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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문화

[동행 인터뷰] 李明博 서울시장의 24時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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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년] 청계천 복원의 주인공 李明博 서울시장의 24時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성과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나의 戰略』  
   
 『청계 고가 건설에 참여했고, 청계천 헌책방에서 산 책으로 공부를 했다. 이번에는 고가를 뜯어 내고 청계천의 물길을 열었다. 청계천은 언제나 내게 기회이자 희망의 땅이었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세 개의 장면
 
<장면1>
 
  2002년 5월4일, 서울시장 후보들의 TV 토론회. 청계천 복원 사업을 공약으로 내건 한나라당 李明博(이명박) 후보에 대한 민주당 金民錫(김민석) 후보의 공격.
 
  『청계천 복원사업이 추진되면 서울은 「3대란」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도심의 차로가 줄어들어 공사 기간은 물론 공사 후에도 교통대란이 일어나고, 철거된 고가도로와 복개
 
출근길에 月刊朝鮮 金演光 편집장(왼쪽), 金成東(오른쪽) 차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李시장.
 
도로 폐기물을 실어 나르는 차량들로 쓰레기 대란이 일어나며, 수십만 명의 청계천 상인과 노점상이 생존권을 요구하며 반발하는 상인 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장면2>
 
  2003년 6월4일 청와대 국무회의. 李明博 서울시장을 상대로 7월1일 착공을 앞둔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한 국무위원들의 질의가 이어졌다. 당시 李滄東(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발언이다.
 
  『택시 기사들이 대부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게 곧 국민의 여론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해야 하겠습니까』
 
  <장면3>
 
  2005년 10월1일 저녁. 서울 청계천 광장. 盧武鉉(노무현) 대통령, 朴槿惠(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 政官界(정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서 李시장은 濬川詞(준천사)를 읽어 내려갔다.
 
  李시장이 200자 원고지 열 장 분량의 준천사를 끝내자 시민들은 큰 박수로 청계천 복원을 축하했다.
 
  1년 전 李시장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朴正熙 대통령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있다. 그분은 경부고속도로나 거대 공업단지처럼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남겼다. 사람은 눈으로 보면 가장 확실하게 설득당한다』
 
  지난 10월1~10일 열흘 동안 청계천 복원 현장을 찾은 사람은 301만5969명으로 집계됐다.
 
 
  『우리 국민의 저력이 대단하다』(택시 기사)
 
  서울 지역에 비가 내리던 지난 10월7일 기자는 택시를 타고 청계천변 청계6가 부근에 있는 평화시장으로 향했다. 다음 날 그곳에서 예정된 李明博 시장과의 길거리 인터뷰 코스를 미리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고향이 전북 전주라는 경력 15년의 택시 기사 정영진(45·강북구 미아 4동)씨는 『제가 보기에는 택시 승객 열 명이면 열 명 다 청계천 복원을 좋아한다』면서 『일하느라 가족들과 와보지 못했는데 오후 근무가 있는 다음 週 중에 애들을 데리고 나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청계천 복원 공사 착공 전 택시 기사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하던데요.
 
  『저도 처음에는 미친 짓이라고 했어요. 교통대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게 눈에 보였거든요. 이 지역을 통과하는 교통량이 얼마인데요. 그런데 신기하게 교통대란이 일어나지 않더군요.
 
  사전 홍보가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그래도 우리 국민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복원 사업 이전이나 이후나 흐름에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이 지역의 상인들 다음으로 택시 기사들의 반대가 심했죠. 그런데 이렇게 복원해 놓은 걸 보니까 참 좋습니다』
 
  ―청계천 방향 승객들을 많이 태우시나 보죠.
 
