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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金宗奎 前 부안군수 痛恨의 증언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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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奎 前 부안군수 痛恨의 증언 - 2003년 7월~2004년 9월 전북 부안 
 
「盧武鉉 386」등이 불러들인 迷信과 狂風이 부안의 꿈을 빼앗아갔다 
  
● 盧武鉉 정권의 386과 부안에 집결한 反核·환경단체들은 서로 통했다.
● 각종 시위현장에서 볼 수 있는 운동권 지도자들은 모두 부안에 집결
 
김종규
1951년 전북 부안 출생. 전주 영생高·전주大 법학과 졸업. 전주大 대학원 법학 석사. 전주大 총학생회장, 전라中 교사, 부안사랑나눔회 회장, 전주 경실련 집행위원, 호원대 겸임교수, 전주대 객원교수 역임.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쇠파이프, 화염병, LPG가스통 
 
 2003년 7월부터 2004년 9월까지 1년2개월여 동안 전북 부안군은 사실상 치안공백 상태였다.
 
  郡(군) 인구 6만2000여 명 가운데 2만3000여 명이 모여 사는 부안읍에는 한때 8000여 명의 경찰이 상주했다. 시위가 극에 달했던 2003년 7월11일부터 이듬해 2월14일까지 7개월여 동안 부안에서는 300회에 가까운 집회가 열렸다.
 
  이 기간 초·중·고생들이 41일간 등교거부 투쟁을 벌였고, 고속도로 점거 시위, 海上(해상)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에는 쇠파이프와 화염병, 염산을 담은 병, 썩은 젓갈 봉지, LPG 가스통이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부안군 주민 45명이 구속되고 121명이 불구속 기소됐으며, 戰警(전경)과 주민 등 500여 명이 다쳤다.
 
  도대체 2003년 7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전북 부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부안주민들의 시위가 극렬하게 시작됐던 2003년 7월11일은 부안군이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하 「방폐장」) 유치 신청 의사를 밝힌 날이고, 2004년 2월14일은 방폐장 유치 반대 주민단체가 자체 주민투표를 실시한 날이다.
 
  이 기간 부안에는 민노총·한기총 등 사회단체와 反核(반핵)·환경 관련 단체들이 집결해 「反核 부안」 구호를 외쳤다. 방폐장 건설은 그때까지 안면도 사태(1990년) 등을 겪으며 17년 동안 해결되지 못한 국책사업이었다.
 
  부안군은 2003년 7월14일 산업자원부에 방폐장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본격적인 유치에 나섰지만, 주민들과 환경 관련 단체들의 극렬한 반발이 일자 정부는 결국 2004년 9월 사실상 「부안 방폐장 백지화」를 선언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2004년 2월14일에 실시됐던 방폐장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에서는 91.83%의 주민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 일부 환경단체들이 「핵은 죽음이고, 방폐장은 기형아와 기형 가축을 낳는 시설」이라 한 선전戰이 주민들에게 먹혔다.
 
  부안의 방폐장 유치가 사실상 백지화된 후 정부는 2005년 11월 경북 경주를 방폐장 부지로 선정, 발표했다. 경주는 방폐장 유치를 위해 군산·영덕·포항 등과 경쟁을 벌였다. 방폐장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에서 경주는 89.5%의 찬성률이 나왔고, 경쟁지였던 군산·영덕·포항은 각각 84.4%, 79.3%, 67.5%의 주민 찬성률이 나왔다.
  
전북 부안군 주민 2000여 명이 2003년 8월13일 오후 서해안고속도로를 점거한 채「핵폐기장 즉각 철회」,「김종규 부안군수 퇴진」등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다.
 
  부안 91.83% 반대, 경주 89.5% 찬성
 
  2004년 2월 부안에서는 방폐장 유치에 반대하는 주민이 91.83% 달했지만, 2005년 11월 경주에서는 90%에 가까운 주민이 유치에 찬성했다. 같은 전북에 속한 군산에서도 84.4%의 주민이 방폐장 유치에 찬성했다.
 
  경주와 군산에는 부안과 달리 「핵은 죽음이고 방폐장은 기형아와 기형 가축을 낳는 시설」이라는 迷信(미신)이 없었고,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狂風(광풍)이 없었던 결과다.
 
