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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험] 맨손으로 세계적 盆栽공원 만든 成範永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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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맨손으로 세계적 盆栽공원 만든 成範永  
 
일개 농부가 이룩한 이곳의 개척정신을 배워라! (江澤民 중국 국가 주석)  
   
 『저는 나무들의 소리를 듣고 표정을 읽어요. 제 가족이니까요』
 
● 濟州에서 40여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일궈
● 정원 공사 중 8번 다치고, 6번 수술, 손톱은 수십 번 빠졌다 새로 나고
 
成範永
1939년 경기도 용인 출생. 서울 인창高 2년 중퇴. 제주도 청원농장 대표, 한국분재조합 제주도 지부장, 제주도관광협회 이사장, 한국자연예술문화 총연합회 고문, 중국 강소성 양주시 홍원분경원 명예원장. 대한민국분재 문화상, 제3회 전문경영인대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수상. 저서 「생각하는 정원」 등.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中國이 새마을운동을 배우는 곳 
 
 지난 6월 하순 중국 후푸궈(胡富國·70) 부빈개발협회(扶貧開發協會) 회장이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부빈개발협회는 민간단체지만 사실상 중국 국무원이 이끄는 전국적인 조직이다. 이 단체는 중국에서 중국판 새마을운동을 펼치고 있다. 장관급인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을 겸하고 있는 후푸궈 회장의 訪韓(방한) 목적은 경상북도와 제주도의 새마을운동 현장을 둘러보기 위한 것이었다.
 
1998년 4월「생각하는 정원」을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주석.
 
 새마을운동 현장을 둘러본 후 그는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둘러본 현장 중 어느 곳이 인상이 깊었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제주도에서 본 분재원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원래 황무지였던 곳을 성범영씨라는 분이 옥토로 바꿨다고 들었다. 새마을운동의 좋은 본보기라고 해서 들렀는데 정말 대단한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름대로 붓글씨를 한 장 남기고 왔다. 내용은 「경관이 정말 아름답지만, 그를 일군 정신이 더 소중해 보인다(景觀奇美 精神更貴)」이다. 농촌이 부유해지려면 개척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빈곤을 떨치려는 강한 정신을 느꼈다』
 
  후푸궈 회장이 말하는 분재원이란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3만6363m2(1만1000여 평) 규모로 만들어진 「생각하는 정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成範永(성범영·68)이라는 한 농부가 1968년부터 황무지를 개간해 1992년 7월30일 「분재예술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한 곳이다.
 
 
  장쩌민, 『개척정신을 배워라』
 
  1995년에는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주석이, 1998년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이곳을 다녀갔다. 장쩌민 주석은 이곳을 다녀간 후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일개 농부가 이룩한 이곳의 개척정신을 배워라』
 
  장쩌민의 방문은 「생각하는 정원」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중국인들에게는 「삼성전자-포스코-현대자동차-현대미포조선-생각하는 정원」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장쩌민 코스」가 한국 방문시 필수 방문 코스가 됐다. 이후 CNN 등 외국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되면서 「생각하는 정원」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해졌다. 호주의 한 언론은 「생각하는 정원」을 소개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생각하는 정원」 방명록에는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소감이 적혀 있다.
 
  『이 정원을 관람한 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우리 유럽에서는 개인이나 국가나 이러한 정원을 만들 방법이 없습니다』(스위스 관광大 하인츠 부키 총장)
 
  『이 정원의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천국의 한 조각을 이곳에 만들어 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버시바우 駐韓 美대사)
 
  『완벽합니다.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대단합니다. 명상의 시간이었습니다. 상상의 실현을 보았습니다.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정원! 축하드리며 감사드립니다』(미찰 보리스, 프리드 제럴드 독일 정원학교 교수 일행)
 
  장쩌민 주석의 휘호를 새긴 기념비 앞에서 분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成원장.

 

외국 지도자들과 조경 전문가들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成範永 원장은 『현재 완성도는 목표의 40~50% 정도』라고 말한다.
 
  정부의 지원 없이 맨손으로 지난 40여 년 동안 황무지에서 돌을 캐내고 돌담을 쌓고 나무를 심으며 「생각하는 정원」을 가꾸기 위해, 成원장은 목과 허리 등을 8번이나 다쳤고 6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십 번 빠진 손톱
 
  지난 7월2일 成원장을 만났을 때 기자의 눈에는 그의 손이 먼저 들어왔다. 검게 죽어 있는 검지의 손톱 때문이었다. 「생각하는 정원」은 成원장의 손길을 거친 분재뿐만 아니라 정원에 높게 쌓아올린 돌담들이 아름다움의 큰 몫을 하고 있다.
 
