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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映像의 마술사 鄭一成 촬영감독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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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映像의 마술사 鄭一成 촬영감독 

 『내 상상력의 원천은 독서… 창의력 위해 남의 영화 안 본다』   
 『내게 영화는 시대에 저항하는 수단… 「만다라」·「만추」의 무채색이 거기서 나왔다』
 
鄭一成
1929년 일본 東京 출생. 東京제2공업中 졸업. 서울大 기계공학과 졸업. 영화인협회 부이사장. 영화촬영감독협회 고문. 동국大 영화영상학과 겸임 교수. 「천년학」·「하류인생」·「취화선」·「춘향뎐」·「서편제」·「장군의 아들」 등 140여 편 촬영. 대종상·청룡상·백상영화제·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 등 수상.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두 영화계 巨匠의 만남 
 
 개봉(지난 4월12일) 이전부터 한국 영화의 巨匠(거장) 林權澤(임권택·71)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라는 이유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 「천년학」이 전국 관객 20만 명을 넘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천년학」은 林감독의 100번째 영화라는 게 화제의 중심이었지만, 화제의 무게를 더한 것은 이 영화를 함께 만든 林감독과 鄭一成(정일성·78) 촬영감독 때문이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영화계에서 鄭一成이라는 이름은 「감독과의 동반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林감독은 2002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감독」이고, 「취화선」의 촬영감독으로 「대한민국 대표 감독」 탄생의 1등 공신인 鄭감독은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촬영감독이다.
 
  林감독이 국내 최초로 관객 100만 명 시대를 연 「서편제」(1993)를 만들 때도 촬영감독은 鄭一成이었다.
 
  「만다라」(1981) 이후 「서편제」, 「장군의 아들」(1988) 등 20여 편의 영화를 함께해 온 두 巨匠(거장)의 「찰떡 호흡」으로 빚어진 작품이라는 점과, 「100번째 작품」이라는 수식어의 결합은 「천년학」을 화제의 중심에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흥행은 실패했다.
 
  기자는 鄭감독을 두 차례 만났다. 첫 번째 만남은 「천년학」의 흥행이 저조한 상태였지만, 그가 아직 흥행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을 때인 5월1일이었고, 두 번째 만남은 관객 동원 20만 명을 넘기지 못하고 종영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간 5월7일이었다.
 
  봄비가 오락가락하던 5월1일 오후, 강남구 청담동 소재 그의 개인 사무실을 찾았다. 외아들 현기(40)씨가 운영하는 광고회사 건물로 일반주택을 사무실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파란색의 외관이 특징인 그 건물 한쪽에 鄭감독의 사무실이 있었다.
 
  책장에는 영화 관련 일본 책들이 전집을 꽂아 놓은 것처럼 빼곡했고, 책상 위에는 鄭감독이 최근에 읽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책 30여 권이 놓여 있었다. 「영화학 논총」 등 영화 관련 책들이 먼저 눈에 띄었지만,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같은 수필집부터 「한국민중사」·「군중과 권력」 같은 사회과학 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있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 책들의 공통점은 책장 또는 책상 위에서 가지런히질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잘 정돈된 지식과 철학의 깊이가 가늠되는 정경이었다.
    
  청바지에 선글라스
  
  그 책상과 책장의 주인이 착용한 청바지에 옅은 갈색의 선글라스는, 만 78세라는 주인의 나이를 잊게 했다. 그 「젊은 노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인터뷰를 해도 된다』며 기자 앞으로 영화필름통으로 만든 재떨이를 내밀었다.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체인 스모커 수준은 아니지만 인터뷰 중 그는 틈나는 대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루 세 갑을 피운다고 했다.
 
  청바지와 선글라스, 영화필름통 재떨이와 수북한 꽁초, 짧은 머리와 흰 턱수염… 이런 소품들은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물건들인 양 그의 곁에서 자연스러웠다. 목에 걸고 있는 휴대폰은 넥타이 대용으로 충분했다. 인터뷰 중에 간간이 휴대폰이 울렸는데, 그에게 휴대폰은 세상과 소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청바지를 즐겨 입으십니까.
 
