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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李相勳씨의 인생유전 - 한국과 일본의 폭력 조직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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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勳씨의 인생유전 - 한국과 일본의 폭력 조직 
  
영등포 최대 폭력조직 두목에서 세계평화상 수상까지  
   
 「큰아버지」 시라소니로부터 싸움 배워… 20代에 영등포 폭력세계 장악

●공수부대 장교 全斗煥과 호형호제하다가 全斗煥 정부에 의해 수배
●1981년 구속돼 재판 중 상대방 보스 살해 위해 부하 2명과 법정 탈출
●1993년 크리스마스 특사 석방 후 폭력세계와 절연
●2007년 이승만, 레이건 등에게 수여된 세계평화상 수상 
  

(출처: 월간조선 2008년 4월호)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큰아버지」 시라소니
 
 
 서울 용산구 해방촌. 한때 해방촌은 6·25를 前後(전후)해 북한을 탈출한 피란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이다. 1960년대 초 어느 날 해방촌 느티나무 공터, 몸이 날렵해 보이는 40代 후반의 남자와 초등학생인 소년이 마주 서 있었다.
 
  『힘이 센 아이래 너의 멱살을 쥐면 흔들흔들 끌려가라우. 그러다 냅다 온발에 힘을 주고 개구리처럼 바짝 튀어오르면서 이마로 면상을 받으라우. 만약에 면상이 받치지 않으면 재차 무릎에 힘을 주고 상대방에게 달라붙으면서 내질르라우』
 
  짙은 평안도 억양의 이 40代 사나이는 주먹 세계에서 지금도 「대한민국 싸움꾼 1등」으로 회자되는 시라소니(본명 이성순)였다. 신의주 출신의 시라소니는 열세 살에 싸움판에 뛰어들어, 스무 살에는 당대 북한 지역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평양까지 원정 가서 싸움판에서 눕히고 이북 최고의 주먹이 되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의 주먹들을 때려 뉘이며 당대 최고의 주먹 자리에 등극했다. 북한에서 월남한 후 한동안 주먹계에 머물렀다. 그러나 종교계에 귀의한 후 1983년 1월 67세로 사망할 때까지 전도생활에 전념하며 주먹세계와 절연하고 살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시라소니의 말을 듣고 있던 소년은 1950년 갓 태어나자마자 평양이 고향인 부모님의 등에 업혀 피란 내려온 李相勳(이상훈)군이었다. 李군의 아버지 이종률(1994년 작고)씨와 시라소니는 의형제로, 李군은 어려서부터 시라소니를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이화룡, 정팔, 신상현…
  
광복 전후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의 주먹세계를 주름잡았던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사진 왼쪽). 이상훈씨는 그와 한집에서 살며 그를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시라소니 가족과 李군의 가족은 해방촌에서 한집에 살았다. 그 집에는 당대 주먹계를 주름잡으며 명동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화룡, 중앙극장을 무대로 활동했던 정팔, 훗날 이화룡의 후계자가 돼 한국 암흑가의 보스로 30여 년을 군림한 「신상사파」의 신상현 등이 자주 모여 시라소니와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시라소니는 李군에게 신상현을 「숙부」로 부르게 했다.
 
  李군은 전날 자신보다 네 살 아래인 시라소니의 아들 의현군과 함께 해방촌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하던 쌍둥이 형제에게 얻어맞았다. 이날 동생 의현이 맞고 들어오자 앙갚음을 위해 찾아가 시비를 걸었지만 서너 살 위인 쌍둥이 형제에게 역부족이었다.
 
  시라소니가 李군을 불렀다.
 
  『상훈이 너는 내 말을 잘 들으라우. 싸움은 하지 말라우. 하지만 나쁜 놈들이 싸움을 걸 때가 있으니 그때는 지면 안 되는 기야. 나쁜 놈들, 비겁한 놈들한테 져서는 안 되는 거야, 알간?』
 
  『예, 큰아버지』
 
  『니 아바이와 나는 20년 전 의형제를 맺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서로를 배신한 적이 없어. 지금도 누군가 니 아바이를 괴롭히면 큰아바이가 가만 안 놔둘 거라우. 사나이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기야. 내 말 알아듣간?』
 
  『예, 큰아버지』
 
  『낼부터 너는 큰아버지한테 남에게 맞지 않는 기술을 배우라우. 저녁 먹고 느티나무 공터로 나오라우』
 
  남에게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 시작된 쌈박질 수업은 훗날 李군을 영등포 최대의 폭력조직 「대호파」 두목으로, 「사시미칼」의 원조로, 국내 초유의 법정 탈주범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는 1993년 12월25일 특별 가석방으로 풀려날 때까지 13년 6개월간의 감옥생활이었다. 감옥생활 중에는 교도관 폭행, 교도관을 인질로 삼은 인질난동사건 등으로 13년이란 시간을 독방에서 생활해야 했다.
 