  成원장이 제주도의 돌들을 주워 와 직접 망치로 다듬으면서 쌓아올린 담이다. 1992년 7월 개원할 때까지 「생각하는 정원」 공사현장에 들어간 흙과 돌만 15t 트럭으로 1만 대 분량이 넘는다고 한다. 돌담은 지금도 계속 쌓고 있다.
 
  ―왼손 검지 손톱이 까맣게 죽어 있는데 공사하시다가 다치신 거죠.
 
  『지금 많이 나은 상태예요. (손톱들을 가리키며) 요것도 빠졌다가 다시 나온 거고, 네 군데가 동시에 까맣게 멍들은 적도 있죠. 돌에 많이 찧었어요. 허리 수술 후 제 허리에는 핀이 세 개가 박혀 있어요. 공사하다가 허리·목·다리 등을 다쳐서 여러 번 수술을 했죠. 손톱은 수십 번 빠졌다 새로 나고 했어요』
 
  ―오른손 손마디가 손의 다른 부위보다 하얀데요.
 
  『그건 다치기도 했지만 돌에 부딪히면서 많이 닳아서 그런 거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 주인공 자신은 정작 「세계에서 가장 상처투성이인 농부」가 돼있었다.
 
  成範永 원장의 고향은 경기도 용인이다. 부친 成龍準(성용준·작고)씨와 모친 方岳伊(방악이·작고)씨 사이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에서는 학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자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을 해서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를 다녔다.
 
  서울 교동에 있는 요릿집이었는데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고 신문배달도 하면서 서대문에 있는 인창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학교까지 걸어서 다녀야 했던 것은 물론 양말을 제대로 신고 다니지 않아서 겨울에는 동상에 걸려 늘 고생했다.
 
  高2 때 등록금을 못 내자 담임선생님이 두 차례나 대신 내주었지만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1959년 高2 때 자퇴 후 군대에 지원하는 길을 택했다. 제주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같은 내무반 동기가 제주도 사람이었다. 그 군대 동기로부터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 친구의 고향이 지금 「생각하는 정원」이 있는 한경면 저지리다.
  
 
  軍시절 동기를 찾아 濟州로
 
  軍에서 제대한 다음 해인 1963년 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를 방문하고 돌아 온 대학교수들이 한라산의 경관과 제주도를 방문한 소감을 들려 주는 방송이었다.
 
  軍시절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목포에서 배편을 이용해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는 아름다웠지만 가난했다. 가난했지만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고향에서 과수원을 하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는 成원장에게 농사 짓는 일은 절실한 일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화원에서 당시로서는 드문 분재를 보고난 후 근교의 화원을 틈나는 대로 찾아다녔던 成원장은 제주도에서 나무를 기르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나무를 기르는 농사꾼이 되겠다는 마음만 제주도에 놓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아는 분의 소개로 남대문 자유시장에서 노점 가판대를 얻어 옷장사를 했다. 돈이 조금씩 모였다. 아직 제주도로 가서 농사를 지을 만한 돈은 되지 않았다. 와이셔츠를 직접 만들어서 팔기로 했다. 그 사이 제주도에 4959m2 규모의 밀감밭을 사들였다.
  
 
  와이셔츠 가계로 돈 벌어 땅 사들여
 
  1967년 서울 대한극장 앞에 「캘리포니아」라는 와이셔츠 가게를 열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자 무교동으로 가게를 옮겼다. 장사가 잘 됐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았다. 지금 「생각하는 정원」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외국인들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듯이, 成원장의 와이셔츠 가게는 외국인들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駐韓 외국인들의 대부분은 成원장의 와이셔츠 가게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한국으로 부임하는 駐韓 외국 대사들 사이에는 成원장의 가게에 들러 와이셔츠를 맞춰 입고 가야 신임장을 받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24시간 이내에 맞춤 와이셔츠를 지어주기 때문에 訪韓한 미국의 포드 대통령, 닉슨 대통령의 수행원들이 그곳에서 와이셔츠를 맞춰 입었다. 당시 외국에서는 와이셔츠 한 벌을 맞춰 입는 데 20일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장관은 물론 청와대 직원들까지 단골이 되었다. 가게가 번창해 소공동에 가게를 더 냈고, 1970년에는 경기도 반월에 4만9587m2 규모로 와이셔츠 공장 부지를 확보했다. 직원은 4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 비결을 成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많이 만들지 않아도 완벽하게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일했어요. 외국 유명브랜드를 구입해 재봉 상태를 분석했죠. 1cm 안에 몇 바늘이나 꿰맸는가를 확대경으로 비춰 보며 분석을 하는 식이었죠. 면과 실크의 원단이 줄지 않도록 물로 세탁한 후 재단을 했고요. 무엇보다 손님과 약속한 날짜는 꼭 지켰습니다. 당시 손님의 60% 정도가 외국인이었습니다』
 