  『싸고 편해서 즐겨 입어요. 이것처럼 질긴 바지가 없고, 편한 바지가 없어요. 아무 데나 앉아도 되고 물빨래를 해도 되니까 경제적이죠』
 
  ―일년에 넥타이는 몇 번 매십니까.
 
  『일년에 한두 번 정도죠. 시상식이나 행사 때 외에는 안 매는데 그때도 갑갑해서 금방 풀어 버려요』
 
  ―선글라스는 항상 착용하십니까.
 
  『오랫동안 촬영하다 보니까 눈이 많이 나빠졌어요. 촬영할 때 오른쪽 눈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 눈은 오히려 괜찮고 왼쪽 눈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도수를 넣어서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죠. 편해서 쓰는 건데 주위에서 배우도 아닌데 왜 선글라스를 쓰냐고 해요(웃음)』
 
  흰 턱수염은 鄭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다.
 
  ―수염은 젊었을 때부터 기르셨습니까.
 
  『1982년에 단양으로 촬영을 갔는데 전기와 수도가 없는 지역이었어요. 그때 수염을 못 깎았죠. 그때부터 기르기 시작한 거죠』
 
  ―멋있다고 생각하시나 보죠.
 
  『깎는 게 귀찮아서 그냥 기르기 시작한 거예요』
 
  기자는 처음부터 「천년학」의 흥행 저조에 대한 소회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직 흥행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는 鄭감독 앞에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鄭감독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끊고 鄭감독이 말했다.
 
  『박정자씨인데, 오늘 「천년학」을 봤는데 무척 감동받았다는 전화네요』
 
  鄭감독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서편제」는 개봉 3週 후에야 뜨기 시작
  
鄭감독이 탤런트 고소영과 함께 사진 모델로 나선 영캐주얼 의류 흑백광고.
  ―그렇지 않아도 「천년학」에 대해서 여쭙고 싶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한 것 아닙니까.
 
  『관객이 잘 안 들어와요. 요즘은 코미디나 사람 죽이는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일본 만화를 소재로 영화化를 한다든지, 일본 줄거리를 영화化한다든지, 미국 영화를 흉내내는 국적불명의 영화가 많단 말예요. 저는 그런 게 참 싫어요』
 
  ―「천년학」을 찍으면서 時流(시류)에 영합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신 겁니까.
 
  『영합이라기보다도 우리네 삶을 그대로 보여 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1950년대, 1960년대에는 얼마나 가난했어요. 지금 세대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것을 다 잊어버린 세대란 말예요. 「그 어려운 시절을 너희들 부모들이 살아왔던 거다. 그래도 하나도 원망하지 않았고, 만약에 恨(한)이 있다면 노래로 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한번 보여 주고 싶었던 거죠.
 
  흥행이 안 되더라도 林감독이나 나, 영화의 正道(정도)를 지켜야 할 사람들은 그래도 지켜야 한다고 봐요. 10년 후 다시 DVD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아, 그래도 그때 그 사람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부 오락이나 폭력 쪽의 영화를 찍으면 누가 영화의 正道를 지키겠습니까』
 
  ―「천년학」의 흥행 실패는 예상하셨습니까.
 
  그는 「서편제」를 예로 들며 흥행 실패를 단정짓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실패하리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서편제」가 단관에서 100만이 넘은 관객을 끌어들였잖아요? 예전에는 「처음에는 손님이 안 오더라도 영화가 좋다는 평가를 받으면 손님이 올 거다」 해서 극장에서 그 영화를 지켜 주었어요.
 
  「서편제」 때 3주까지는 손님이 안 들었어요. 한 4주째부터 손님이 들기 시작해서 6개월 동안 거의 전회 매진됐거든요. 지금 멀티플렉스가 된 후에는 그런 「지킴이」 극장이 없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극장에서는 아직도 「천년학」을 걸고 있는데 그걸 보면 고맙기도 하고 그래요』  
  
  『時流에 맞추고 싶지는 않다』
 
  ―영화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이 불일치하는 것은 왜일까요.
 