  출소 후, 감옥에서 보낸 시간만큼인 13년 3개월여의 시간이 지난 2007년 3월27일 오후 2시, 그는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 있었다. 세계평화상 시상위원회(위원장 레스터 울프·前 美하원 8선 의원)가 시상하는 「세계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서였다.
 
  이 상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기념해 1989년에 창설된 세계평화봉사단이 주는 상으로, 로널드 레이건 前 미국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인도 간디 총리 등이 수상했다. 한국인으로는 李承晩(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이 상에 추서됐다.
 
  이날 프레스센터 시상대에 선 李相勳씨의 직함은 「남북 사랑의빵 나누기운동본부」 상임대표. 이 단체는 북한의 어린이와 결핵환자 돕기운동을 펼쳐오고 있다. 지난 2월17에는 이탈리아의 포스투미아 재단이 시상하는 「2007년 세계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 이유 역시 북한의 320만 어린이들을 위해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 세계 평화에 기여한 점이 꼽혔다.
 
  李相勳씨는 「큰아버지」 시라소니 처럼 종교에 귀의해 교회의 장로가 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노점상·가발업·보석사업을 거치며 사업가의 길을 걷는 동시에 사회보호법 폐지운동, 삼청교육대 출신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운동에 앞장서는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07년 6월에는 민주화명예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결정되었다. 북한 어린이와 결핵환자들을 돕는 일도 인권운동 차원의 일이다.
 
 
  파란 많은 인생
 
  무엇이 인간 李相勳의 삶을 이처럼 180도 바꿔 놓은 것일까. 그의 증언을 통해 파란 많았던 그의 인생길을 더듬어 본다.
 
  1950년 부산으로 피란 온 李相勳씨 가족은 李씨가 여섯 살일 때 서울 해방촌으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과 李씨 위로 형이 있었고, 여동생 3명이 있었다. 李씨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방첩대장을 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해방촌에서 민주당의 유세가 있었다. 지구당 위원장이었던 李씨의 아버지도 현장에 있었다. 자유당에서 동원한 깡패들의 난동이 시작됐다. 유세장은 난장판으로 변했고, 李씨의 아버지는 깡패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고 쓰러졌다. 어린 李相勳군은 단상으로 올라가 대항하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혼비백산 도망가는 청중들에게 떠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 청중 속에 있던 시라소니의 몸이 단상 위로 날았다. 자유당이 동원했던 깡패들은 시라소니의 주먹 앞에서 일순간에 제압됐다. 의형제를 맺은 李씨의 부친이 깡패들에게 맞고 쓰러지자 시라소니가 나섰던 것이다. 李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시라소니의 싸움이었다.
 
  李씨는 『그때 시라소니 큰아버지의 빠른 몸놀림과 순식간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주먹이 영상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젊은 시절의 나를 지배했다』고 했다.
 
  시라소니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시라소니의 주먹과 李相勳씨의 주먹은 다른 길을 간다. 시라소니가 의형제와의 의리 때문에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면, 李씨는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아 1975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 유세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협객」과 「건달」의 차이라고 할까.
 
  이마로 받기, 무릎치기, 관절차기, 돌려차기 등 시라소니에게서 「싸움의 기술」을 제대로 전수한 李씨의 주먹은 해방촌 주변을 쉽게 석권했다. 李씨의 주먹이 본격적으로 암흑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시기는 해방촌이 철거되면서 가족들이 영등포구 목동으로 이주한 1960년대 말이다.
 