  실제 경주와 군산 등이 방폐장 유치 신청을 낸 후에 이 지역들에는 부안과 달리 전국의 反核·환경단체들이 집결하는 현상이 없었다. 지역별로 환경단체 등의 반대운동이 있었을 뿐이다.
 
  방폐장 유치로 경주는 양성자가속기 설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3000억원 특별지원 등의 혜택을 받게 됐다. 동국大 경주캠퍼스 지역정책연구소는 방폐장 유치로 인해 2020년에는 경주 인구가 2005년보다 5만 명 이상 늘고, 산업체 수는 1만 개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주민소득 2배 증가, 주택 수 3만 호 증가의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했다.
 
  2003년 7월부터 2004년 9월까지 부안에 불어닥친 미신과 광풍이 이런 효과들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게 한 것이다.
 
  이런 미신과 광풍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이 金宗奎(김종규·57) 前 부안군수다. 민주당 아성인 호남지역에서 무소속으로 군수에 당선됐던 그는, 방폐장 유치를 추진하다가 2003년 9월 주민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코뼈가 함몰되고 갈비뼈가 골절되는 등 전치 6주의 중상을 입었다.
 
  金 前 군수는 경주가 방폐장 최종 부지로 결정된 직후 한 시사주간지에 「부안을 기억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기고를 했다. 그 내용 일부를 인용한다.
 
  <매 맞는 군수에 피 흘리는 전경과 주민. 반목하는 이웃들. 핵은 곧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말로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사회단체. 당리당략과 자신들의 지지기반에만 신경 쓰며 대책 없는 반대를 종용해 온 정치인들. 이에 나몰라라 하며 일관성 없는 정책과 뒷짐만 져온 정부.
 
  부안을 기억하십시오. 난제인 국책사업을 과감하게 안으려고 했던 부안을 기억하십시오. 정부와 사회단체 언론들에게 소외당하고 거짓에 눈 가려졌던 부안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목놓아 울어버리고 허심탄회하게 막걸리라도 기울일 수 있게 부안을 기억하십시오>
   
  버림받은 부안
 

  金 前 군수는 지난해 大選(대선)과 함께 치러진 부안군수 再선거에 또다시 무소속으로 도전해 40.4%의 지지를 얻었지만 당선에는 실패했다.
 
  지난 2월11일 金宗奎 前 군수를 부안 읍내에서 만났다. 고속버스편으로 부안을 찾았는데 그는 부안터미널에 미리 나와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보다 앞서 내리는 승객들과 그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주민들에게 폭행을 당했었는데 주민들이 무섭지 않습니까.
 
  金군수는 악수를 나누던 손을 잡아 빼며 손사래를 쳤다.
 
  『아유, 그렇지 않아요. 군수 선거를 또 치렀는데요. 그때 다쳤던 분들 가운데 제 손을 잡아 주시는 분들도 많고, 서로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끼리 이제는 대부분 잘들 지내고 있어요』
 
  우리는 부근 식당으로 이동했다. 부안 방폐장과 관련해서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주민들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질문만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방폐장 부지가 경주로 확정된 후, 『부안의 희생과 교훈이 있었기에 4개 지역이 경쟁 후보지를 선정하게 됐다. 방폐장 사업 추진과정에서 부안의 功을 인정하고 주민의 희생에 응당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했는데, 정부의 지원은 있었습니까.
 
  『일절 없었죠. 지금 원전에너지에 관련돼 종사하시는 분들은 부안 때문에 원전사업이 해결됐다고 그래요. 부안 학습 효과 때문에 방폐장 부지가 마련됐다는 거죠. 그런데 이 참여정부만 그걸 인정을 안 해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방폐장 부지 확정을 국정과제에서 두 번째 성공이라고 하잖아요. 대통령이 그랬고, 국무총리가 그랬어요. 그러면 전국 지자체 중에 처음으로 신청한 게 부안군이었고 그 때문에 얼마나 희생이 컸습니까. 당연히 부안군에 대한 보상을 해야 맞죠.
 
  어느 비서관이 「탈락지역에 대한 배려를 해야 된다」고 하니까 盧대통령이 「게임에서 졌는데 뭘 줘」 그랬답니다. 그 비서관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盧대통령이 그렇게 말하니까 다시 거론이 안 돼 버리는 거예요』
 
  ―결국 부안은 정부에 버림받은 거네요.
 
