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은 수려(秀麗)한 고독’ 겨울의 빛깔을 노래한 시(詩) : 월간조선

독서삼여(讀書三餘)라는 말이 있다. 독서를 하기에 적당한 세 가지 종류의 여가시간을 뜻한다. 시간은 밤, 계절은 겨울, 날씨는 비가 올 때를 말한다. 그렇게 보면 '비가 얼어 눈 내리는 겨울밤'은 가장 책 읽기 좋은 날이 아닐까. 바깥의 시간을 잠시 접고, 책과 글에 젖어 자아와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시들었다 해도 적막히 귀향한 겨울에, 고즈넉한 독서의 설야(雪夜)에 시집(詩集)이 빠질 수 없다. 당대의 시류와 유행을 좇기보다는 순수시(純粹詩)의 무구함을 수놓고, 전통서정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문학의 자존을 지킨 시들이 여기 있다. 옛적 문인(文人)들이 소복이 지어올린 '겨울의 고독을 달래주는 시편' 5수를 소개한다. 독자분들의 자유로운 감상과 해석을 위해 평문(評文)이나 주석(註釋) 없이 전문을 인용·수록했다.

1. 박목월 <자갈돌>
(《탄생 100주년 기념 박목월시 100선》, 동리목월기념사업회, 2015)

"눈으로 덮힌 돌개울에 / 가지가 물에 잠긴 채 / 얼어붙은 갯버들의 / 그 인고(忍苦)는 우리의 것이다. // 돌개울을 가로질러 / 녹슨 철조망(鐵條網)은 등성이로 뻗쳤다. / 철조망에 잠긴 일년초(一年草) 줄기 / 그 허깨비의 손. // 민간인산입금지구역(民間人山入禁止區域) 안에서도 / 눈은 순수하다. / 눈벌에 얼룩진 마른 풀숲 / 그것은 우리의 탈모증(脫毛症)이다. / 바람이 불리운다. // 하지만 흐르는 / 흐르는 것은 쉽사리 얼지 않는다. / 눈밭을 뚫고 돌개울에는 / 맑고 차가운 냇물이 흐른다. // 막사에서 칫솔을 물고 / 세수하러 내려오는 병사들 / 그들조차 잊어버린 것이 / 차고 맑은 물에 잠겨 있는 / 그것은 자갈돌만이 아니다."

2. 조지훈 <눈 오는 날에>
(《승무》, 시인생각, 2013)

"검정 수목 두루마기에 / 흰 동정 달아 입고 / 창에 기대면 // 박넌출 상기 넘은 / 기울은 울타리 위로 장독대 위로 / 새하얀 눈이 / 나려 쌓인다 // 홀로 지니던 값진 보람과 / 빛나는 자랑을 모조리 불사르고 / 소슬한 바람 속에 / 낙엽처럼 무념히 썩어 가면은 // 이 허망한 시공(時空) 위에 / 내 외로운 영혼 가까이 / 꽃다발처럼 꽃다발처럼 / 하이얀 눈발이 / 나려 쌓인다 // 마음 이리 고요한 날은 / 아련히 들려오는 / 서라벌 천년의 풀피리 소리 // 비애로 하여 내 혼이 야위기에는 / 절망이란 오히려 / 나리는 눈처럼 포근하고나."

3. 김광균 <눈 오는 밤의 詩>
(오영식·유성호 엮음, 《김광균 문학전집》, 소명출판, 2014)

"서울의 어느 어두운 뒷거리에서 / 이 밤 내 조그만 그림자 우에 눈이 나린다 / 눈은 정다운 옛이야기 / 남몰래 호젓한 소리를 내고 / 좁은 길에 흩어져 / 아스피린 분말(粉末)이 되어 곱-게 빛나고 / 나타-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 / 그 우를 지나간다 / 눈은 추억의 날개 때묻은 꽃다발 / 고독한 도시(都市)의 이마를 적시고 / 공원(公園)의 동상(銅像) 우에 / 동무의 하숙 지붕 우에 / 캬스파처럼 서러운 등불 우에 / 밤새 쌓인다"

4. 김춘수 <겨울밤의 꿈>
(시-김춘수/그림-최용대, 《꽃인 듯 눈물인 듯 – 김춘수 자선 시화집》, 예담, 2005)

"저녁 한동안 가난한 시민들의 / 살과 피를 데워 주고 / 밥상머리에 / 된장찌개도 데워 주고 / 아버지가 식후에 석간을 읽는 동안 / 아들이 식후에 / 이웃집 라디오를 엿듣는 동안 / 연탄가스는 가만가만히 / 주라기의 지층으로 내려간다. / 그날 밤 / 가난한 서울의 시민들은 / 꿈에 볼 것이다. / 날개에 산홋빛 발톱을 달고 / 앞다리에 세 개나 새끼공룡의 / 순금의 손을 달고 / 서양 어느 학자가 / Archaeopteryx라 불렀다는 / 주라기의 새와 같은 새가 한 마리 / 연탄가스에 그을린 서울의 겨울의 / 제일 낮은 지붕 위에 / 내려와 앉는 것을,"

5.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고형진, 《정본 백석 시집》, 문학동네, 2007)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내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내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내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 본문=각 시집 및 논저 발췌·인용

사진=조선일보DB
정리=신승민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