  『올 기회가 많아요. 그런데 청계 고가도로가 있던 시절 연상이 잘 안 돼요. 천지개벽에 가까운 변화죠.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거는 못 할 거예요. 李明博이니까 했지』
 
  ―복원 전과 비교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새벽 공기가 달라졌어요. 평화시장 앞은 새벽 손님이 많아서 새벽에 자주 이곳에 정차해서 손님을 기다리는데 복원 이전에는 하수구 냄새가 엄청났어요. 지금은 하수구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아요. 또 달라진 건 청계천이 수학여행이나 시골분들의 관광코스가 됐다는 거예요. 청계천 9가에 가면 학생들이나 시골분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있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청계천에 살던 그 많은 쥐들은 어디로 간 거죠』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청계천 산책로는 출입이 통제돼 있었다. 산책로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장소마다 시민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청계천 6가 부근 오간수교 위에서 청계천 물길을 구경하고 있던 주부 김선우(44·동작구 사당동)씨는 『평화시장에서 볼일도 보고 청계천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해서 왔는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산책로로 들어갈 수 없어서 아쉽다. 『그동안 지도자라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컸는데 오늘 여기 와서 보니까 사람에 대한 희망이 다시 생겼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기도
 
  다음날인 8일 오전 7시. 기자는 金演光(김연광) 月刊朝鮮 편집장과 함께 종로구 혜화동 소재 서울시장 공관을 찾아갔다.
 
  보통 밤 12시30분에 잠자리에 든다는 李明博 시장이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 4시45분이라고 한다.
 
  『수면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늘려보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이라서』
 
  李시장에게 어렸을 때부터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긴 것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어머니(채태원·작고)의 새벽기도와 가난 때문이었다고 한다. 李시장의 어머니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자식들을 전부 깨워놓고 새벽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李시장의 아버지(이충우·작고)는 광복 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우유를 짜고 목초를 베고 축사를 돌보는 목부 일을 했다. 광복 후 귀국하다가 대마도 부근에서 배가 침몰해 일본에서 모은 재산을 몽땅 날렸다. 당시 네 살이었던 李시장도 가족들과 함께 바다에 빠졌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고향(경북 영일군·現 포항시)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시작된 가난은 李시장이 성인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굶기를 밥먹듯이 한 건 고사하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 저는 이미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성냥개비에 황을 붙여 팔기도 했고, 군부대 철조망 밖에서 김밥과 밀가루떡을 팔다가 헌병에게 잡혀서 매도 맞아 봤어요. 중학교 때는 툭하면 등록금을 가져오라고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어머니는 포항중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李시장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가난한 집안의 희망인 둘째형 李相得(이상득·現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였다. 李의원 역시 당시 서울에서 고학을 하며 어렵게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어머니는 李시장의 고등학교 진학을 허락했다. 동지商高 야간이었는데 『등록금이 면제되는 기간만』이라는 조건이 붙은 허락이었다. 다행히 李시장은 3년 동안 주야간을 통틀어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李시장은 낮에는 뻥튀기 장사와 과일 리어카 행상으로 돈을 벌었다. 장사와 공부를 위해서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버드大에 개설된 청계천 강좌
   
  평소보다 늦게 깨죽, 달걀 프라이, 과일 두 쪽 등으로 차려진 간단한 아침을 먹고 李시장은 출근길에 나섰다. 李明博 시장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하철을 이용해 출근한다. 李시장이 시청으로 출근하기 위해 탑승하는 역은 지하철 4호선 혜화역이다.
 
  ―요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죠.
 
  『8, 9월에만 국내 언론 30여 회, 외국 언론 20여 회 정도 인터뷰를 했어요. 스위스 언론에도 청계천 관련 기사가 보도됐는데 그 기사를 보고 청계천 관광을 오신 분들도 있더라구요』
 
  ―미국의 센트럴파크와 청계천 복원 구간 중 어느 면적이 큽니까.
 
  『센트럴파크의 면적이 100만 평이 조금 넘으니까 청계천과 이어진 35만 평 규모의 서울숲을 빼고도 면적은 거의 같습니다』
 
  ―수치를 잘 기억하시는군요.
 