  『그렇죠. 당시 방폐장 유치 신청을 한 후인 2003년 7월23일 盧대통령이 저에게 전화까지 했습니다. 아마 세계적으로 국책사업 때문에 대통령이 기초단체장한테 전화해서 「고생이 많다. 어려운 조건인데 소신 갖고 일해 줘서 고맙다. 치안유지 등 정부가 할 수 있는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격려하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盧武鉉,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金군수에 대한 주민들의 폭행, 과격 시위 등 부안사태가 확대되던 2003년 11월 하순, 국회 산자위원들과의 조찬에서 盧武鉉 대통령이 『처음에 부안군수 말을 너무 믿었다』라고 했던데요.
 
  『사업에 대한 결정권이 군수에게 있다고 하면 대통령 말이 맞죠. 그런데 그 사업은 국책사업이에요. 문제를 풀어야 할 의무는 대통령에게 있는 거예요. 사업을 놓고 경제성을 따져서 유치할 수 있는 권한만 단체장에게 있어요.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다면 자기 책임회피죠. 국책사업을 어떻게 군수만 믿고 해요. 그때 당시 부안은 공권력 不在(부재)가 돼 있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군수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방폐장 유치 신청을 했을 때 주민들의 충분한 동의를 얻지 않았다」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 이야기 같은데, 그러려면 처음부터 방폐장 유치 신청 요건에 지방자치단체 의회 통과를 명시했었야죠. 부안이 신청할 때는 그런 조건이 없었어요』
 
  ―의회 통과 기준은 나중에 경주·군산 등에서 방폐장 유치 신청을 할 때 만들어진 겁니까.
 
  『그랬죠.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건데, 盧武鉉 대통령이 방폐장 부지 선정과 관련해 당시 윤진식 산자부 장관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해야 하는 사업이다. 국가 난제를 반대한다고 못 풀면 그게 국가냐」고 말이죠』
 
  ―盧대통령이 「방폐장 부지를 확정해야 한다」는 의지는 강했다는 이야기군요.
 
  『이런 사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불신이 높잖아요. 그래서 제가 윤진식 산자부 장관한테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윤장관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해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의지다」라고 전해 준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부안을 희생시키고, 부안에 소금 뿌려 버리고 경주로 간 거죠. 반대한 국책사업은 정부가 다 했어요. 평택 미군기지 시위가 얼마나 심했어요. 사패산터널은 환경단체가 그렇게 반대했지만 통과했어요. 그런데 유독 부안만 안 됐어요』
 
  ―왜 방폐장 유치를 생각하게 됐습니까.
 
  『시위가 격해지고 그럴 때 제가 당시 김두관 행자부 장관에게 말했어요. 「내가 사표를 내겠다. 대신 방폐장 유치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 저는 부안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돌아와서 이력서 들고 취업을 하는 고장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일례로 인근 정읍의 방사선연구센터가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왔어요. 방사선연구센터가 들어오기 전 정읍시청에서 토지공사에 산업단지를 조성해 달라니까 「경쟁력이 없다, 실효성이 없다」면서 거절했어요.
 
  지금은 방사선연구센터가 들어와서 성과를 거두면서 관련된 기업들이 「들어오겠다」고 하니까 토지공사가 100만 평을 조성해요. 고용창출 2만 명에 2조원의 파급효과가 있다고 그럽니다. 조그만 방사선연구센터 하나가 그 정도 효과를 가져오는데, 방폐장을 유치하고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가 들어오면 얼마나 생산유발 효과가 크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방폐장을 유치하려고 했죠』
    
  운동권 지도부 총집결

   
  ―시위가 한참일 때 부안으로 집결한 외부세력은 어떤 단체들이었습니까.
 
  『환경단체, 민노총, 민노당, 한노총 등 다 왔었죠. 시위를 晝夜(주야)로 했으니까요. 전부 반대만 하는 단체들이었죠. 찬성은 목소리를 제대로 못 내고요. 백기완씨, 한상렬 목사, 단병호 당시 민노총 위원장, 임수경씨 등 우리나라 시위현장에서 볼 수 있는 운동권 지도부는 부안에 다 왔다고 보면 돼요』
 
  ―상황이 그렇기는 했지만 방폐장 유치 반대 단체에서 주도한 주민투표에서 반대가 91.83%씩 나왔다는 것은, 유치 후의 효과 등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한 측면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요.
 