  『우리가 소설을 보면 베스트셀러 따로 있고, 명작이 따로 있듯이 그런 거 아닐까요. 베스트셀러는 시류에 맞고 어느정도 그 시대에 감각적으로 맞겠죠. 흥행이 되는 영화라고 해서 나쁘게 보지는 않아요. 시류에 맞게 감각적으로 제가 못 찍겠다는 것뿐이죠. 이를테면 오락영화인 「주유소 습격 사건」을 제가 찍었다면 소셜(social) 드라마로 변질이 됐을 것 같아요. 감독한테 「오락 쪽보다는 사회성 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나」 하고 권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이 옳다는 게 아니라 저는 제 생각에 맞는 작품을 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명작을 지향한다는 말씀입니까.
 
  『명작이라기보다 저에게는 그렇게 시류에 맞는 필링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죠』
 
  ―영화야말로 시류에 맞는 감각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필요하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어야 한다는 쪽에 서 있는 거죠. 「천년학」을 본 어떤 사람은 감각적으로 뒤지는 게 없다는 거예요. 다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지, 형식이니 이런 것들은 감각에서 뒤지지 않는다는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를 놓고 「국제영화제用이다」, 「비평가用이다」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왜 그런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까.
 
  『우리(林감독과 鄭감독)에게 「외국 영화제를 겨냥한 영화만 만드느냐」는 사람들이 있는데(웃음), 그런 거는 없어요. 저는 나이에 맞는 영화를 찍고 싶어요. 미국사람이 한국에 1년 살았다고 해서 한국 영화를 제대로 찍겠어요? 한국사람만큼 못 찍을 것 아니에요?
 
  요즘 폭력영화를 한국사람들이 아무리 잘 찍는다 해도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 같은 액션은 우리가 찍어낼 길이 없어요. 우선 물량으로 안 되고 돈으로도 안 돼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영화가 있을 거다, 하는 생각이 林감독이나 저나 있는 거죠』
    
  『한국 영화는 힘이 있다』
 
  ―국제영화계에서는 우리 영화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외국에 나가면, 한국 영화가 완성도는 거칠더라도 굉장히 힘이 있다고 해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멀리는 수천 번의 외침에서부터 잡초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 땅을 지켰고, 우리가 엄청난 고통을 받은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서 영화 하는 사람들도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항상 긴장해야 하니까요』
 
  ―영화를 만들 때 눈높이는 관객에 맞춥니까, 비평가에 맞춥니까.
 
  『텔레비전 같은 것을 보면 토론이 자주 있는데 영어 섞어 가면서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 싫거든요. 가장 편하고 알기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장 일을 잘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쉽게 영화를 만들어서 가장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이 절대명제예요. 쉽게 만들어도 될 영화가 있지만 쉽게 만들어서는 안 될 영화도 있거든요』
 
  ―쉽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영화는 어떤 게 있습니까.
 
  『우리의 1950년대, 1960년대를 찍는다면 배경 하나하나에다 간판의 글씨와 색깔까지, 전부 그 시대에 맞춰서 그 당시를 보여 주는 게 하나의 문화운동일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가령 「왕의 남자」를 볼 때는 소도구가 튀거든요. 중국 것을 갖다 놓고 그러잖아요. 우리는 그렇게는 못 찍죠』
 
  ―감독님이 촬영한 영화의 장면이 아름답다고들 말하는데 그 아름다운 장면이 영화의 스토리를 죽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스토리를 죽여서는 안 되죠. 하여튼 이 땅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면 괜찮은 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이 땅을 사랑하니까. 그렇다고 일부러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에요』
 
  ―거듭된 질문이지만 장면이 스토리를 압도해 버렸다는 말씀을 들은 적은 없습니까.
 
  『그런 소리를 듣기는 했죠. 하지만 아름다워도 괜찮을 때 아름답게 찍어야지 무조건 아름답게 찍는 것은 아니에요』
 
  ―관객들은 왜 감독님이 찍은 영화를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요.
 