 
  영등포 주먹
  

  당시 목동에는 창신동·청량리·해방촌 등에서 쫓겨난 서울의 철거민들이 집결해 살고 있었다. 마을의 분위기는 거칠었고, 거칠어야 살 수 있었다. 李相勳은 퇴학을 반복하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의 주먹은 영등포 유흥가의 「어깨」들을 하나씩 무너뜨려 갔다. 당시 영등포에는 소매치기가 많았다. 소매치기 대부분은 얼굴이 매끈하게 잘생겼고 돈이 많았다. 하루는 영등포 시장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데 소매치기 일당이 눈에 띄었다.
 
  소매치기 일당과 시비가 붙었다. 면도칼을 휘두르는 영등포 지역 소매치기 「오야붕」(두목)과 한판 붙었다. 가볍게 때려눕혔다. 그날부터 李씨는 영등포 소매치기들의 「오야붕」이 됐다. 막 스무 살이 되던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李씨는 영등포 암흑가에 본격적으로 명함을 내밀기 시작했다. 소매치기들은 용돈으로 쓰라며 하루에 5만∼10만원을 李씨에게 바쳤다. 당시 공무원들의 월급이 2만원을 넘기지 못할 때였다고 한다.
 
  영등포 암흑가의 왕초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는 또 있었다. 영등포 지역 소매치기 두목의 친구들이 李씨 추적에 나선 것이다. 영등포 지역에서 이름이 알려진 깡패들이었다. 결국 그들과 마주치게 됐다.
 
  4명이었는데 李씨보다 네댓 살쯤 위였다. 일대일 대결을 요청했다. 한 명이 응했다. 주변에는 소매치기, 거지 등 영등포 부근 부랑아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시라소니에게서 배운 대로 머리로 들이받고 무릎으로 가격하자, 덩치가 큰 상대는 힘없이 무너졌다.
 
  李씨는 당시 태권도 2단이었다. 시라소니로부터 배운 싸움 기술에 태권도 기술까지 겸비한 그는 싸움에 관한 한 그 지역 일대에서 천하무적이었다.
 
 
  극동호텔 사장 난자 사건
 
  부랑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이 소식이 지역 사회에 알려지면서 「李相勳」이란 이름 앞에 영등포 지역 군소 주먹패들이 하나 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20代 초반에 주먹으로 영등포 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조직의 이름은 「대호파」, 국내에서 최초로 싸움에 사시미칼을 동원한 조직이다.
 
  1970년대 중반 대호파의 보스로서 영등포 지역을 완전 장악한 李씨는 이른바 「원정작업」에 들어가며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린다. 원정작업에 등장하는 연장이 사시미칼과 도끼다.
 
  1970년대 중반 발생한 부산 극동호텔 사장 난자 사건이 李씨의 원정작업이었고, 밀수자금을 빼돌린 조직원의 팔목을 도끼로 내리찍어 사회문제가 됐던 부산 영선동 사건은 李씨가 밀수조직 「오야붕」의 청탁을 받고 벌인 원정작업이었다.
 
  비슷한 시기 신민당 박한상 의원 유세 테러 사건을 벌인 후 李씨는 당시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회장을 납치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당시 그에게는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연예인이었다. 부산 극동호텔 사건, 박한상 의원 테러 사건 등으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면서 李씨는 일본으로 밀항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국땅을 떠나 있는 동안 그 여인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마침 조직원이 공사 하청대금을 8개월 동안 지불하지 않고 있는 건설사 회장을 손봐주는 일을 받아 왔다. 오전 9시경 집을 나서는 회장의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납치했다. 하청업체들로부터 받은 代價(대가) 가운데 함께 행동한 조직원들에게 줄 수고비를 떼고 나머지 돈과 편지를 조직원을 통해 좋아했던 여인에게 보낸 후 그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李씨는 『일본에 밀항해 있는 동안 야쿠자들을 통해 깡패생활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정통으로 배웠다』고 한다.
 
  일본과 한국의 폭력세계는 싸움판에서 칼을 사용하는 목적이 달랐다. 일본 야쿠자의 칼은 상대방을 겁주기 위한 도구지 사람을 살상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의 폭력세계는 병들고 약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지만, 일본 야쿠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복수를 하더라도 상대방이 병에 걸렸을 때는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결투한다는 것이다.
 
  1976년 봄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이다. 당장 돌아왔다. 하지만 수배는 풀려 있지 않았다. 도망을 다녔지만, 결국 구속됐다. 3년 6개월의 刑(형)을 받았고 1980년 1월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했다.
 