  『유치 신청 후 1년 동안 홍보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유치 신청 후 전국에서 몰려든 反核·환경단체들과 재야 운동권들의 격렬한 반대 운동 때문에 그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 거죠. 反核·환경운동 단체들이 「핵이 폭발한다」, 「농산물 안 팔리고 기형아 낳고 땅값 떨어지고 다 죽는다」고 네거티브로 일관하는 데 안 넘어갈 주민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시위대에 밀려 홍보할 수단도 없었고, 군수인 저도 관내를 다닐 때 경찰의 경호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으니까요』
 
  ―정부가 당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잖습니까.
 
  『문제는 정부가 사태해결을 위해 전북도청이나 부안군청의 책임자들과 대화를 나눈 게 아니라 환경단체하고만 대화를 했다는 겁니다. 우리들의 느낌으로는 환경단체가 부안을 反核운동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정부와 「부안만 빼고 다른 데는 해도 좋다」는 묵계를 가졌던 것으로 봐요. 그때 당시 총리실의 비서관이 전북도청에 내려와서 「부안은 의회 통과를 해도 안 된다」는 기자회견을 했으니까요』
 
  ―구체적으로 증거가 있습니까.
 
  『정부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를 안 만나요. 우리는 아무 정보도 가질 수 없었는데 환경단체나 反核단체 사람들은 일찍부터 「부안은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총리실에서 나온 비서관이라는 사람들은 반대 시민단체 사람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우리 얘기는 아예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盧武鉉 정부 386비서관들이 환경단체하고만 얘기하는 거죠. 우리가 정보를 올리는 것보다 시위현장에서 비서관들이 청와대로 직접 보고하는 것만 믿었던 거죠.
 
  또 하나는 당시 뒤늦게 방폐장 유치 신청을 했던 경주·군산 등에는 反核·환경단체들이 집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역별로 반대운동은 있었지만 부안처럼 극렬한 시위 등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 여당의 모 의원을 만났을 때 환경단체 인사가 「부안만은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민투표해서 승리한 곳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안을 反核투쟁의 성지로 삼아
 
  ―경주나 군산은 놔두고 외부 환경운동단체들이 왜 하필 부안을 타깃으로 삼았다고 보십니까.
 
  『부안이 제일 먼저 방폐장 유치 신청을 했으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환경단체들은 부안에서 방폐장을 좌절시켰다는 성과를 잃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이른바 부안을 反核투쟁의 성지로 삼고 싶었던 거죠』
 
  ―전주 경실련 집행위원 등 시민운동에 관여를 했었는데 부안사태를 겪으면서 시민단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건강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시민운동이 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군수 시절 부안사태를 겪으면서 느낀 것은 시민단체에 진정성 확보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2003년 부안에 집결했던 시민·사회단체에는 진정성이 없었다고 봐요. 「핵이 폭발한다」, 「기형아를 낳게 된다」는 거짓말로 주민들을 선동했으니까요. 농산물을 못 먹게 된다고 하는데 그럼 영광굴비는 어떻게 먹습니까. 그런 식이라면 이분들은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구출하기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우리가 유치하려던 것은 방폐장이지 핵폐기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핵폐기」라는 말을 써서 주민들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정작 북한의 핵에 대해서는 왜 폐기하라고 시위를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2003년 11월25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자신이 직접 주민들을 만나서 설득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실제 그런 노력이 있었습니까.
 
  『그 뒤로 안 한 거죠. 오히려 그 뒤부터 발빼기 수순에 들어간 거죠.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단체장을 불러서, 「이런 상황이 있어서 어렵게 됐으니 이렇게 하자」 얘기했으면 빨리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그런 이야기는 일절 안 했어요.
 
  정부에서는 「부안도 방폐장 선정 후보지 중에서 예외 아니다. 똑같은 조건에 맞으면 부안에 우선권을 주겠다」고 얘기했으니까요. 부안과 저를 우롱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盧武鉉 정부의 최대 피해자는 저라고 생각합니다』
 
 
  주민 간 협박, 폭력의 난무
   
  1년 2개월간 지속된 부안사태는 주민들 간에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이는 등 많은 상처를 남겼다. 유치를 찬성하는 주민들에 대한 폭력이 끊이지 않았고, 찬성과 반대 측 간 주먹다짐이 자주 발생했다.
 