  가게가 번창하는 와중에 그의 마음은 언제나 제주도와 나무 기르는 농부에 머물러 있었다. 1968년 「생각하는 정원」의 출발이 된 「청원농장」을 만들었다. 감귤 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장이었다.
 
  그때부터 成원장은 서울의 가게는 아내(馬慶淑·마경숙·58)에게 맡겨 두다시피 하고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저지리 땅 3만6363m2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직접 돌을 나르고 담을 쌓고 나무를 심는 成원장에게 마을 사람들은 『저 두루외(「미친 놈」이란 제주 사투리) 낭(「나무」의 제주 사투리)이 밥 먹여 주나』고 비웃기도 했다. 『돌에 미친 돌챙이(돌담을 쌓은 사람을 가리키는 제주 사투리)』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을 남자들이 잡담과 술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돌을 나르고 나무를 심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제주도에까지 불어닥치면서 그는 「생각하는 정원」을 새마을운동의 모범 사례로 만들 결심을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집에 돌을 고르고 나무를 심는 변화가 서서히 찾아왔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
 
  1974년에는 주민등록을 제주도로 옮겼다. 와이셔츠 공장 부지를 팔았고, 강남에 있는 땅을 팔았다. 나중에는 서울에 있는 집까지 팔았다. 몸과 마음은 물론, 그의 全재산을 「생각하는 공원」에 투자했다. 1980년 초에는 아내까지 제주도로 왔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곳은 백년이 가도 발전할 수 없는 산 중턱인데 무슨 짓이냐, 하루라도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라』고.
 
  그는 대답했다. 『이곳을 제주시나 서귀포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 테니 지켜보라』고.
 
  손목을 다치고 어깨를 다치고 허리도 다치며 1992년 7월에 「분재예술원」을 개원했다. 개원했을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공사 중간에 『여보, 나랑 애들은 놔주시구려. 내가 서울로 올라가 봉제공장을 다시 돌려서 돈을 벌어 보낼 테니 그 돈으로 품꾼을 사서 쓰고…』 했던 아내였다.
 
  成원장의 아내 마경숙씨는 제주도로 온 1980년 초부터 공사장 인부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나무에 물을 주는 일 등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남편의 일을 도왔다. 긴 시간 너무 지친 나머지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남편에게 울먹이며 『나랑 애들은 놔달라』고 했던 것이다.
 
  제주도를 떠나기로 했던 그날 아내는 부엌에서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깨어난 그녀에게 갑자기 詩(시) 같은 글귀가 떠올랐다고 한다. 成원장의 아내는 기독교인이다.
 
  <우주촌에 아주 작은/강하고 저력 있는 민족/은혜의 땅 한국이 있다/그 땅 끝 남쪽으로/환상의 섬, 아름다운 평화의 섬/시각으로 느낄 수 있는 산물이 있다
 
  서회선 쪽 멀리 떨어진/중간산에 가시와 엉겅퀴와/작지로 버려진 곳이 있다/여호수아와 갈렙이/하나님의 멍에 속에/순종하는 은혜의 땅이라/뜨락은 젖과 꿀이 흐르는/생명체의 예술인/분재, 정원수, 아열대 식물, 돌/물의 조화를 이루는/섭리의 땅이 숨쉬고 있다>
 
  아내는 그 후로 그곳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다. 시인이 아닌 시인이었던 아내의 詩를 成원장은 「생각하는 정원」 한쪽에 詩碑(시비)를 세워 새겨 놓았다. 어려움 속에서 「생각하는 정원」과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개원 당시 공정률은 25%에 불과했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불편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명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1995년 장쩌민 주석이 방문한 이후에는 외국 방송과 언론에 「세계 유일의 분재공원」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됐다. 입장객 수도 매년 30~40%씩 늘어났다.
 