  『우린 다른 것은 몰라도 수치는 잘 기억해요. 일반 사물은 보는 입장에 따라서 설명이 다를 수 있지만 수학은 과학이니까 정확해야 해요. 특히 책임자가 말할 때는 더더욱 정확해야 합니다』
 
  수치 이야기가 나오자 전날인 7일 있었던 서울시에 대한 국정감사 때 벌어진 일이 화제가 됐다. 국감에서 서울시 실무자가 작성한 답변서에는 서울시 인구가 1100만 명으로 돼 있었다. 열린당 元惠榮(원혜영) 정책委 의장이 이를 문제 삼았다. 『왜 서울시 인구가 1028만 명인데 1100만 명이라고 하느냐. 이는 팽창주의고 크면 모든 것이 좋다는 舊시대적인 발상 아닌가. 李시장이 답변해 보라』고 했다. 李시장은 『나는 분명히 1000만 서울시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답변서에 1100만으로 돼 있더라구요. 수치가 틀리잖아요. 그래서 답변서를 읽으면서 저는 1000만 서울시민이라고 한 거죠. 국감에 참여한 다른 국회의원들은 다 들었어요』
 
  ―2003년에 개설된 하버드大 「청계천 강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까.
 
  『그럼요. 학점을 주기 위해서 우리 市의 관계자가 하버드大에 가야 해요』
 
  ―오늘(8일) 도쿄에서 열리는 제2회 세계도시하천복원 포럼에 청계천 복원 前現職(전현직) 실무자가 참석해 사례 발표를 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청계천 복원을 벤치마킹하려는 사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청계천을 벤치마킹해 일본 도쿄의 니혼바시(日本橋)와 몽골 울란바토르의 고가도로 철거사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청계천에 물길이 열리면서 주변의 대기 온도가 변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는데요.
 
  『3.6℃ 정도가 낮아졌다고 하는데 좀 더 두고 봐야죠. 서울 중심에 물길과 함께 바람길도 열리면서 여름에 발생하는 서울 도심의 열섬 현상은 없어질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는 도심의 물길이 시민들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심성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어깨만 부딪쳐도 인상을 쓰는 일이 많았는데 청계천 산책로에 몰려든 분들을 보면 서로 어깨를 부딪쳐도 즐겁게 웃으면서 걷는 걸 볼 수 있잖아요』
 
 
  『생각의 차이』
 
  청계천 복원 아이디어는 李明博 시장이 최초로 내놓은 것은 아니다. 과거 서울 시장 중에도 이를 언급한 이들이 있다. 실천을 했고 하지 않았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청계천 복원을 위해서는 22만 상인들과 1500여 명의 노점상들을 설득해 내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도심 한가운데서의 장기간 공사도 커다란 숙제였다. 전문가들은 공사 기간만 최소 5~6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청계천 복원 공사에 소요된 시간은 2년3개월이었다.
 
  ―전문가들조차 2년여의 공사 기간으로는 청계천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요.
 
  『생각의 차이죠. 간단해요. 공사 기간이 6년 걸린다고 하면 두 회사가 하면 3년, 세 회사가 하면 2년밖에 안 걸리잖아요. 아시다시피 청계천은 3개의 공사 구간으로 나눠서 각 구간별로 다른 건설사들이 공사를 벌였습니다. 도심에서의 공사는 빨리 끝내야 해요. 상인들이 2년이니까 참고 기다려 주지, 「5년 안에 안 될 거야, 7~8년은 걸릴 거야」 하면 누가 기다려 주겠어요?』
 
  李明博 시장의 발걸음은 빨랐다. 토요일이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李시장의 지하철을 이용한 출근 모습에 익숙한 듯했다.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 다다르자 李시장은 고가도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진행되는 불과 2년여의 짧은 시간에 시민들의 인식에 큰 변화가 왔어요. 제가 처음에 고가도로를 뜯으려고 할 때는 교통대란이 일어난다고 야단이더니 지금은 혜화동 로터리 고가도로에 「고가도로를 뜯어 달라」는 플래카드가 걸렸어요.
 
  여러 지자체에서 支川(지천)을 덮는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곳이 220곳이라고 그래요. 청계천 복원 사업을 본 시민들이 다시 뜯어 내라고 자치단체에 요구한 거죠. 옛날에는 육교를 놔달라는 민원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꾸로 육교를 뜯어내고 횡단보도를 설치해 달라는 민원이 많아요』
 
 
  지도자의 리더십이 나라를 바로 세운다
   
  ―지도자의 실천이 그래서 중요한 거군요.
 