 
  대전교도소 지도반장
  

  대전교도소에서 李씨는 교도관을 돕는 지도반장 역할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인생관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전교도소에는 용공사범들이 있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나와 있었어요. 지도반장이라는 게 용공사범들을 쥐어박는 역할이었어요. 전향을 시키기 위해 모멸감을 주려는 거였죠. 그런데 저는 사상 문제를 떠나서 이상하게 그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거기서 교도소 인권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아요.
 
  그때 만난 사람 가운데 김대수 박사라고 경북大 교수였는데,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서 들어왔어요. 그분이 나한테 「李相勳 군은 절대 그런 길을 걸어갈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변화할 거다」 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지금도 그분의 말이 잊혀지지 않네요.
 
  성공회大 신영복 교수도 계셨어요. 교도소 그 좁은 방에서 붓글씨만 쓰던 게 인상에 남아요.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시간이 있는데, 10분 이상 시간을 안 주었어요. 신교수님이 목욕할 때는 제가 30분씩 탕에 들어가게 해드리고 먹을 것을 갖다드렸죠. 그분이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지도반장과 취사반 보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1980년 1월 출소한 후 봄을 맞았지만 건달들에게는 혹독한 한파가 시작된 시기였다. 조직폭력배에 대한 검거가 곳곳에서 시작됐다. 그해 8월에는 폭력사범과 사회풍토문란사범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가 설치됐다. 폭력배뿐만 아니라 유흥업소의 업주와 종업원들이 그 대상이었다.
 
  1970년대 초 李相勳씨는 김포공항 가는 길에 있는 에어포트 호텔 나이트클럽 지배인이었다. 주변 건달들의 행패를 막기 위해서였다. 1980년 4월 그는 다시 에어포트 호텔 지배인을 맡았다. 같은 목적이었다.
 
  지배인으로 근무 중, 그는 취조를 이유로 부하 조직원의 아내를 괴롭힌 형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아내를 괴롭힌 데 격분한 부하 조직원이 형사에게 칼까지 들이대며 위협을 하자,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차원이었다.
 
  전국에 부하 조직원들과 함께 그에게 지명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미 구속된 광주 「서방파」 두목 김태촌은 징역 5년을, 「양은이파」의 조양은과 그 조직원들은 무기 등의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폭력배로 구속된다면 최소 10년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李씨는 부산 등 지방을 오가며 수배망을 피했다. 1980년 한 해는 그렇게 저물었다. 1981년 새해가 밝았지만 李씨에게 희망은 없었다. 그는 수배 중이었지만 후배들의 뒤를 봐주기 위해 모 호텔의 사장으로 있었다. 그해 1월 초순이었다.
 
  이날 李씨는 후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서울 이태원 해밀턴 호텔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쇠파이프가 날아왔다. 남대문경찰서에서 「李씨 일행이 해밀턴 호텔에 나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건달들과 경찰을 투입해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어둠 속에서 사시미칼을 휘둘렀다. 경찰 등 상대편에 칼에 찔린 부상자가 발생했고, 李씨는 그때 두 다리에 칼을 맞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수적 열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李씨 일행은 근처 크라운 호텔로 피신했다가 영등포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인천으로 피신했다.
 
  피신 20여 일 만에 그는 상대 조직의 밀고로 인천 올림푸스 호텔에서 조직원 두 명과 함께 검거됐다. 1981년 1월21일이었다. 범죄단체조직, 살인미수, 강도 혐의였다.
 
 
  법정 탈주극
  

  이날의 李相勳씨 검거는 4개월 보름 후 죄수들의 법정 탈주극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낳는다.
 
  다음은 1981년 6월6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톱기사 내용 중 일부다.
 
  <5일 오후 4시50분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가 서울지법 남부지원 제1호법정에서 구형 공판을 마치고 나오던 4명의 피고인이 私製(사제)로 보이는 4개의 칼로 2명의 호송교도관들을 위협, 3명이 법원 담을 넘어 탈주했다. 도주한 3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범죄단체조직법 및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조직소매치기단 이상훈, 노○○, 우○○이다>
 
  이들의 탈주 소식은 이들 모두 자수할 때까지 5일간 주요 일간지 사회면 톱기사를 차지했다.
    