 
  IMF 때 주거래 은행, 경매처분 통고
 
  「好事多魔(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97년 말 불어닥친 IMF 한파는 「생각하는 정원」을 비껴가지 않았다. 1998년 10월 「생각하는 정원」은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경매처분 통고를 받았다. 투자액의 10%도 안 되는 부채 때문이었다. 다른 금융기관의 문을 두드려 봤지만 분재같은 식물은 담보가 될 수 없었다. 몸이 깨지고 부서지며 세운 건물이나 인공연못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매로 넘어갔다. 1차 경매가 유찰되고 2차 경매가 공고되자 헐값에 「생각하는 정원」을 넘겨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정원의 정경을 비디오로 찍고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평소 成원장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그들의 브로커가 돼 있었다.
 
  체념했다. 경매가 있는 날 애써 가꾼 분재나 조경수들이 비바람에 상처 입지 않도록 돌담을 높이 쌓는 일에만 열중했다. 누가 이곳의 주인이 되더라도 나무를 아끼고 돌을 아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고 기도했다.
 
  언론에 「생각하는 정원」의 어려운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성원이 이어졌다. 경매가 여러 차례 더 유찰됐고, 成원장은 주변의 도움으로 생명처럼 아꼈던 「생각하는 정원」을 지켰다.
 
 
  분재는 생명예술
  
  지나온 삶을 담담하게 말하던 成範永 원장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분재가 뭐기에 그렇게 빠졌냐』고. 그가 편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분재는 자연을 모방하거나 축소해 놓은 것이 아니에요. 자연을 소재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면서 기르는 사람의 미적 감각과 개성을 발휘해 본래의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는 일이죠』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이유로 나무를 철사로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하면서 자연에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닙니까.
 
  『옛날에 우리 정원을 방문한 교수 한 분이 제게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하면서 저더러 「잔인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해주었어요. 「아름다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분재에 감아 놓은 그 철사, 알미늄 선은 아름다워지기 위한 방법입니다. 식물의 성장을 통해 수형을 교정하는 데 잠시 사용할 뿐이지 식물을 자라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같은 겁니다.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公교육을 통해 훌륭한 지성인을 길러 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까」라고 했죠. 저는 나무를 기를 때 제 자식을 기르는 마음으로 기릅니다』
 
  ―저와 같은 질문을 하는 분들이 꽤 있죠.
 
  『처음 개원했을 때는 한국 관람객의 70~80%가 그렇게 얘기했죠. 개원 초기 저는 우리 직원들을 모아 놓고 「70~ 80%의 한국 방문객이 분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이걸 우리가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걸 못 하면 우리는 실패한다. 나는 이걸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했어요.
 
  우리 관광객들은 공원을 안내해 주려고 하면 「우리는 안내가 필요 없다」고 해요. 분재의 모양만 보면 분재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안에 깃든 철학 같은 것은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로 80~90%가 설명을 들으러 옵니다』
 
  ―그래서 분재 하나하나에 설명을 다 붙여 놓은 것이군요.
 
  『문학인들이나 교수, 외국인들은 설명이 정말 일품이라고 합니다. 나무를 이렇게 키워야 하고, 우리 인간이 그렇게 키움으로써 거기서 무얼 깨닫고 배우게 되는지 그것을 연구해서 제가 글로 써서 붙였죠. 그것을 5개 국어로 번역해서 설명해 놨어요. 생물학자, 식물원 경영자 등 각 세계의 전문가들이 와서 「세계 어느 식물원에서도 이런 설명을 본 일이 없다」면서 깜짝 놀라요. 이렇게 철학적으로 글을 써서 나무에 대해서 이해하기 좋도록 해놓은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거예요』
 
 
  가장 성질 급한 나무는 매화
 
  ―분재 작품마다 설명이 약간씩 다르겠지만, 설명할 때 기본 원칙은 어떤 겁니까.
 
  『분재의 정의를 말하는 거죠.
 
  「분재는 살아 있는 나무를 소재로 삼아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사랑으로 완성하는 생명예술이다. 분재는 오랜 세월을 바쳐 완성하고,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시간예술이다. 분재는 기르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름답게 완성하는 인격예술이다. 분재는 우주와 자연과 인간과 과학과 미학의 힘으로 완성하는 종합예술이다」 하는 것이죠』
 
  ―분재하기에 가장 좋은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樹種(수종)별로 중요하지만 우리들은 작품성을 따지죠. 「어떻게 생겼느냐」가 중요하죠. 나무는 전부 목적이 있습니다. 꽃으로 역할하는 것이 있고, 열매로 역할하는 것이 있고, 모양으로 역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역할에 맞게 나무를 가꾸어 나가는 게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나무의 성격을 모르면 나무를 키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좋아하는 쪽으로만 가면 나무는 죽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무가 소나무인데 소나무는 사람으로 치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까.
 