  『그럼요.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여러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게 리더십이에요. 가정에서도 家長이 개판 치면 그 가정도 개판되는 거예요. 회사도 마찬가지예요. CEO가 누구냐가 그 기업의 흥망에 절대적입니다』
 
  ―그런 걸 보면 左派 정권 10년 동안 우리나라가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분배와 균형」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많이 기울어진 것 같습니다.
 
  『인식의 변화는 짧은 기간에 많이 일어날 수 있다니까요.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으로 많이 갔다고 봐요. 북한을 보는 눈도 지금 우리가 냉정한 판단력을 갖고 보는 게 아니라구요. 온정만 가지고 불우이웃돕기 하는 기분으로 보고 있어요. 불우이웃을 돕는 데는 조건이 필요 없잖아요. 그런 시각은 통일에 도움이 안 돼요』
 
  ―요즘 우리 사회에서 부자는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李明博 하면 연상되는 게 대기업인 현대건설의 회장이고, 그러다보니까 李시장을 「배부른 부르주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걸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제가 처음부터 재벌기업에 입사한 걸로 아는 사람들도 많아요. 제가 국회의원 시절 운동권 학생과 대담을 하는데 「왜 운동권 출신이 재벌회사에 입사했느냐」고 묻는 거예요(웃음)』
 
  李시장은 1965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현대 건설에 입사하실 때 직원이 몇 명이었습니까.
 
  『정규 사원이 90여 명인 아주 작은 중소기업이었죠. 나중에 16만8000여 명까지 됐어요. 현대건설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그 기업에서 35세에 CEO가 됐다는 결과만 보는 거죠. 그 과정에서 제가 겪은 시련과 눈물과 절망은 보지 않는 거예요.
 
  제가 입사 12년 만에 사장이 됐을 때 입사 동기 중 가장 빠른 사람이 과장이었어요. 이사·상무·전무는 물론이고 고참 과장, 부장까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는데 그것만 극복하는 데도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제가 그걸 극복하지 못했으면 저는 몇년 안에 사장 자리에서 쫓겨났을 겁니다』
 
 
  경부운하 건설은 청계천 복원보다 쉽다
 
  4호선 동대문역에서 1호선 쪽으로 가는 환승통로에서 李시장은 최단거리를 찾아 걸었다. 1호선 승강장에 내려섰을 때 李시장은 기자 일행을 전철 진행 방향 맨 뒤쪽으로 이끌었다.
 
  『시청으로 가는 가장 빠른 출구로 가려면 이쪽이 유리해요. 우리 사회 지도자층 가운데 저처럼 지하철 타는 거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웃음)』
 
  8일 아침 李시장과 함께 탄 지하철 1호선은 병점行이었는데 빈 자리가 많았다. 李시장은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나름대로의 지하철 이용 노하우를 공개했다.
 
  『인천行보다 병점行이 더 한가해요』
 
  전철 안에서의 화제는 경부운하 건설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경부운하 건설은 청계천 복원 기념행사를 앞두고 일부 언론에 李明博 시장의 大選(대선) 전략과 관련된 구상으로 보도됐지만, 李시장이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은 국회의원 시절이던 1996년 7월 對정부 질문을 통해서다. 大選 전략과 상관없이 국토개조를 위한 어젠다로 내놓은 것이다. 李시장의 당시 對정부 질문 요약이다.
 
  <한계에 달한 철도·도로 수송 능력으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LA 간 해상운송비보다 높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느냐. 지금도 교통체증으로 연간 13조원이 넘는 경제손실이 발생하고, 매년 2조원씩 늘어나고 있다. 경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고, 유지 보수비가 필요치 않다. 운하는 관광·레저 산업에도 이용될 뿐만 아니라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一石三鳥(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를 만들어놓고 말 것이다>
 
  月刊朝鮮 2003년 8월호와의 인터뷰에서도 李시장은 『경부운하 건설이 청계천 복원보다 쉬울 것』이라면서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경부운하 건설에는 청계천의 상인들처럼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이 없다』는 점을 꼽았었다.
 
