트 브랜드로 태평양의 성장 기틀이 됐습니다. 저도 어릴 때 이 포마드 이름을 들었을 정도니까요.
 
서성환은 1954년 환도(還都)할 때 후암동으로 왔다가 1956년 지금의 용산 한강로 사옥 터로 회사를 옮겼습니다. 이곳은 제가 출근할 때마다 보는 곳인데 지금은 재개발공사가 한창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성환의 삶을 자세히 조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물산-모직-설탕에 이어 훗날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전자왕(電子王)’이었다면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건설-조선-자동차산업을 일군 ‘건설왕(建設王)’으로 불려 마땅하지요. 서성환 회장은 우리나라에 유례없는 ‘농업왕(農業王)’이었습니다.
 
위조제품보다 월등한 제품으로 돌파구를 찾아 전쟁이 끝난 후 서성환은 우리보다 두세 걸음 앞선 일본 화장품을 따라잡기 위해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습니다. 1956년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로 옮겼는데 이곳은 제가 출근할 때마다 매일 보는 곳으로 지금 빌딩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일본 시세이도(資生堂)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구용섭을 초대 연구실장으로 기용했습니다. 그는 정부 파견 연구원으로 독일 유학을 한 뒤 프랑스 코티(Coty)사와 기술제휴를 해 그 유명한 ‘코티분’을 생산하는 것으로 회사에 보답하지요.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할 때 서성환은 향수로 유명한 프로방스 남부의 ‘그라스’라는 도시를 방문했는데 이것은 그의 일생을 바꾼 여행이 됩니다. 향수의 원료가 되는 식물을 재배하는 모습에 서성환은 깊은 감명을 받고 죽을 때까지 식물에 관심을 갖습니다. 1961년 서성환은 “국내에서 원료를 확보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제주도의 한 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허인옥이라는 분을 영입합니다. 점퍼 차림의 유명 화장품회사 사장이 시골농부 같은 차림의 농업고등학교 교사와 만나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아마 서성환은 차밭을 일굴 때부터 커피보다 더 몸에 좋은 음료를 국민에게 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아마 서성환은 차밭을 일굴 때부터 커피보다 더 몸에 좋은 음료를 국민에게 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서성환은 허인옥을 만나자마자 왁스의 재료로 쓰이는 옻나무를 구할 수 있는 방법과 분포가 어느 정도인지, 라벤더나 재스민 같은 향료식물을 수입하면 우리나라에서 재배할 수 있는지, 모기향의 원료인 제충국(除蟲菊)을 키울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온실에서 첫 대화를 나눈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식물 재배를 놓고 밤새워 토론했지만 1960년대 중반 허인옥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두 사람은 1975년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됩니다.
 
새마을연수원교육장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습니다. 허인옥은 당시 새마을운동 교관으로, 서성환은 교육생 신분이었지요.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밤을 새워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서성환은 이때 허인옥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생각을 굳혔습니다.
 
당시 서성환은 전남 화순에 땅 2만 평을 사들여 립스틱 원료로 쓰일 식물안료를 얻기 위해 홍화와 제충국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신통한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서성환은 이 땅을 화순동초등학교에 기증하고 대신 제주도에 과수원을 사들였지요. 바로 이 시기에 서성환과 허인옥이 다시 만난 겁니다. 허인옥은 이후 서성환의 제주농장에서 유자-오가피-레몬-오렌지-파파야에 이어 바나나를 재배했습니다. 지금이야 바나나가 싸지만, 당시 바나나는 상류층 외에는 입에 대볼 수 없는 귀한 과일이었지요.
 
독자 여러분은 서성환을 삶을 추적하면서 제가 지난번에 보도한 ‘문갑식의 기인이사’ 16편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저는 정약용 선생과 유일-혜장스님과 초의선사가 차(茶)를 매개로 신분과 연령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눈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의 17편의 주제는 바로 차를 대중화시킨 ‘현대판 다성(茶聖)’이라 할 서성환과 차의 관계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서성환은 왜 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자주 해외출장을 나가면서 보고 느낀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만든 강진의 차 문화는 서성환에 이르러 대중화됐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만든 강진의 차 문화는 서성환에 이르러 대중화됐다.
 
화장품산업의 기반을 다진 서성환은 바나나 재배를 시작할 즈음 차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담긴 차 대접을 받으면서 서성환의 머릿속에서는 “왜 우리에게는 그런 문화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싹터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녕 우리에겐 차 문화가 없었을까요? 여기서 우리의 역사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차의 종주국은 중국입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한 것은 선덕왕 때인데 ‘삼국사기’ 흥덕왕 3년, 즉 서기 828년에 이런 기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해 1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케 했더니 당의 문종은 일행을 인덕전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져오니 임금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 있었으나 이때 이르러 성행하게 됐다.’ 신라시대 차 문화의 자취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강릉 한송정(寒松亭)입니다. 한송정은 이미 허물어졌지만 네 명의 신선, 즉 영랑-술랑-남랑-안상 등 4명의 화랑이 이용했다는 석지(石池)와 석정(石井) 같은 유물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저는 현장을 가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한송정 터가 공군비행장 안에 있어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전남의 차밭이 비교적 평탄하다면 하동 지리산쪽 차밭은 계단식으로 이뤄져 높낮이가 심하다.
전남의 차밭이 비교적 평탄하다면 하동 지리산 쪽 차밭은 계단식으로 이뤄져 높낮이가 심하다.