  
  상대파 보스 살해 위해 재판정에서 탈주
 
  ―당시 탈주 목적이 상대편 보스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는데.
 
  『영등포에 조직이 있었어요. 우리 「대호파」와 「쑥고개파」가 있었는데, 쑥고개파가 우리 조직의 행동대장을 밀고했어요. 그를 잡으면 나를 잡을 수 있다고 한 거죠. 그때 나는 호텔 사장으로 있으면서 대외적으로 꼬리잡힐 일은 하지 않았어요.
 
  우리 세계에서는 건달이나 깡패는 복수를 하지 않으면 그 세계를 떠나야 해요. 복수를 해야겠는데 감옥에서 십 몇 년을 살고 나오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래서 복수하기 위해 탈옥을 하려고 했는데, 구치소에서는 탈옥이 불가능했어요. 재판정에서 탈출하기로 계획했죠. 구속 후 곧바로 탈옥을 시도 못 한 것은 해밀턴 호텔 싸움에서 내가 심하게 찔렸기 때문에 치료하는 데 거의 4개월이 걸렸어요』
 
  ―칼로 교도관을 위협하고 탈옥했는데, 흉기 반입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후배가 성경책 속에 톱칼과 톱날을 풀로 붙여서 들여보냈죠. 얇으니까 표가 나지 않았어요. 제가 허리디스크인 양 가장해서 요대를 착용하고 있었어요. 그 안에는 4cm 간격으로 20개 정도의 쇠침이 박혀 있었죠. 쇠침은 두께 2mm에 넓이가 1cm가량으로 잘 휘어졌지만 도금이 잘 돼 있어서 누가 보면 진짜 칼처럼 보였죠. 위협용이었어요』
 
  1981년 6월5일 서울지법 남부지원 법정. 몸수색에 대비해 요대 사이에 칼을 숨긴 李相勳씨는 오전부터 탈출 기회를 엿봤다. 오전에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증인들을 호송한 경찰과 교도관들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오후 법정이 열렸다. 증인들이 법정을 빠져나가면서 교도관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검찰의 구형이 떨어졌다.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이었다. 변호인의 변론 직후 李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판에 항의하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계산된 행동이었다.
 
  판사가 화가 나서 나가 버렸다. 교도관들이 재판이 끝난 다른 피의자들을 「비둘기장」(재판소 안의 임시 감방)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교도관의 수가 더 줄어들었다. 李씨는 그와 함께 구속된 조직원 2명과 함께 교도관들의 호송을 받으며 비둘기장으로 향했다.
 
  법정 문 밖에는 30평 정도의 공터가 있었고, 그 주위는 2m 높이의 담장과 담장 위에는 1m 높이의 가시 철조망이 있었다. 3명이 공터로 나오는 순간 이들은 칼을 빼들고 교도관들을 향해 휘둘렀다. 교도관들은 혼비백산 도망치며 총을 가지러 갔다. 우씨가 먼저 담을 넘었다. 李씨는 포승줄과 수갑을 풀고 담장을 향해 달려갔다. 노씨도 담을 넘었다. 李씨는 담 위로 올라갔다.
 
  담 아래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친구와 후배, 그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어머니(김옥련·78)가 있었다. 어머니는 교도관들이 든 총과 李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李씨는 어머니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담을 훌쩍 넘었다. 李씨는 지금도 그때 그런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인 게 가장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그때 하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잊을 수 없어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날은 재판정에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나오셨던 거죠. 어머니는 모태신앙으로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하셨어요. 아버지·형·동생 등 모든 가족들이 나 때문에 이민을 갔는데, 어머니는 한국에 끝까지 남아 제 옥바라지를 하며 저를 위해 기도하셨어요. 제가 다시 폭력세계로 돌아가지 않은 건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일 겁니다』
 
  ―복수는 하셨습니까.
 
  『못 했어요. 우리가 재판을 받는 법정에 쑥고개파 아이들이 와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자기들 두목에게 곧바로 전화했던 거죠. 우리가 쑥고개파 두목 집에 도착했을 때는 가족을 다 데리고 강화도 교동으로 피신한 후였어요. 그때는 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더 이상 죄를 안 짓게 됐으니까. 그 사람은 재작년에 암으로 죽었어요』
 
  ―결국 자수했는데.
 