  『저는 광선을 노려서 찍기 때문에, 만약 아름답게 보였다면 배경의 아름다움보다 광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한 것이죠. 실제 촬영 가서는 아름답게 찍으려고 애써 본 적이 없어요』
    
  시대를 색채로 표현하다

  鄭一成 감독은 영화 화면의 색채를 통해 그 시대를 표현한다. 「영화인으로서 저항의 한 수단」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당대가 암울한 시대이면 묵화에 가까운 무채색으로 표현한다. 영화 화면을 통해서만 아니라 행동으로 시대에 대한 저항을 보여 준 적이 있는데, 유신 시절의 長髮(장발)이 그 한 예다.
 
  ―유신 시절에는 머리를 묶고 다닐 정도로 길게 길렀다면서요. 시대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습니까.
 
  『저항이라기보다는 장발단속하는 게 싫더라고요. 그래서 길렀어요. 그렇다고 학생들처럼 거리에 나가 데모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제가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영화였어요. 저항은 모두 길거리로 나가는 게 아니라 학자는 학문에서, 예술인은 예술에서 자기 분야를 통해서 저항하는 게 맞다고 봐요.
 
  스페인 내란 때 피카소가 청색시대를 열었듯이, 피카소를 흉내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총천연색 필름을 찍더라도 묵화같이 암울하고 또 회색으로 그 톤을 일관되게 촬영했죠』
    
  全대통령 취임식 날 「만다라」 크랭크인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대표적인 작품이 「만다라」입니까.
 
  『「만다라」 외에 「안개마을」·「이어도」·「사람의 아들」이 그랬고, 「만추」도 그랬죠. 그런 무채색으로 일관되게 해왔던 시절이 있었죠. 「만다라」 크랭크인 하는 날이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었어요. 그 장면을 점심 먹다가 보면서 「만다라」를 무채색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죠. 군사정권이 연장되는 거였으니까』
 
  ―그런 색채를 통한 시대에 대한 저항이 지금 계속되고 있는 겁니까.
 
  『지금도 굉장히 좋은 시대라고 보지는 않아요. 이제는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됐고, 독재정권도 아니고, 군사정권도 아닙니다. 다만 컬러가 있다면 「코드 정권」이란 말예요. 그래도 이제는 색채나 소셜성의 드라마를 통해서 저항하는 시대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술 본연의 길에 들어서서 작품이 요구하는 색채로 가야죠. 작품이 요구하는 색채가 아닌 끊임없는 저항으로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는 지났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본분을 다 했다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자연의 색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영화 화면에서가 아니라 감독님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색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젊을 때는 중간색을 좋아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입는 옷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화려한 쪽으로 가고 있어요』
    
  「서편제」의 롱테이크가 나온 사연
 
  「서편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는 부분은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길을 가는 모습이다. 정지된 카메라가 주인공들의 동선을 비춰 주는 이 장면은 무려 5분40초간 이어지지만 전혀 지루함을 주지 않았다. 鄭一成이라는 이름 뒤에 항상 따라붙는 「롱테이크」라는 촬영 기법이다.
 
  ―롱테이크는 감독님 고유의 촬영기법입니까.
 
  『아니죠. 「서편제」 때는 林감독의 아이디어였어요. 웬만큼 자신 없이는 할 수 없는 기법이죠. 「서편제」는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사람이 움직였고, 「천년학」은 연기자는 움직이지 않고 카메라가 계속 움직이면서 롱테이크를 찍었다는 게 다르죠』
 
  ―촬영기법 향상을 위해 다른 영화를 참고하는 적이 있으십니까.
 
  『남의 영화는 잘 안 봐요. 남의 영화 중에서 좋은 장면들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아무리 오락영화라 하더라도 그게 머리에 입력이 돼요. 그러면 저도 모르게 창의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봐요. 책을 보면서 혼자서 상상하면서 장면을 생각하죠. 1년에 영화는 한두 편밖에 안 봅니다. 차라리 텔레비전 「동물의 세계」를 즐겨 봐요』
 
  ―별로 안 본다고 하지만, 그동안 본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습니까.
 
  『글쎄요. 장르마다 다른데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오락영화라도 열심히 찍은 게 보이면 감탄을 하죠』
 
  ―창의성을 이유로 남의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다른 분들도 그래야 한다고 보십니까.
 