  『좀 어렵네요(웃음). 어떻게 보면 끈질기다고 볼 수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선비와 같은 의리가 있고, 지조가 있는 나무라고 보고 있죠. 소나무는 변함 없는 푸른색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나무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는 성격이 柔(유)하고 능글능글하며 여유가 있고, 어떤 나무는 성미가 팔팔해서 제 성미에 못 견뎌 조금만 잘못하면 금방 죽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격이 柔한 나무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모과나무가 그렇죠. 그 나무는 접도 잘 되죠. 그런데 그것도 잘못 다루면 그냥 가버립니다』
 
  ―성질이 급한 나무는요.
 
  『매화나무죠. 참나무도 성격이 급한 나무죠. 나무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특성을 알아서 잘 키워야죠. 나무는 사람을 관리하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제가 직원들한테 그러죠. 「야, 너는 저 나무가 비명 지르는 게 안 보이냐, 저 나무는 지금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하고 있다」 저는 나무들의 소리를 듣고 표정을 읽어요. 제 가족이니까요』
 
 
  나무들은 내 가족
 
  ―「생각하는 정원」에는 분재가 몇 점 있습니까.
 
  『전시되고 있는 것은 400여 점, 지금 키우는 것까지 하면 3000~4000점이 될 거예요』
 
  ―그럼 가족이 3000~4000명인 셈이네요.
 
  『일본에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완성목을 제대로 관리하려면 한 사람이 10株(주) 내지 20주밖에 못 한다고 합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안 되지만. 식물을 좋아하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한가로워지고 평화로워져요. 순화가 되는 거죠. 성미 급한 사람은 이런 것 못 한다고 하는데, 저는 성미 급한 사람이 이런 걸 해야 된다고 봐요. 그래야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한가로워지거든요. 나 역시 성질이 급하지만 이걸 하다 보면 한가로워지고 평화로워져요』
 
  ―지금도 공항이나 제주시에서 「생각하는 정원」으로 가는 노선버스가 없습니까.
 
  『없어요. 버스를 갈아타야 돼요. 지금도 없고, 당시 제가 시작할 때에는 하루에 버스가 한두 대 다녔어요. 4시간 걸려서 돌아서 갔어요. 돌밭이었으니까』
 
  ―제주관광이 위기를 맞고 있는데, 대중교통 체계와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결국에는 재정적인 열악함 때문에 못 하는 거죠. 제주가 앞으로 저렴한 관광으로 가야 하는데, 정부 예산이 그렇고 道 자체가 영세하니까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한 셔틀버스를 운영하지 못하는 거죠. 렌터카니 전세버스니 택시니, 뭐 이러니까 고비용이 되는 거죠. 그게 주 원인입니다』
 
  ―대중교통이 발달되면 제주관광 진흥에 상당한 도움이 되겠군요.
 
  『그렇죠. 홍콩이나 싱가포르같이 대중교통이 발전하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곳을 표 끊어서 구경하고, 또 타고 가다가 구경하고 이렇게 돼야 하는데』
 
  ―「생각하는 정원」으로 가는 버스편의 문제만 아니고, 제주 전체가 그렇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전체가 문제죠. 이번에 상호를 완전히 바꿉니다. 「분재예술원」이 아니고 「생각하는 정원」으로』
 
 
  장쩌민의 방문
 
  ―정쩌민 주석은 어떻게 「생각하는 정원」을 방문하게 됐습니까.
 
  『장쩌민 주석이 1995년 11월에 다녀가기 전에 당시 인민일보 판징이(范敬宜) 총편집장이 다녀갔어요. 장쩌민 주석이 방문하는 날 판징이 편집장이 인민일보에 「新病梅館記(신병매관기)」라는 「생각하는 정원」의 관람기를 썼어요. 「병매관기」는 淸 왕조의 폭정을 매화에 비유하며 분재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 책인데, 그런 분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정확히 모르지만 사전에 이곳을 다녀간 판징이 총편집장의 영향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장쩌민 주석은 예정 시간보다 40분이나 긴, 1시간10분 동안 이곳을 둘러보고 가셨어요』
 
  2004년 4월 成원장은 「생각하는 정원」이라는 책을 냈다. 농부로서 예술가로서 분재를 하면서 느꼈던 소회와 철학 등을 담담하게 서술한 책이었다. 책을 발간한 곳은 우리나라 대표적 출판사인 「김영사」였다. 이 책은 중국 등 외국에서 번역돼 출간됐다.
 