  전경들에게 밥을 팔았다는 이유로 식당의 기물을 파손하고 주인을 폭행하는 일이 있었다. 전경에게 식사를 제공한 식당의 명단이 인터넷상에 유포됐었다. 방폐장 유치 홍보를 위해 부안에 내려와 있던 「한수원」 직원들에 대한 차량파손 및 협박, 감금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해외원전 시설을 견학하고 온 주민들에 대한 협박·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심지어 해외원전 견학을 다녀온 한 주민의 사무실에 쳐들어간 시위대는 방화를 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해외원전 견학을 다녀온 한 개인택시 운전자는 승차거부와 협박을 견디지 못해 차를 팔아 버렸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군수 再선거에서 金군수께서 얻은 득표를 보면, 방폐장 유치 실패를 아쉬워하는 주민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부안에서 환경운동과 경제문제 간의 격돌은 계속될 것으로 봐요. 제가 2002년 군수에 취임했을 때 부안은 인구가 7만2000명이었습니다. 지금은 6만2000명인데, 올해가 지나면 6만 명선이 무너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방폐장을 유치했다면 인구감소는 막을 수 있었겠죠. 경제적 실용주의로 나갔을 때는 유치 실패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고, 환경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된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겠죠. 저는 찬반으로 갈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그런 상황을 이용하는 게 문제라고 봐요. 표하고 연결해 주민들을 편 가르는 게 문제입니다』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지금 찬반투표를 해보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정확한 홍보를 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찬반투표를 한다고 하면 찬성이 60%는 넘을 것 같아요. 지금 상태에서 바로 하면 50대 50 정도는 될 겁니다. 군산의 예를 봐도 그렇고요』
 
 
  전치 6週 중상을 입다
 
  金宗奎 군수는 방폐장 유치 반대에 나섰던 종교인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부안사태 때는 문규현 신부 등이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 등으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金군수의 말이다.
 
  『성직자는, 우리보다 훨씬 진실한 삶을 살기 때문에 존경받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직자들이 사실과 다르게 거짓되고 부풀린 환경단체의 주장을 그대로 함께 주장했는데, 제 눈에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어요. 우리 같은 평민들의 생각이 잘못됐다면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성직자들이 해야 할 일이잖아요.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더라고요』
 
  부안사태 와중에 사회적 비난을 받은 일이 방폐장 유치를 반대하는 일부 단체의 과격한 회원들이 벌인 초·중·고생 등교거부 사태다. 41일간 계속된 등교거부에는 한때 郡內 초등학교의 80% 가까이를 사실상 휴교상태로 몰고 갔다.
 
  金군수는 『6·25 전쟁 때도 피란지에서 학교를 열고 학생들을 가르친 우리 민족인데 아이들을 볼모로 방폐장 유치 반대 투쟁을 하는 일부 교사와 주민들에게 큰 실망을 했다』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학습권을 볼모로 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안사태 중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2003년 9월8일 발생한 방폐장 유치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들에 의한 金宗奎 군수 폭행사건이었다.
 
  金군수는 이날 방폐장 유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부안에서 가장 큰 사찰인 「내소사」를 찾았다. 내소사 會主(회주) 慧山(혜산)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혜산 스님과 점심과 차를 함께한 후 정오 12시께 내소사를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방폐장 유치를 반대하는 내소사 인근 진서·변산면 등 주민 200여 명이 사찰 경내에 들어와 있었다.
 
  주민들이 『핵폐기장 결사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는 동안 金군수는 주민 대표 등과 대화를 나누고 오후 3시30분쯤 절 마당에 나섰다. 이때는 주민이 7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 앞에서 金군수가 방폐장 유치 소신에는 변함이 없음을 밝히자 몇몇 주민들이 金군수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잠시 피신해 있던 金군수가 다시 대화에 나섰지만 金군수가 입장을 바꾸지 않자 다시 집단폭행이 시작됐다. 이어 주민들은 金군수가 타고 온 승용차를 뒤집은 채 불을 지르고 유리창을 부쉈다. 이후 주민들은 『핵폐기장 신청을 철회하지 않으면 풀어 줄 수 없다』며 金군수를 억류했다. 金군수는 억류 7시간 만에 경찰들에 의해 구출됐다.
 