이렇게 시작된 차 문화는 고려시대 들어 더 융성해졌습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즉 고려도경이란 책을 보면 고려시대 차 문화의 일단을 볼 수 있지요. “연회가 있으면 뜰에서 차를 달여서 은으로 만든 뚜껑으로 덮고 조용히 거닐어 마신다.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차가 고루 나누어진 다음에야 마실 수 있기 때문에 그때는 언제나 차가 식은 다음이 된다.” 차 예절이 엄격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고려시대 차 문화에 대해서는 ‘고려사’ ‘대각국사문집’ ‘파한집’ ‘보한집’ ‘동국이상국집’ ‘포은집’ ‘목은집’ 같은 책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상류층이 즐겼던 고려의 차 문화는 실제로 차를 키우는 민중들에겐 노동력 착취와 동의어가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이 건국되면서는 차 문화가 탄압받지요. 차나무가 송두리째 뽑혀나가는가 하면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차 문화가 공식석상에서 사라지게 됐습니다. 다만 극히 일부의 선비들과 승려들만이 근근이 차 문화를 이어온 것입니다.
  
말차 한잔이 이렇게 호사스러울수없다. 도예가 권대섭씨 집에서는 손님에게 말차를 낸다.
말차 한잔이 이렇게 호사스러울수없다. 도예가 권대섭씨 집에서는 손님에게 말차를 낸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녹차가 재배된 것은 일본 돗토리현 출신 오자키라는 일본인이 광주 무등산 자락에 만든 무등다원이 최초였습니다. 이후 1940년 ㈜간사이페인트가 보성에 다원을 조성했는데 이것이 1957년 대한다업으로 바뀌게 된 거지요. 다시 이야기는 서성환과 차로 돌아갑니다. 서성환이 차 재배를 시작한 것은 1977년 무렵입니다. 그는 한국제다의 서양원 대표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를 한번 해보고 싶네. 한데 중역들이 싫어해서… 내 개인 재산으로라도 할 테니 아이디어를 주게.”
 
서 대표는 책에서 “서성환 회장은 차 농가의 은인이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분은 희망이 없던 차 사업에 빛이 됐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결심을 굳히자 서성환은 강진 월출산 부근과 제주도의 도순-서광지역을 사업 부지로 정했습니다. 마침내 1980년 제주도 서귀포 도순의 2만5000평 대지에서 녹차사업을 위한 개간이 시작됐습니다. 도순은 땅이 돌투성이로 소문난 곳이었는데 서성환은 김원경이란 분을 만나 그에게 개간을 일임했고 김씨는 눈물겨운 노력 끝에 차밭을 일구는 데 성공하지요.
   
 
 차밭 주위에 피어난 이름모를 꽃들이 풍경을 더 화사하게 만들었다.
차밭 주위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이 풍경을 더 화사하게 만들었다.
 
1981년에는 전남 강진 월출산에서도 개간의 굉음이 울렸습니다. 서성환이 이곳을 정한 것은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영향을 받은 강진-해남에 차 문화가 번성했고 월출산 자락의 월남리 백운동이 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운동은 한국 최초로 제품명을 갖고 생산한 녹차인 ‘백운 옥판차’와 ‘금릉 원산차’가 제조된 곳입니다. 당시 일부 월출산 인근 주민들은 서성환의 차밭 개간을 땅 투기로 오해했지만 정성어린 설득 끝에 이해를 받아냈고 지금의 차밭을 일궜지요.
 
서성환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8만 평에 달하는 제주도 한남다원 개간사(開墾史)입니다. 한남다원은 1995년 1차로 4만 평, 1997년 2차로 9만 평 등 단계적으로 개간됐는데 태평양 경영진에서 오너의 뜻에 강력하게 제동을 건 것입니다. “투자는 엄청난데 수익은 초라하다”는 논리를 앞세운 경영진은 “외국에서 원료를 들여오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서성환을 압박했지요.
 
서성환이 “외국보다 우위에 있는 다원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아무리 오너라도 힘으로 부하를 제압할 순 없었습니다. 결국 2년 동안 개간이 중단됐는데 서성환은 훗날 “경영진의 반대 때문에 사업을 중단한 게 천추의 한이 된다”고 한탄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기업에서는 사내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오너의 결단이 훨씬 중요하며 다른 기업에도 그런 사례가 많은 걸 알 수 있지요.
   
 
오른쪽 가운데 바위가 마치 차밭의 손잡이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른쪽 가운데 바위가 마치 차밭의 손잡이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서성환 전 회장의 노력으로 설록차는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고 세계 명차대회에서 수상도 많이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저렴한 가격에 차를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그 뒤를 이어 서경배 회장이 국산차의 명품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성환 전 회장은 2003년 1월 9일 한국 경제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타계했지요.
 
그는 고향 개성에서 지척인 경기도 벽제에 잠들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제주도에 있는 ‘오설록’이라는 차 박물관이 세워진 경위를 밝힐까 합니다. 서성환 전 회장은 1990년대 초 하와이에 있는 돌(Dole)이라는 파인애플농장에서 차 박물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수익성 때문에 실천하진 못했습니다.
 
1999년, 이미 몸이 많이 쇠약해진 서 전 회장은 아들 서경배 회장(당시 사장)이 문병 차 하와이에 들르자 다짜고짜 아들을 차에 태워 둘 파인애플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곤 이런 말을 남겼지요. “이거야, 이렇게 한번 만들어 봐.” 저는 제주도의 녹차밭을 보진 못했습니다만 우리 경제의 거인이 남긴 그 거대한 풍경화를 한번 꼭 취재하고 싶습니다.
 
글=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입력 : 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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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 ‘세상읽기’

gsmoon@chosun.com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선임기자를 역임했다. 현재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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