  『원래 탈주 후 해외로 밀항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부산으로 들어오기로 했던 스페인 배가 일본에서 선적이 3일 늦어지면서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 거죠.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에 재일교포를 가장해 숨어서 도망갈 궁리를 했죠. 텔레비전을 보니까 영등포 지역을 이 잡듯이 뒤지더군요.
 
  그래도 자수할 마음은 없었는데, 하루는 우이동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야 하는가, 이렇게 돌아다니다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가, 나도 내 인생을 한번은 멋있게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제 내 나이 서른둘인데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살아 있다면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후배들을 설득해서 자수했죠』
 
  1981년 6월9일 오후 4시50분, 李씨는 자수를 위해 덕수궁 부근에 있던 대검찰청을 찾아갔다. 사전에 대검찰청 중수부에 金道彦(김도언) 부장 검사에게 전화했다. 훗날 金道彦 검사가 검찰총장 재직 중일 때 李씨는 특별 가석방됐다. 李씨는 자신이 탈주한 후 자신 때문에 구속된 후배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金검사는 李씨가 내건 조건을 들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 전화 통화 후 李씨는 대검찰청을 찾아간 것이다.
 
  李씨는 대검찰청 수위실에서 金검사에게 전화했다. 金검사가 수사관 4명과 함께 수위실로 내려왔다. 金검사의 첫 마디는 『잘 오셨습니다. 고생 많았죠』였다고 한다. 李씨가 자수한 후 金검사는 약속대로 李씨의 후배들을 풀어 주었다. 李씨와 함께 탈주했던 조직원들은 다음 날 자수했다. 그들은 金검사가 약속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보고 자수하기로 李씨와 사전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全斗煥, 金大中과의 인연
  

  李相勳씨가 탈주했을 때 그에게는 3000만원의 현상금이 붙었다. 당시 간첩신고 포상금이 500만원이었다. 게다가 「발견 시 사살해도 좋다」는 발포령까지 내려졌다. 李씨는 그 일로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全斗煥(전두환) 장군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한때 呼兄呼弟(호형호제)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李씨가 에어포트 호텔 지배인으로 있을 때 만났다고 한다. 全장군은 에어포트 호텔 부근에 있는 공수부대 여단장으로 있었는데, 부대와 가까운 에어포트 호텔 바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全장군은 매너가 좋았고 호탕한 분이었어요. 당시 제가 모시는 형님 한 분과 잘 알고 계셨는데, 그런 인연으로 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죠. 매년 연말이 되면 그 형님과 함께 연희동에 있는 자택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곤 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렸는데 제가 태권도를 가르쳐 주며 놀곤 했죠.
 
  훗날 대통령이 될 거라곤 꿈도 안 꿨지만 全장군은 후배들에게 잘 베푸는 보스기질도 있고, 괜찮은 군인이었어요. 우리 호텔 바에 수진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全대통령이 찾아오면 항상 그 아이가 모셨죠. 그런 사이인데 내 목에 현상금을 3000만원이나 걸고 발포령까지 내리니 제가 섭섭하지 않겠어요』
 
  李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5년에 보호감호 7년을 받은 후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이곳에서 그는 시국사범으로 구속돼 있던 운동권 학생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의 철학·사회과학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청주교도소에는 당시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金大中 前 대통령이 수감돼 있었다. 金 前 대통령 때문에 李씨는 그곳에서 두 번의 폭행 사건을 일으킨다.
 
  『金大中씨를 일부러 잡범 취급하는 거예요. 모멸감을 주려는 거죠. 金大中씨에게는 하루 3개의 사과가 지급됐는데 하루는 어느 교도관이 「이 사과가 대중이 거야? 대중이도 먹는데 나는 못 먹냐」면서 사과를 먹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교도관한테 주먹을 날렸던 거죠. 아무리 죄수로 들어와 있지만 잡범들이라면 몰라도 교도관이 그러면 안 되죠. 교도관이라면 혹시 다른 잡범들이 「대중이」라고 불러도 그렇게 못 부르게 꾸짖어야죠』
 
  또 한 번은 꽃과 관련된 재소자 청소부 폭행이었다.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金大中 前 대통령의 樂(낙) 중에 하나가 담벼락에 핀 꽃을 키우는 일이었다. 그는 운동 시간이면 꽃을 쓰다듬으며 애지중지했다. 하루는 李씨가 운동 중이었는데 재소자 청소부가 갈고리로 꽃을 꺾어 버렸다. 늘 그곳을 청소하는 재소자 청소부는 그 꽃을 누가 애지중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李씨는 곧바로 그 재소자 청소부의 면상을 받아 버렸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李씨는 金 前 대통령에게도 섭섭함을 토로한다.
 