  경부운하 건설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나온 여론조사 결과는 경부운하 건설에 대해 부정적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가 경부운하 건설 문제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등장한 직후인 지난 10월6일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부운하건설을 추진하지 말아야 한다」가 67.7%였고, 실현 가능성에서도 「가능성이 없다」는 응답이 62.3%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경부운하 건설이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걸까. 청계천 복원에서 보여 주었듯이 「이명박이 하면 된다」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 때문은 아닐까.
 
 
  李明博의 「한반도 개조 전략」의 일단
 
  ―실현 가능성과 환경보호 등 실효적인 측면에서 경부운하 건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결과죠. 청계천은 안 그랬습니까. 일반 국민들은 운하라고 하니까 육지를 그냥 파는 줄 알아요. 네덜란드 같은 나라처럼 인위적으로 강을 만드는 것을 생각하는데, 제가 얘기하는 것은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기존의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면 되는 겁니다.
 
  선진국은 강과 바다를 잘 이용하는 나라예요. 독일은 도나우江 운하를 뚫어서 화물을 싣고 다니는 바지선이 유람선보다 많아요. 중국은 5000km에 달하는 운하 건설 계획을 가지고 있고,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자꾸 강 바닥을 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5000t 규모의 바지선이 통과하는 데는 수심 3~4m면 돼요.
 
  그렇게 되면 경부고속도로에 10t 화물트럭 500대 분량의 물류가 단 한 번에 운하로 갈 수 있는 거예요. 하상 정리만 하면 되는 거죠. 그러면 수자원 보호도 되고 수질 보호도 되는 거고요. 광양만 제철소에서 생산된 제품이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온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인천 연안부두로 와서 한강을 통해서 서울로 오면 그 물류비용이 얼마나 절약되겠습니까』
 
 
  지도자는 끊임없이 비전과 희망 주어야
   
  ―시장님은 그 엄청난 공사를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하지만,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어려운 일을 간단명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정말 모르거나 아니면 아주 많은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해서 나름대로 결론을 얻어냈거나.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후자겠지요. 저는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합니다. 생각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조언도 듣습니다. 지도자는 국민에게 끊임없이 비전과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비전과 희망을 담은 지도자의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실천으로 옮기는 지도자의 모습은 국민을 즐겁게 합니다. 저는 청계천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경부운하 건설은 기업인이었을 때 생각했다가 국회의원이 된 후 국가적 어젠다로 제기한 겁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공직자들은 「안 된다」는 말부터 하는 특성이 있어요』
 
  ―규모가 규모인 만큼 공사비가 엄청나게 들어갈 것 같은데요.
 
  『모래 채취 등으로 공사비의 70~80%는 조달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경부운하가 건설된다면 국가경쟁력 提高(제고)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최소한 고속철도를 하나 만드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나을 겁니다. 기술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요즘의 우리 토목 기술로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문제는 아주 쉬워요』
 
  ―경인운하 건설은 사업중단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경인운하와 관련된 한강이나 임진강의 일부 수역이 북한이 관리하는 수역이잖아요. 그쪽을 통해서 화물선 등을 다닐 수 있게 하면 쉬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지금 당장은 북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의 땅을 파고 뚫어서 운하를 건설하려는 데 문제가 있어요. 비용도 많이 들뿐더러 親환경적이 아니죠. 남북이 진정으로 화해가 되고 그러면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일이죠. 경부운하와는 그런 점에서 달라요. 어떤 일이든 일을 시작할 때는 사전에 철저한 구상이 있어야 해요. 철저한 구상이 없으면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거죠』
 
  ―항간에는 시장께서 大選에 나가게 되면 서울시의 교통체계를 개편한 것처럼 전국의 교통망을 일원화하는 공약을 내세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서울 시장으로서 저는 대권 도전이니 하는 식의 표현을 한 적이 없어요. 다만 교통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서울시가 지하철과 버스를 연결시켰듯이 전국적으로도 이제는 철도와 버스를 네트워킹시켜야 할 시기가 됐다고 봅니다』
 
  오전 8시40분. 평소보다 늦은 탓인지 서울시장실에 도착했을 때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시장 비서실에는 서울시 간부들이 가득했다. 서울시 정책회의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李시장이 비서실을 가득 메운 서울 시청 간부들을 둘러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삶의 질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토요일에도 쉬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토요일에 쉬는 만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 서울 시청도 국장급 직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토요일에 쉬고 있어요. 간부들도 쉬게 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李明博 시장은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서울시 간부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기자는 그날 시장의 격려와 서릿발 같은 질책이 공존한다는 서울시 고위 간부들의 정책회의를 참관할 수는 없었다.
 