  『영화를 배우는 학생들이나 사람들은 봐야죠. 초기에는 저도 많이 봤어요』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군요.
 
  『경지라고까지 하기는 그렇지만 연륜이 쌓이고 나서부터 「내 색채는 무엇일까」, 나의 개성, 나의 독창성 이런 것을 찾다 보면 남의 영화를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안 보는 경향이 있어요. 바빠서 못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어느 시기에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마흔이 넘어서부터. 1970년대부터 그랬어요』
   
  鄭一成·林權澤·李泰元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보셨습니까.
 
  『네, 봤어요. 열심히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하고요. 한편으로는 다른 영화들도 그와 버금가는 관객을 동원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영화들이 질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마케팅에 따라서 그렇게 안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국민들이 영화를 선택할 때 너무 마케팅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 취향에 맞고 또 좋은 영화라고 인정했을 때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봤으면 해요. 물론 1차적인 책임은 영화 만드는 사람에게 있죠』
 
  鄭一成 감독은 인터뷰 중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그가 말하는 「우리」의 대부분은 林權澤 감독과 자신을 하나로 묶은 「우리」였다.
 
  ―林감독과는 「만다라」가 첫 작품이었습니까.
 
  『아뇨, 그 전에 작품을 하나 함께 했어요. 그 이전에 林감독과는 천승세씨의 소설 「신궁」이라는 샤머니즘 영화를 함께 했어요. 林감독과 일하기 전에 유현목·김수영·김기영 감독, 그 외에 젊은 감독들하고도 일했지만 林감독하고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신궁」을 통해서 처음 손발을 맞춰 보았는데, 굉장히 잘 맞았어요.
 
  「만다라」 촬영 제의는 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소설가 김성동씨의 만다라를 하는데 정형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몸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한 거죠. 그것이 계기가 돼서 한 30여 년 동안 계속 함께 영화를 했지요』
 
  ―「만다라」 이후에는 林감독하고만 일을 한 겁니까.
 
  『아니죠. 틈틈이 다른 사람하고 일했죠. 장길수·배창호 감독하고도 일했고, 여타 젊은 감독들하고도 일했죠. 林감독과 근 30여 년 했는데, 감독과 촬영감독이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일한 것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林감독하고 일한 게 20여 편이 넘어요』
 
  鄭감독은 1936년생인 林감독보다 나이가 일곱 살 위다. 두 사람은 성장과정이 너무 다르다. 인텔리였던 부친과 가족들의 좌익활동으로 林감독은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鄭감독의 집안은 달랐다.
 
  鄭감독은 1929년 일본 東京에서 건설업을 하던 부친 鄭正錫(정정석)씨와 모친 문학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 문학자씨는 이화女大 문리대학장을 지낸 분이다. 鄭감독은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광복 후 서울大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옥마을에서 만난 鄭감독, 임권택 감독, 이태원 사장.
 
  눈빛만 봐도 잘 알아
 
  ―두 분은 자라온 배경이 너무 다른데요.
 
  『나는 林감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분의 가족사를 보면 레프트(좌익) 쪽의 가족사고, 어린 나이에 객지로 다니면서 영화계까지 흘러와서 이렇게 했거든요. 그 사람을 통해서, 소위 좌익을 했던 가족들의 고통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나는 (가정이) 굉장히 행복했는데, 그런 것들을 교환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발견한 거죠. 林감독은 참 겸손해요.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존경받을 만하죠』
 
  ―촬영 현장에서 두 분은 안 싸웁니까.
 
  『지금도 촬영 현장에서 감독하고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이 다퉈요. 우리는 다툼이 하나도 없거든요. 동시대를 살아왔고, 과거라는 역사를 어떤식으로 관조해야 할 것인지를 알아요. 현재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돼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고, 미래에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어요. 서로 눈빛만 봐도 잘 알기 때문에 저에게는 굉장히 고마운 분이죠』
 
  ―두 분이 성격차는 없습니까.
 