  『그분이 대통령이 되고 노벨상을 받은 것은 자기를 위해서 수많은 민초들이 흘린 눈물이 바탕이 된 겁니다. 저도 동참했지만,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구속된 학생들이 「金大中을 석방하라, 全斗煥 물러가라」고 외치다 무수히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금까지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나를 위해서 수없이 눈물을 흘려 준 수많은 애국지사와 민초들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청주교도소에서 자주 사고를 치던 李씨는 시설이 열악한 청송교도소로 이감된다. 그곳에서 1984년 10월14일 발생한 박영두 사망사건은 李씨 인생에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된다. 인권운동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청송교도소 박영두 사망사건
 
  박영두씨는 영문도 모르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27사단 총기난동 사건에 연루돼 청송교도소로 이감됐다. 「재소자 처우 개선」 등을 주장하다가 교도관들의 집단 구타에 의해 사망했다.
 
  李씨는 이 사건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1985년 10월15일 교도관 8명을 잡고 사흘간 인질극을 벌였다. 요구사항은 박영두 사건 진상조사, 사회보호법 폐지, 폭력 교도관 처벌 등이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전혀 없었다.
 
  1988년 4월 교도관 3명을 잡고 또 인질난동 사건을 벌였다. 요구조건은 같았다. 안동지청 소속 검사의 조사를 받았지만 역시 바뀐 것은 없었다. 결국 李씨는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칫솔 사건」을 일으킨다. 칫솔을 삼켜서 위에 걸리면 수술을 위해 외부 병원으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기회를 이용해 외부에 박영두 사망사건과 청송교도소의 인권탄압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6명이 칫솔을 삼켰는데, 그중 한 명이 배에 칫솔이 걸렸다. 외부 병원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李씨는 이 기회를 이용해 소설가 윤정모씨에게 청송교도소의 인권탄압과 박영두 사망사건을 알리게 된다. 이 사실은 한겨레에 보도됐고, 金泳三·金大中 등 당시 야당 총재들에 의해 국정감사로까지 이어졌다. 이 일로 인해 1989년 인권유린 부분을 보완한 사회보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사회보호법은 2005년 8월 완전 폐지됐다.
 
  박영두 사망사건은 2001년 6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교도관들의 집단 구타에 의한 사망 사건으로 밝혀졌다. 李씨는 1993년 12월25일 특사로 출소한 이후 개인 사업을 하며 박영두 사망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뛰어다녔다.
 
  『영두는 제 옆방에 있었어요. 저와 의형제를 맺었죠. 죽기 전날 밤 영두가 「형님, 제가 곧 죽을 것 같아요. 제가 죽으면 이 억울한 죽음을 형님이 풀어 주세요」 했어요.
 
  그런 절규를 들었는데 제가 어떻게 영두 사망사건 문제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석방 이듬해인 1994년 3월 李씨는 부평역 앞에서 안경 좌판 장사를 했다. 옛날 조직의 후배들이 알아볼까 봐 모자를 눌러쓰고 장사를 했다. 실제 영등포 지역에 있던 후배들은 李씨를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어머니의 기도와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 감옥에서 읽은 책들은 어둠의 유혹을 떨치게 하는 힘이었다.
 
  안경 좌판 장사는 실패였다. 李씨는 안경을 5000원에 팔고 있었는데 바로 곁에서는 같은 종류의 안경을 3000원에 팔고 있었다. 안경을 도매로 구입할 때 너무 비싸게 산 것이다.
 