  같은 날 오전 11시, 서울시 산하 「서울외국인종합지원센터」 1층. 통유리로 돼 있어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안을 훤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그곳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안녕하세요! 이명박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서울시민들의 민원이나 제언을 시장과 담당 공무원 그리고 민원인들이 함께 참여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날의 민원인들은 용산구에 거주하는 시민들이었고, 그들의 민원은 철도 시설과 관련해 1977년에 녹지 시설로 지정된 지역을 해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해제 불가라는 담당 공무원과 민원인들의 설전이 오고 간 다음에 李시장이 중재에 나섰다.
 
  李시장이 민원인들의 『재산권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 주장에 대해 『제가 보기에 솔직히 민원인들이 원하는 것은 보상인 것 같다』고 말하자 민원인들로부터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
 
  민원인들은 결국 10월30일까지 어떤 해결 방법이 있는지를 찾아보겠다는 李시장의 약속을 믿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날 오후로 예정됐던 李시장과의 청계천변에서의 인터뷰는 13일 오후로 연기됐다.
 
 
  청계천 헌책방의 추억
 
  10월13일 오후 기자는 약속대로 청계천 6가 부근 헌책방이 밀집해 있던 오간수교 부근으로 갔다. 기자가 그곳에서 李明博 시장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청계천 헌책방과 李시장의 인연 때문이었다.
 
  동지商高 졸업을 앞둔 1959년 12월 李시장은 동생과 함께 서울行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들은 그 수개월 전 둘째 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놓고 노점상을 하고 있었다. 이듬해 2월 졸업식에서 전체 수석에게 주어지는 재단이사장상을 받게 돼 있었지만 李시장은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올 때 李시장은 이미 포항으로 갈 차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울로 왔지만 환경이 변한 것은 없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포항에서는 달동네에서 살았고 서울에서는 판자촌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문득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중학교 졸업장보다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사회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자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대학 시험을 치러보기로 결심했다. 합격만 하면 입학금을 안 내도 대학 중퇴자가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태원 시장에서 번 일당을 모아 만든 1만환을 갖고 찾은 곳이 청계천 헌책방이다. 문과와 이과조차 구분 못 했던 李시장은 헌책방 주인의 도움을 받아 대학 입시 참고서를 고를 수 있었다. 문제는 책값이 3만환이라는 것이었다. 李시장은 사실대로 실토했다. 헌책방 주인은 기가 막힌 듯 말했다.
 
  『있는 돈만 주고 가져 가. 나머지는 나중에 와서 갚아. 내 마음 변하기 전에 빨 리가, 이 촌놈아』
 
  헌책방 주인의 마음이 변할까 봐 조바심을 치며 달음박질치다가 『이쯤이면 됐겠지』 하며 멈춘 곳이 李시장이 출근할 때마다 지나치는 혜화동 로터리였다고 한다.
 
  李시장은 그 책으로 공부해 고려大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청계천 헌책방에 대한 남다른 향수 때문이었을까. 李明博 시장은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평화시장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책방들을 돌아보며 李시장이 말했다.
 
  『그때 그 헌책방 주인이 살아계시다면 70~80세쯤 됐을 텐데 찾을 수 없네요. 아직 책값을 못 갚았는데…』
 
 
  대중스타 李明博
   
  주변 상황은 李시장을 가난했던 날들의 추억 속에 오래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일임에도 청계천 물길을 보러왔다가 李시장을 본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그곳에서 서울시장 李明博이 아닌 「대중 스타 李明博」을 봤다.
 