  『그 사람은 차분하고, 나도 거친 편은 아닌데 그 사람에 비해 좀 다혈질인 편이죠』
 
  鄭一成 감독의 「우리」에는 또 한 사람이 포함돼 있었는데, 「만다라」·「장군의 아들」·「서편제」의 제작자인 태흥영화사 李泰元(이태원·69) 사장이다.
 
  그런데 「천년학」에서는 李사장의 이름이 빠져 있다. 李사장의 태흥영화사가 투자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천년학」 제작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천년학」은 제작 무산의 위기에 처했었다.
 
  ―「천년학」 제작 중간에 李泰元 사장이 포기할 때는 아찔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세 명이 굉장히 친했는데, 누구 잘못으로 헤어진 게 아니에요. 투자사가 「유명한 배우를 써야만 투자한다」는 쪽이었으니까 그런 일이 생긴 거죠. 투자사와의 갈등 때문에 우리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죠. 지금도 가슴 아프고 그래요』
 
  ―李泰元 사장과는 자주 연락하십니까.
 
  『그럼요』
 
  鄭一成 감독과 영화의 만남은 대학 선배 때문에 이루어졌다. 대학 졸업 후 美 공보원에서 근무하던 중 대구로 출장 갔던 鄭감독은 그곳에서 대학 선배를 만났다. 공군 정훈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鄭寅曄(정인엽·84)씨를 만난 것이다. 鄭寅曄씨는 훗날 한때 10大 재벌에 들었던 강원산업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鄭감독은 鄭씨의 권유로 그가 軍 홍보용으로 만드는 「출격명령」 제작에 참여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전혀 예기치 않게 영화와 인연을 맺은 鄭감독은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원제 「지상의 비극」)로 영화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그때가 1957년으로 금년이 정확히 영화계 입문 50주년이 되는 해다. 반세기 동안 그가 촬영한 영화는 140여 편에 이른다.
 
  ―촬영감독으로 일해 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한 번도 쉽게 찍은 작품이 없어요. 저를 평생 지배하는 것은 「하기 싫었던」 작품들이에요. 다시는 하기 싫은 작품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과거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죠. 어쩌다가 텔레비전 같은 데서 제가 촬영한 흘러간 영화를 할 때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그런 것도 발견해요. 내가 왜 그것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지죠. 나를 지배한다는 것은 내 스승이라는 건데 한 20~30편이 그래요. 그것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제 상처예요. 상처가 내 스승처럼 저를 지배하고 있다는 거죠』
  
    4년 동안 영화 손 끊어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입니까.
 
  『뭐, 여러 가지가 있죠. 근래 영화가 아니고 1970년대 이전 영화이기 때문에 제목을 얘기하더라도 모르실 거예요』
 
  ―한동안 영화를 찍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면서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중국 아류의 영화들이 참 많았어요. 그런 영화들은 너무 저질스러워서 한 편도 안 찍었어요. 한 4년 동안 쉬었어요. 「굶어 죽더라도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건 제 마지막 자존심이더라고요
 
  그때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주었죠.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어느 날 일기를 보니까 「엄마가 돈이 없어서 집에서 쩔쩔 맨다. 아빠가 돈을 못 버신다」 그런 내용이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니까 이해를 하더군요』
 
  ―어떤 신념이 그런 영화를 안 찍게 한 겁니까.
 
  『중국영화를 싫어했어요. 지붕 위를 날아다니고, 빙 돌았다가 대나무 밭에서 죽이는 이런 게 현실감이 없잖아요. 죽을 때 「으악」 하고 죽는다고 해서 「으악새 영화」라고 했죠』
 
  지난 5월7일 두 번째 만남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날 입은 그의 빨간색 점퍼가 강렬했지만, 그의 시간을 도둑질하러 온 기자가 미안할 정도로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책상 위에는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등의 책이 추가돼 있었고, 지난번 만남 때 갖다 준 月刊朝鮮 3월호와 5월호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 역시 가지런했다. 반갑기까지 한 필름통 속의 담배꽁초도 역시 수북했다.
 