  ―「생각하는 정원」을 김영사에서 출간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제의가 있었습니까.
 
  『저는 김영사를 몰랐어요. 김영사 사장이 우리 정원을 답사했던 모양이에요. 그러고 나서 숙소에 가서 제 아들을 불렀어요. 그래서 아들이 저녁에 갔다 오더니 다음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김영사에서 책을 내자고 했다고요』
 
  ―몇 개 국어로 번역 출판됐습니까.
 
  『중국어·영어로 출판됐고, 독일어는 준비 중이고, 프랑스어로 번역 중이에요. 내년에 서반아어로 번역할 예정이고, 일본어가 지금 얘기 중입니다. 각국에서 와서 보고 자기네들 언어로 출판해 달라고 야단들이에요.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선진국 사람들이 정원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아요』
 
 
  설계도 없는 정원
  
  ―『다른 분재원에 일부러 가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혹시 다른 분재공원을 둘러보면 모방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까.
 
  『그건 알아서 해석해 주세요. 제가 처음 분재원 만들 때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일본에 한 세 번 가봤죠. 그런데 답이 나오질 않아요. 제주도에 제가 아는 조경 설계업을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하고 의논했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우리 제주도의 오름(제주지역에 있는 기생화산을 이르는 제주 사투리)을 상징해서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제가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작이 됐어요.
 
  친구의 조언을 들은 후에는 혼자서 생각해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은 것은 없습니다. 자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 많은 고민을 하는 거죠. 생각을 이렇게 바꿔 보고 저렇게 바꿔 보고, 한숨 자다가 새벽 1, 2시에 깨면 그 생각이었죠. 깨어나면 빨리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한두 시간 더 자고 새벽 4, 5시면 바깥으로 나오는 거죠』
 
  ―「생각하는 정원」의 설계도가 없는 겁니까.
 
  『없죠. 설계도가 있을 수 없고요. 한 7년 전에 아널드 파머의 조경팀 7명이 왔어요. 비디오로 전부 찍고 돌아보고 나서는 나한테 설계도면을 보여 달래요. 그래서 「설계도면이 여기 없고 멀리 가 있다」고 했어요. 「왜 도면이 멀리 가 있느냐」고 또 물어요. 집요하게 보여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 머리에 있어서 보여 줄 수 없으니 미안하다. 내가 혼자 생각해서 만든 거다」 했어요. 그랬더니 막 폭소를 터뜨렸어요. 2005년 워싱턴에서 세계분재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초청받아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가면서 공원 하나를 봤어요. 그런데 거기서 뭐 하나 도움될 게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굳이 일부러 보기 위해 돌아다니거나 한 일은 없어요』
 
  ―외부에서 초청이 많습니까.
 
  『지금 초청받아 놓은 게 대략 러시아 국회의원, 뉴질랜드 국회의원, 이탈리아인으로 제일모직 고문 역할 하는 분 등이 있고, 중국에서는 수없이 오고요』
 
 
  『세계를 보는 중국인의 눈이 넓고 깊다』
  
  ―화교를 사위로 맞았고, 중국과는 인연이 각별한 것 같습니다.
 
  『중국 사람들 대단해요. 그분들은 자기네들이 조금이라도 보고 배워야 될 곳은 집중공략하는 것 같아요. 보는 눈이 깊고 빠릅니다. 우리 정원을 관람한 후 방명록에 써놓는 글들을 보면 글을 참 잘 써요. 잘 보고, 잘 이해했기 때문에 소감을 잘 쓰는 거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와서 보고 써놓는 것하고 비교하면 유치원생과 대학원생 차이예요』
 
  ―한자어라는 언어적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물론 한자어가 철학적인 개념이 많이 있는 것도 영향이 있겠죠. 제가 볼 때는 세계를 보는 눈이 넓고 깊다고 봐야 합니다』
 
  ―영어권 외국인들은 어떤 반응입니까.
 
  『대단하죠. 그분들은 좋은 글을 남겨요. 우리나라에도 특이하게 잘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외국에서 공부한 분들이에요. 해외에서 공부하고 사업하던 사람들의 반응은 외국인하고 같아요. 해외여행을 많이 한 분들이 그렇고요. 그분들은 세계를 한눈에 넣고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분들이죠』
 
  ―국내에서는 원장님을 초청하는 단체나 사람들은 없습니까.
 
  『더러 있습니다』
 
  ―해외 초청이 더 많습니까.
 