  청소년들의 휴대폰 카메라 세례와 기념 촬영 요구, 아들에게 주겠다며 책에 사인해 달라는 요구 등 그는 스타였다. 심지어 李시장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한 버스 기사는 운행을 멈춘 후 앞문을 열고 李시장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그들에게 청계천과 李明博은 동의어였다.
 
  결국 우리는 청계천 산책로를 걷기로 한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산책로에 들어갔다가는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대문 이스턴 호텔 뒤 감자탕 골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상가를 건너야 했다. 李시장이 빠져나오는 데는 30분 이상 소요됐다. 헌책방 부근에서도 그랬지만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가장 많이 들려온 소리는 『李시장님, 고맙습니다』였다. 청계천을 복원해 주어서 고맙다는 뜻이었다.
 
  감자탕 골목을 지나던 李시장은 갑자기 감자탕집에 들어가자는 제의를 했다. 그런 곳에서 한 번도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면서. 李시장은 대학 시절 이태원 시장에서 요즘 말로 환경미화원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저는 동대문 시장이나 이런 쪽에 오면 고향에 온 기분이 들어요.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요 부근에 인력시장이 있었어요. 자꾸 그때 생각이 나네…』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까 시장님은 시민들에게 정치인이 아니라 대중 스타로 비쳐지는 것 같습니다.
 
  『이곳 상인들이 「장사가 안 되고 힘들다」고 하니까 여기에는 정치인들이 안 와요. 짜증을 받아야 하고 상인들도 싫어하니까. 저는 정치인으로 안 보는 것 같아요(웃음)』
 
  李明博 시장은 이날 오전 중견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토론회에 초청연사로 참석했다. 토론회가 끝난 후 李시장의 관훈 토론회와 관련 각 언론 인터넷 판에 나온 제목은 李시장의 대통령 후보 경선 승복과 관련된 것이었다. 李시장은 그런 질문이 나온 자체가 불만인 것 같았다.
 
  『「경선에 승복하겠다」는 게 기사의 제목이 됩니까. 그 자리에서도 제가 그런 상식적인 질문을 왜 하느냐고 했어요. 그건 상식이죠. 그리고 제가 大選 출마를 선언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잖아요』
 
 
  法은 살아 있는 한 지켜야 한다
 
  ―감자탕집에서 편안한 이야기만 나누는 것도 좋지만 사회현안을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동국大 강정구 교수의 「6·25는 통일전쟁이었다」는 등의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실정법을 어겼으니까 처벌해야 한다」, 「학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등의 의견으로 우리 사회가 갈려 있습니다.
 
  『한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은 법이 제대로 집행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요. 사람에 따라서 法의 형평성이 어긋나게 적용되면 안 되죠.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죠. 法이 살아 있는 한은 그걸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공무원이 10만원 정도의 돈을 받았다고 해도 法에 처벌하도록 돼 있으면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북한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북한의 이념을 따라갈 수는 없어요. 체제 경쟁에서 승자는 이미 나 있는 것 아닙니까』
 
  ―정부가 「용산 미군기지를 정부 주도 下에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서울시가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이미 해오지 않았습니까.
 
  『한마디로 재미난 이야기죠. 용산기지는 애초 우리 서울시가 민족공원으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정부는 뭐라고 했습니까, 일부를 용도변경해서 기지 이전 비용을 마련한다는 입장이었잖아요. 속이 다 보여요. 안타깝습니다』
 
  ―8·31 부동산 대책 발표 후 정부가 수도권에 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송파신도시를 조성하고, 김포 신도시는 기존 계획보다 두 배로 조성한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수도권 집중을 분산한다는 이유로 행정중심 복합도시를 충청도에 조성한다는 정부의 기존 방침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까.
 
  『행정도시, 신도시 다 안 하려나 보죠. 양쪽에서 다 인심을 얻으려고 정치적인 결정을 하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기는 거죠』
 
  ―청계천 고가를 건설할 때 혹시 참여하셨습니까.
 