  인터뷰 중 세상과의 소통 기구인 그의 휴대폰으로 방송 출연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鄭一成 감독은 수화기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천년학」이 흥행도 저렇게 안 됐고 해서 지금은 무조건 쉬고 싶다. 이해해 달라』
 
  ―林權澤 감독도 「천년학」 흥행 결과가 좋지 않아서 많이 실망하고 계십니까.
 
  『말은 안 해도 아마… 우리가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니까. 과거에도 열심히 했지만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어요. 그러나 의외로 히트 치는 경우도 있었죠. 인생사와 흥행사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몰라요』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길게 꼬리를 물었다.
 
  ―자서전을 낼 계획은 없으십니까.
 
  『저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위대한 예수도 그렇고, 석가도 그렇고 자기 책 낸 일 없잖아요』
    
  『영화가 내 종교』
 
  ―종교는 있습니까.
 
  『제게는 영화가 종교죠. 제가 만약에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 신자라면 타 종교의 영화를 찍을 때 편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교가 상상력의 제한을 준다는 말씀입니까.
 
  『상상력의 제한이라기보다는 제가 불교 신자라면 기독교 영화를 불교만큼 정성들여 찍겠는가, 하는 자신이 없어지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영화가 저의 종교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되든 편애는 안 하죠』
 
  ―半(반)세기 동안 수많은 배우들을 앵글에 담아 왔는데, 지금까지 겪은 배우 중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가 누구였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얘기할 수 없죠. 못하는 연기자하고도 일해야 하고, 잘하는 연기자하고도 해야 하니까요. 인간적으로 안성기 같은 연기자는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자세가 돼있어요. 후배를 사랑하고 선배들을 깍듯이 모시죠.
 
  일류 배우가 그렇게 하기 쉽지 않거든요. 일류가 되면 교만해지고 자기만 위해 달라고 그러는데, 솔선수범해서 커피를 타다 주기도 해 우리는 감동을 받지요. 그런 연기자가 흔하지 않아요. 그런 연기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안성기씨를 이을 만한 배우 재목은 발견하셨습니까.
 
  『글쎄요, 요즘 젊은 배우들은 제가 잘 몰라요. 「천년학」을 찍으면서 조재현씨를 보니까 사람이 좋더군요. 자기가 텔레비전 드라마할 때 PD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다쳤대요. 그때 하반신 마비가 된 분을 제주도에서 촬영할 때 자기 돈으로 초청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현장까지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더군요.
 
  조재현씨가 배역 때문에 차갑고 나쁜 남자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어리더라도 존경스럽더군요. 제가 그 나이 때는 그렇게 못 했어요』
 
  ―「악바리」 근성으로 열심히 하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요즘은 열심히 안 하면 생존경쟁에서 탈락하니까 다 열심히 해요. 몸을 안 아끼고. 느슨하게 하는 배우는 없죠. 자기를 위해서 다 있는 거니까. 원래 천성적으로 재능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지만 노력하면 해결돼요』
 
  ―촬영 중에 연기 못하는 배우들을 보면 화가 많이 납니까.
 
  『화나죠. 젊을 때는 야단도 치고 그랬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백여우」가 돼요. 좀 못하더라도 「잘했는데 그것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더 해보자」고 하죠. 그렇게 흥을 갖추어 주는 거죠. 젊었을 때는 권위의식 때문에 막 야단치면 제일 좋은 걸로 알았었죠. 요즘 젊은 사람들이 현장에 가면 좀 그렇다고 하데요』
 
  ―배우들 중 자주 교류하는 분은 있습니까.
 
  『특별히 교류, 그런 것은 별로 없어요. 다 예쁘고 잘생겼고 좋아해요』
  
    요즘 배우들을 약해졌다
 
  ―半세기 이상 지켜본 영화 촬영현장에서 만난 옛날 배우들과 요즘 배우들의 차이점은 어떤 게 있습니까.
 