  내소사에 있던 주민들은 부안군청으로 향하던 중 이날 밤 10시쯤 부안읍 주산사거리에서 귀가하던 전경버스와 지프차, 민간인 소유 냉동차 등 3대를 불태웠다.
 
  이날 주민들에 의한 폭행으로 金군수는 전치 6週의 중상을 입었다. 金군수는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말한다.
 
  ―자신을 군수로 뽑아 준 주민들에게서 폭행당할 때 심정은 참담하셨겠죠.
 
  『저는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와중에 어떤 분들은 폭력을 만류하는데 고맙더라고요. 그러면서 속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죠. 지난 군수 再선거 때 제 옆에 할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그때 시위대로 오셨던 할머니예요.
 
  어떤 주민이 자꾸 가스통을 가져와서 불을 지른다고 하니까 그때 할머니가 불을 끄면서 「살려 놓고 봐야 된다」고 말리셨죠.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폭행당하고 있을 때도 저는 제가 이렇게 희생이 돼서라도 우리 부안군이 잘될 수만 있다면 견뎌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관련자 모두 사면복권
 
  ―방폐장 유치 반대쪽에서는, 반대에서 찬성으로의 분위기 반전을 위해 金군수께서 일부러 주민들에 의한 폭력을 유발했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아이구, 참, 그때 제가 코가 함몰되고 갈비뼈가 나가고 온몸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 현장에 문규현 신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나중에 왔는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문신부가 있었던 것은 맞아요. 저는 그분이 폭행을 공개적으로 만류하는 것은 못 봤어요.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제 어깨를 딱 잡더니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문신부님한테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사건 후 가족들이 군수직 그만 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없었습니다. 지금도 제 아내나 아이들은 지역발전을 위해서 공인은 희생해야 한다고 합니다』
 
  ―부안사태로 많은 전과자가 나왔는데 사면복권은 됐습니까.
 
  『예, 사면복권 다 됐습니다. 제가 사면복권 때문에 청와대를 거의 7, 8회 갔습니다』
 
  ―부안사태 당시 과잉진압 논란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과잉진압이고, 경찰 입장에서는 과격시위로 볼 수 있었겠죠. 그때 국회에서 조사단이 왔을 때 과잉진압이라고 몇 가지 지적했었거든요. 그때 다치신 분들이 많아서 경찰을 좀 원망하는 경우가 있죠. 과격 시위로 몰아간 건 주민들이 아니라 외부세력입니다』
 
  부안사태 당시 방폐장 유치 반대자들은 金군수를 「핵종규」라고 불렀다.
 
 
  「핵종규」
 
  ―지금도 金군수를 「핵종규」라고 부릅니까.
 
  『공개적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만, 「핵종규」라고 부르는 사람들 있어요. 군수 再선거 때 제가 「핵종규 왔습니다」 하니까 웃더라고요(웃음)』
 
  ―이번 4·9 총선에 출마할 생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공부할 때 지자체만 공부해서요』
 
  金군수는 대학 졸업 후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생활을 계속했으면 하는 생각은 안 듭니까.
 
  『대학 다닐 때 학생회장을 하다 보니까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죠』
 
  ―盧武鉉 정부에 대한 섭섭함이 많은 것 같은데, 정권을 마무리하기 전 꼭 해주었으면 하는 일은 어떤 겁니까.
 
  『부안사태는 국가적 난제를 풀기 위한 과정에 벌어진 일입니다. 盧武鉉 정부는 부안에서의 시위가 정권에 부담을 줬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 희생의 代價는 알아 줘야 합니다. 그때 희생당한 부안군민과 부안군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부안사태가 없었다면 방폐장 부지를 경주로 선정하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아마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국가적 난제가 됐을 겁니다』
 
  金宗奎 군수는 인터뷰 내내 방폐장 유치를 못 한 데 대한 회한을 이야기했다.
 
  『저로서는 다 잃어버린 셈입니다. 지역발전에 대한 비전을 잃고 우리 郡民들의 원망만 안게 됐습니다』
 
  2003년 전북 부안에 몰아닥친 미신과 광풍은 「부안의 꿈」을 빼앗아갔다.● 
 

입력 : 200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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