  안경 장사는 실패했지만 李씨의 신앙심은 더욱 돈독해졌다. 감옥에서 성경을 읽던 습관 그대로 매일매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폭력세계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주변에서 李씨가 한때 암흑세계의 보스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인들에게 비친 그의 모습은 신앙심이 돈독한 장로일 뿐이었다. 신앙간증을 할 때 李씨가 자신이 살아온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하면 교인들은 적잖이 놀랐다. 그래도 그의 신앙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가발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에서 가발을 만들어 국내로 들여왔다. 대박이었다. 가발사업이 시들해지면서 보석사업을 시작했다. 중국·러시아·태국 등지를 다니며 장사를 했다. 감옥에서 틈나는 대로 배운 무역실무가 큰 도움이 됐다. 돈을 제법 모았다.
 
  돈이 모이자 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눈이 갔다. 주먹 세계를 떠난 후배들이 그를 찾아왔다. 어려운 후배들부터 도왔다. 어려운 생활을 핑계로 다시 어둠의 세계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였다.
 
  李씨는 주먹세계를 떠나 자신의 생업에 열심인 후배들만 만나주었다. 조직폭력 세계에 몸담고 있는 선배나 후배와의 만남은 피했다.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다. 전국 5, 6共 피해자 협의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청송교도소, 감호소 등을 위문공연하고 교도소內 인권 문제 등이 언제나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헐벗고 굶주린 북한 어린이 돕기로
  
이상훈씨는 2004년 북한 용천 폭발사고 후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 등을 통해 북한 어린이와 결핵환자를 돕고 있다.

  李씨는 중국을 오가며 북한사람들의 참상을 알게 됐다. 북한 여성이 중국 한족 가정에서 가정부 등으로 일하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봤다. 북한 어린이들의 헐벗고 굶주린 모습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004년 북한 용천 폭발사고로 다친 아이들을 보면서 그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남북 사랑의빵 나누기운동본부」는 그렇게 탄생했고, 그는 그 단체의 상임대표다.
 
  ―북한에는 자주 가십니까.
 
  『두 번 갔어요. 북한을 지원할 때 인프라 사업만을 강조하는데, 저는 북한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농산물 생산을 돕는 게 더 시급한 일이라고 봐요. 당장 굶어죽는데 인프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식량 지원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인도적 차원에서 꾸준히 지원했으면 합니다』
 
  ―식량 외에 시급하게 지원해야 할 것은 어떤 게 있습니까.
 
  『의약품입니다. 북한에 어린이 결핵환자만 80만 명입니다. 결핵 치료를 위해 어린이 한 명당 한 달 약값이 3만원이면 됩니다. 보통 결핵은 10개월이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240억원이면 북한의 어린 결핵환자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병원 시설비까지 포함하면 약 4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우리 국력 규모로 보면 큰 액수가 아닙니다』
 
  ―세계평화상을 받은 분이 북한 어린이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 아닙니까.
 
  『같은 민족이라는 입장에서 너무 안타까워서 그런 거죠. 에티오피아 등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도 북한 어린이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 어린이들도 돕기 위해 지평을 넓힐 생각입니다. 오는 5월 미국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어린이 재단 모금 기도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질병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全세계의 어린이를 돕는 일에 나설 겁니다』
 
 
  시라소니와 김두한
 
  인터뷰 말미에 다시 주먹세계에 대한 질문을 했다.
 
  ―시라소니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시라소니 큰아버님은 의리와 신의를 생명으로 알던 분입니다. 큰아버님은 전쟁이 끝난 1953년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을 때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에게 동대문시장에다 장사할 수 있는 좌대를 많이 잡아 주셨어요. 당신께서 직접 소유하면 큰돈이 되지만 큰아버지는 돈을 혼자 소유하겠다는 생각을 절대 안 하는 분이었죠. 아침에 보면 집에 있던 쌀 한 가마가 학교에 갔다오면 없어져요. 전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거예요』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김두한씨도 시라소니 큰아버님을 피했어요. 북한에서 내려온 시라소니 큰아버님이 「우미관」으로 찾아가 두한이 형님에게 싸움을 요청한 일이 있죠. 당시 싸움에서 지면 떠나야 됐죠. 그런데 두한이 형님이 큰아버님한테 「내래 어떻게 성순이 형님하고 싸우겠습니까. 형님!」 하면서 먼저 머리를 숙였죠. 그 자리에서 바로 형님, 동생이 된 거죠』
 
  김태촌씨와의 관계 등 주먹세계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李相勳씨는 손사래를 쳤다.●  

입력 : 200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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