  『제가 현대 건설에 있을 때 청계천 복개와 삼일고가도로 건설에 참여했죠. 그때 저는 중역이었죠. 저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산 책으로 공부를 했고, 당시 개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고가도로 건설에도 참여했어요. 이번에는 고가를 뜯어 내고 청계천의 물길을 열었죠. 청계천은 언제나 제게 기회이자 희망의 땅이었어요』
 
 
  정확한 언어
 
  ―청계천과의 인연이 상당하네요.
 
  『그래서 제 호를 「청계」로 할까, 하는 문제를 생각 중입니다』
 
  李시장의 『호를 청계로 삼을까, 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몇 차례 인터뷰를 한 경험이 있지만 李明博 시장의 화법은 직설적이면서 정확하다. 거의 에두르지 않는다. CEO 경험 때문인 것 같다. CEO나 군인에게 정확한 지시는 생명이다. 기업의 존망과 부하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깊은 사고와 사색의 시간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게 그들의 언어다. 신속한 판단력 역시 생활하면서 그때까지 쌓아온 사고와 사색의 반영이다.
 
  정확한 지시의 출발은 언어다. 정확히 말해 언어를 통한 의사 전달 능력이다. 그 점에서 李시장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CEO라는 느낌을 준다. 한 마디로 그의 언어는 의뭉스럽지 않다. 직설적이다. 다른 정치인의 말과 달리 그의 말에는 해석이 필요없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아껴주는 셈이다.
 
  수많은 인터뷰에서 李시장이 대권 도전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가 대권 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대권 도전에 대해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는다. 솔직함과 경박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李시장은 솔직해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그는 내년 6월 말까지 서울 시장이다.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서울 시장으로서의 책무다. 그는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기자는 李시장과의 동행 취재를 마치고 다시 청계천변으로 갔다. 조명을 받고 있는 청계천 물길은 낮에 본 그것과 또 달랐다. 물길은 달랐지만 산책로를 거니는 시민들의 모습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이 청계천과 함께 기억할 이름은 누구일까. 청계천의 물은 계속 흐르고 있다.● 
(월간조선 2005년 11월호)
 
▣ 李明博의 모든 것
2002년 7월1일 제32代 서울특별시장 취임

[본인·가족]
본관 : 경주
생년월일 : 1941년 12월19일
출생지 : 경북 영일군(現 포항시)
현주소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27-1 (서울시장 공관)
체격 : 키 175cm, 체중 70kg
혈액형 : B형
병역 : 면제(논산훈련소 자진 입소 후 질병으로 퇴소)
부모 : 父-이충우(작고), 母-채태원(작고)
배우자 : 金潤玉(김윤옥·1947년생)
자녀 : 이주연(1971년생), 이승연(1973년생), 이수연(1975년생), 이시형(1978년생)
재산 : 175억원

[학력]
1960년 : 동지商高(야간) 졸업
1965년 : 고려大 상과대 경영학과 졸업
1995년 : 고려大 언론대학원 수료
1996년 : 연세大 언론홍보대학원 수료
1998년 : 한국체육大 명예이학박사
1999년 : 美 조지 워싱턴大 Fellow Scholarship
2004년 : 서강大 명예경영학박사

[종교·취미]
종교 : 기독교
아호 : 一松 (일송)
취미 : 음악감상
운동 : 테니스, 수영
주량 : 맥주 1병
담배 : 非흡연
기호음식 : 삼겹살
스스로 평가하는 자신의 성격 : 치밀한 편
좌우명 :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애창곡 : 유심초 「사랑이여」, 양희은 「아침이슬」
존경하는 인물 : 도산 안창호, 잭 웰치
외국어 구사능력 : 영어

[저서·수상]
저서 및 논문 : 「6ㆍ3 학생운동사」(1994), 자전적 에세이 「신화는 없다」(1995), 에세이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
수상 경력 : 1979년 대통령표창(모범기업인), 1982년 체육훈장백마장, 1983년 우수 경영인상(고려大 기업경영연구소), 1984년 국민훈장 석류상, 1985년 금탑산업훈장, 1986년 체육훈장거상장, 1987년 현정 국토개발상(대한국토개발학회). 1998년 「대한민국 50년의 50대 인물」에 선정(조선일보), 1999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大 기업인」에 선정(매일경제). 

입력 : 2007.06.13

조회 : 4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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