  『그렇죠. 지금 중국에만 60여 차례 갔는데요. 대단합니다』
 
  ―「생각하는 정원」에서 한국인과 외국인의 관광 습관의 차이를 잘 볼 수 있겠군요.
 
  『좀 부끄러운 얘긴데 외국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 한국인이 너무 어려 보여요. 아직도 세계와의 거리가 좀 멀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외국인들은 분재 하나하나, 돌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궁금증을 참지 못해요.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 관광객들은 휙 둘러보는 정도죠』
 
  ―내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
 
  『내국인이 85~90% 가까이 되죠. 숫자상으로는 그렇게 되는데 차이가 있죠. 예를 들어 지난가을 미국의 다이내믹 조선소 부회장은 일행 6명과 함께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생각하는 정원」만 보고 떠났어요. 남아공, 브라질, 핀란드와 노르웨이 등 세계 각지에서 「생각하는 정원」만 보러 왔다는 분들이 많아요. 듣는 저로서는 굉장히 고무가 되죠. 전문가들로부터 평가받는 거니까요』
 
  ―국내에서 「생각하는 정원」 같은 곳이 또 있습니까.
 
  『현재 이렇게까지 만든 곳은 없습니다. 일본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곳이 없습니다. 전 세계에 없습니다』
 
  ―전 세계에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이기도 한데, 외국인들이 와서 보고 그대로 모방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지금 제가 노파심이지만 마음속으로만, 「전 세계인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는데 이걸 내가 언제까지 유지해 갈 수 있겠는가, 언젠가는 여기저기서 도전을 받아서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못 쓰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죠』
 
 
  100% 완성은 10년 쯤 뒤
 
  ―정원 공사의 공정률이 목표의 50% 쯤 됐다고 하는데, 100% 완성은 언제쯤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욕심이야 10년 안에 만들고 싶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친구들이 와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걸 유럽 쪽에 홍보하면 관광객을 1000만, 2000만 유치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라고 말이죠. 스페인이 작년에 관광객 6000만 명을 유치했어요. 바르셀로나의 시민을 다 먹여살린다는 게 가우디가 만든 「구엘 공원」 아닙니까.
 
  하나만 좋으면 전체가 좋게 돌아갑니다. 세계적인 것 하나만 제대로 탄생하면 한국 전체가 살 수 있습니다. 세계 42위 관광국에서 12위고, 10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거죠. 다만 얼마만큼 최고 지성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느냐, 돈만 가지고 급조해서 만드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그 사람들이 인정 안 합니다. 때가 묻고 혼이 들어가고, 시간이 흘러야 하고, 그 의미 부여가 중요한 거죠. 이야기가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IMF 외환위기 때 상당한 고통을 당하셨던데 경매장에는 왜 가지 않았습니까.
 
  『마음을 비웠죠.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자는 생각으로 체념했죠. 저희가 백방으로 노력해 봐도 안 되고, 모든 사람들이 저를 부정적으로 보니까 제 능력은 여기에서 한계가 온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모든 걸 체념하고 돌담만 쌓고 있었죠. 혹시 다른 사람이 이걸 하게 되더라도 이 나무들을 아끼고 보호하면서 잘 해야 하지 않을까만 생각했죠』
 
  ―만약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면 그 자리에 큰 식당이 들어서지 않았을까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전에 투자할 사람들이 많이 연락하고 찾아왔었는데, 만나자고 해서 수차 만났어요』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준재벌급에 속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분들은 한결같이 투자금을 뽑을 것만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못 한다. 내가 손을 떼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못 한다. 이게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영업 쪽으로만 간다면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고 거절했죠』
 
  ―그래도 투자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아뇨, 제게는 하나의 신념이 있습니다.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관광보다는 문화예술 쪽으로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거죠.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여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예술인들을 끌어들이고 싶어요. 여길 찾아와서 그분들이 감동하면 우리나라의 격이 좀더 올라가는 거죠.
 
  아직은 그렇지 않지만 저는 언젠가는 그런 분들이 우리 정원을 찾아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을 끌어들이면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긍지를 높일 수 있고, 자존심을 살리면 관광은 저절로 잘되리라고 믿습니다』
  
 
  「세계 최고」 평가를 원해
 
  ―「생각하는 정원」을 상업성보다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가꾸겠다는 신념을 갖게 된 때는 언제부터입니까.
 