  『정신력은 옛날 배우들이 있었고, 요즘 배우들은 약해졌어요. 추운 것도 못 견디고 더운 것도 못 견디죠. 옛날에는 영화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버텼다면 요즘은 기술로서 재능으로 버티는 것 아닌가 싶어요』
 
  ―프로의식을 기준으로 하면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지금 배우들보다 과거 배우들이 프로의식이 더 강했죠. 요즘은 물질에 많이 따라가죠. 옛날에는 좋은 영화라고 하면 「나는 노 개런티라도 좋다. 이 영화에 같이 참여하고 싶다」고 했어요. 정신력이죠. 요즘은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얼마 주느냐를 따지잖아요』
 
  ―프로의식이라는 게 돈과 밀접한 것 아닙니까.
 
  『정신적인 측면과 금전적인 측면이 있는데, 정신적인 면에서는 옛날 배우들이 더 프로고,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요즘 배우들이 더 프로겠죠』
 
  鄭一成 감독은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77년 1월 「을화」를 찍으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鄭감독이 탄 지프차가 강원도 한계령을 넘다가 트럭에 받히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지프차는 도로에서 200여m를 굴러 골짜기에 떨어졌다. 탑승자 중 한 명은 사망하고 3명은 부상을 당했는데, 鄭감독의 외양은 멀쩡했다.
 
  鄭감독은 그 상태에서 겨울 바닷물 속에 서서 4시간이나 촬영을 강행했다. 그때 지프가 구르면서 상한 내장에 탈이 나서 쓰러졌다. 서울 백병원으로 후송돼 대장과 소장을 15cm, 위장을 3분의 1이나 잘라내는 大수술을 받았다.
 
  1980년에는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유현목 감독과 「사람의 아들」을 찍을 때였다. 직장암 수술을 집도한 백병원 의료진은 가족들에게 장례 준비를 권했다. 가족들은 장례 준비를 했지만, 다행히 직장에서 항문까지를 잘라 내고 인공 배변기를 부착하는 大수술 끝에 일어날 수 있었다. 몸무게는 75kg에서 42kg이 됐다.
 
  그런 半송장을 찾아와 영화를 함께 찍자고 한 사람이 林감독이다. 그때 함께 찍은 영화가 「만다라」다.
    
  『의욕적으로 덤빌 수 있는 작품 검토』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죽거나 다쳤는데 어떻게 외상이 없었습니까.
 
  『그 순간에도 눈은 다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몸을 구부렸던 것 같아요. 천운이었죠』
 
  ―지금도 신체 중에서 눈을 가장 아끼시나요.
 
  『네, 그렇죠. 눈으로 일해야 하니까』
 
  ―죽음의 고비를 넘긴 분이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시는 것 같습니다.
 
  『끊으라고 하지만 끊었다 피웠다 해요. 담배는 의학적으로는 나쁘겠죠. 그런데 제가 술을 못 하기 때문에 저한테는 담배가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역할을 주거든요. 그래서 담배와 커피가 나쁘다고 하지만 저는 커피는 하루 20잔, 일할 때는 50잔 정도 마셔요』
 
  ―술을 안 드시면서 영화현장에서 있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좀 특이하다고들 하죠. 내가 좀 모자라요(웃음). 술도 마시고, 술친구도 만들고, 잡담도 하고, 놀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 쪽에는 전혀 소질이 없어요. 노래도 못 하고요』
 
  ―노래방은 한 번도 안 갔습니까.
 
  『안 가봤어요. 한 번 가족들이 가자고 해서 따라가 봤는데 아는 노래도 별반 없고 따라 할 재능도 없고 해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있었어요』
 
  ―아는 노래가 한 곡도 없습니까.
 
  『1절 정도는 따라 하는데 2절, 3절부터는 못 따라 해요. 제가 음치에 곡치예요』
 
  鄭一成 감독은 올여름 지날 때까지는 책도 읽고 知人(지인)들도 만나면서 쉬고 싶다고 했다.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있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친 걸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몇 개의 시나리오가 들어와 있어요. 제가 의욕적으로 덤빌 수 있는 작품인지를 검토해야죠』
 
  『어떻게 하면 카메라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담아낼지 고민하면서 영화를 찍는다』는 그의 「사람 마음 찾기」는 이미 시작됐다.●  (월간조선 2007년 6월호)

입력 : 2007.06.19

조회 : 6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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