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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12월에 만나는 첫눈, 지난 여름, 산사(山寺), 구름, 고요, 샛강, 별...

시인 이구락·정유준·이채민·한인준의 시집 몰아서 읽기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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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일보 이철원 기자

이구락 시인의 시는 맑다. 시를 읽노라면 단아한 한국화 속에 서 있는 듯하다. 그의 시는 시로 옮긴 견자(見者)의 풍경화라고 할까그 풍경에는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근원이 숨어 있다. 근원은 세속적이지도 지나치게 이념적이지도 않다. 현실적인 삶의 터전 그 밑바닥이다. 등잔밑이 어두운 법이다. 아무나 ‘밑바닥’을 볼 수는 없다. 시인이라야, 그만이, 삶의 근원을 시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첫눈
 
-이구락
 
산으로 올라간 길은 하늘로 들어가고
 
구름 대문 열고 하늘로 들어가고
 
뒤따라 가던 길 하나 머뭇거리다 계곡으로 숨어든다
 
이윽고, 오래 잊혀진 기별인 양
 
하늘에서 첫눈이 내려왔다
 
시 '그렁그렁 울다'도 구도자의 풍모가 느껴진다. 굳이 아미타경 독송을 읊을 수 있어야 구도자가 되는 건 아니다. 무거운 현실 속에서 대상의 본질을 자신만의 색깔로 그려낼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구도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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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집 《빛의 뿌리》, 《시문학》 2017년 4월호, 《꽃댕강나무》, 《아름다운 그런데》.

그렁그렁 울다
 
-이구락
 
수도암 봉황루 무념지에 앉아
방문 활짝 열고 한나절 넋 놓고 앉아
가파른 54계단 위 대적광전 지붕이 비에 젖어
슬픔의 색깔로 고요히 낡아 가는 걸 본다
지붕 위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여름 숲이
아미타경 독송하며 안개 속에서
하얗게 녹아내리는 것도 본다
사시예불 드리러 돌계단 오리는 이
우산 쓴 뒷모습도 낡고 쓸쓸한 배경으로 걸린다
봉황루 추녀 끝 낙숫물 소리가
부처님 연화보좌처럼 깔리고
관음전 청동기와 파랗게 살아난다
이 영험한 청정도량에 와 앉아
깊은 적막의 오래된 먼지 냄새만 맡는다
스님들은 하안거에 들어 묵언 수행 중인데
나는 지금 걸려 오는 전화 다 받아 주고
문자 메시지에도 일일이 답을 한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와 앉아야 하거늘
책읽기와 글쓰기를 위해 찾아든 내 짓거리가
이 여름비에 씻겨 말갛게 낡아지기를,
가파른 돌계단 위 하늘에 걸린
저 대적광전 현판만큼 낡아지기를,
무념지에 편안히 앉아 합장하며 빌어 본다
낙숫물 소리 들으며 풍경이 그러려무나 그러려무나
하고, 그렁그렁 운다
(201711월 펴낸 시집 꽃댕강나무중에서)
 
정유준 시인의 '정수사의 고요'도 느낌이, 행간이 있는 시다.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여백을 마음속에 채울 수 있게 한다. 마치 여백의 한국화를 시로 읽는 듯하다.
 
정수사의 고요
 
-정유준
 
눈밭을 걷는다
사방은 고요하다
마니산 숨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도 소리를 삼키고
계곡을 달려와
숲을 끌어안는다
 
고요에 싸여 마음은
아득한 바다에 다다른다
마음이 고요를 지킨다
목어 눈에 눈물이 맺힌다
고요가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잠들었던 풍경이 큰 소리를 낸다
소리가 절집 대숲으로 몰려간다
멈추었던 눈송이 흩날리며
하얗게 내려앉는다
 
저녁 예불 소리가 머리에 쏟아진다
고요는 잠을 털고 산 아래로 달려간다
(시문학20174월호에서)
 
이채민 시인의 마흔아홉은 선물은 아름다운 시다. 쉰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다. 지천명을 앞둔 마지막 진통이라고 할까. 1970년에 태어난 수많은 개띠들이 2018년에 마흔아홉을 맞는다. 아홉수에 겪을 축복을 축하(?)하는 시다.
 
마흔아홉은 선물
 
-이채민
 
노을이 온통 내 것으로 안겨왔다.
심장 박동이 너무 커 바닥에 누을 수가 없었다 달이 풀어놓은 치맛자락에서 우우우 만월의 울음이 들렸는데 심상찮은 달 울음소리와 심장의 박동 소리가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젖내 풍기는 초승달이었으므로 자주 눈에 핏줄이 터지고 사랑니가 흔들렸다.
 
꽃비 징하게 내린 밤, 환부에서 샘솟는 눈물로 작은 샛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생일 촛불 밑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노란 유서도 썼다.
아침이 되면 씨알 없는 글자들이 샛강에서 맑은 종소리로 딩동, 거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을까*
(* 도종환 시인의 시 인용.)
(201610월 펴낸 시집 빛의 뿌리에서)
 
젊은 시인 한인준 시는 독특하다. 그러나 묵직하다. 시 '종언'은 버릴 게 없는 시다. 여백이 아름답다. 말 줄임표를 느끼게 한다.
 
종언
하늘 위에 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인준
 
천천히를 생각합니다
천천히만을
 
물결과 구름은 조금 맞는 것이고
 
조금을 생각합니다
조금만을
 
손가락이 까딱만큼 미묘해지는 일에 대해
 
모래알을 쥐어도 새어나가는 멀고 먼에 대해
 
나는 갑자기의 옆으로 갈 것입니다. 오자마자와
이대로일 때까지
 
꿈속에서 당신이 아닌 당신의 꿈속을 만나
 
아무도를 생각합니다
아무도만을
 
숲과 속을 나누어 생각하려고 숲속에 들어가는 한 남자에 대해
 
부질과 없음에 대해
 
제발과 부탁을 더해버리지 않는 방법에 대해
 
이런 적이 별로 없었을까요
이런 적은 별로 때문에 없었을까요
 
책도 없이 침대에 누워를 가만히
읽어보는 것입니다
 
저 투명과 저 의자와 저 구부러진 다리에 대해서만
각각에 대해서만
 
바람과 불 것입니다
 
불어오지 않는 바람도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힘에 대해
 
꿈속에서 당신이 아닌 당신의 꿈속을 만나
 
(20174월에 펴낸 아름다운 그런데중에서)

입력 : 2017.12.25

조회 : 3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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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Stand Up Daddy’

kimchi@chosun.com
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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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ucoyt (2017-12-25)   

    월간조선에서 시를 읽어 보다니 ..새롭군요.
    하늘위에 별이 있지 않으면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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