  『정원을 만들면서부터죠. 이걸 만들면서 저는 어떻게든지 세계에 없는 독특한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일해 오고 있고요. 「연간 50만 명, 100만 명이 관광 오는 것보다 세계의 최고 전문가로부터 평가받는 것을 원한다」는 거죠』
 
  ―제주관광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가나 제주도나 유능한 사람들이 많은데, 접점을 찾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한국이나 제주도는 환경은 세계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유물이나 문화유산, 그리고 관광정책에서 우리 한국이 뒤지고 있는 거죠. 우리가 뚫고 나갈 길은 다른 나라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장기간 개발하는 겁니다.
 
  혼이 들어가고 때가 묻어서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적인 걸 우리가 못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죠. 세계 최고 지성인들이 감동할 수 있는 상품이 나와 주어야 하는데 나오지 않는 거죠. 최고 지성인들이 찾아와서 감동하고 그런 분들이 찾아주면 관광객 유치는 저절로 된다고 봅니다. 그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관광은 굉장한 어려움에 처할 겁니다. 50년, 100년 혼이 들어간 한국에 와서만 볼 수 있는 세계적인 관광상품을 만들어 내야죠』
 
  ―그렇다면 제주에는 「생각하는 정원」 외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네요. 다만 우리 정원은 해외 언론이나 전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재벌이 만들었다면 이만큼 각광받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그걸 확신합니다.
 
  비유로 들기는 뭣하지만 에버랜드에 장쩌민 주석이 갔습니까. 그분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부족한 농부가 혼자서 40년 동안 몸부림치며 맨주먹으로 몸을 다쳐 가면서 만들어 왔다는 그 정신력을 조금이나마 인정했기 때문 아닐까요. 혼자서 이런 걸 만들었다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분들에게 감동을 준 거죠』
 
  ―정원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원장님의 철학에 더 감동을 받았다는 말씀이네요.
 
  『아직 저는 부끄러운 입장입니다. 크고 좋은 나무들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해야 될 일이 많습니다. 현재까지 그분들이 평가하고 그러는 것이 그런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주를 외면하는데,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외국인들이 와서 한결같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제주도는 교통이 너무 불편하다」는 거예요. 저는 제주 제2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4, 5년 전부터 얘기했습니다. 전에 청와대 고위관리들한테 그랬어요. 제주도를 제대로만 개발한다면 대한민국 식구 다 먹여살릴 수 있는 자원이라고요. 고급회의 산업과 고급휴양 산업이 있는 고급관광지로 가야 합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제주관광이 고급관광 쪽으로 가려면 전체를 공원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걸 대비해서 하루속히 제2 공항을 만들어야 합니다』
 
 
  소나무 같은 사람
 
  ―분재학교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까.
 
  『제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지만 비용 때문에 엄두를 못 내요. 분재를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완벽한 기사 자격증을 주어서 내보내려면 적어도 5~6년은 걸린다고 봐요. 이들을 기숙사에 수용하려면 1년에 10명만 졸업시켜도 50~60명이 될 거고, 그 경비가 상당하니까 엄두를 못 내고 있죠. 쉬운 문제는 아니에요』
 
  ―그래도 후계자 양성은 해야 할 텐데요.
 
  『지금 일부 가르치고는 있지만 쉽지 않아요. 재정이 가장 문제죠. 젊은 사람들이 와서 공식적인 학교 졸업장을 주지 않는데 몇 년씩 봉급 적게 받고 있으려고 하지 않아요』
 
  ―봉급을 많이 주면 되지 않습니까.
 
  『아직 그럴 형편이 못 돼요(웃음)』
 
  ―후계자는 35명 직원 가운데서 나와야겠네요.
 
  『그렇죠. 우리 직원들이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일하고 있어요. 1년 365일 하루도 문 안 닫죠. 땅 파고 나무 심고 장비 갖다 놓고 관광객들이 관람을 시작하기 전에 일을 끝내야죠. 우리는 관광객들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요. 문을 닫은 후 밤에 해야 하는 일이 많고요. 하루에 12~14시간씩 해야 하는데, 노동법 따지면 할 수 없는 거죠. 사명감 없이는 못 하는 일이죠』
 
  ―노조 만든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웃음) 저희는 그런 사람이 없고요, 식물원은 그런 사람이 하면 망하는 겁니다. 나무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저를 미워하거나 애정을 안 주면 금방 병들고 썩어 버립니다. 기술은 나중이고 애정이 더 필요하죠. 사랑을 먹고사는 거죠』
 
  나무는 사람하고 똑같다? 그렇다면 成範永 원장은 어떤 나무를 닮았을까. 그는 「의리가 있고 지조가 있다」는 소나무를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월간조선 2007년 8월호)
사진 이태훈 기자

입력 : 2007.08.28

조회 : 3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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