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그리운 스승이 한 명만 있어도, 인생사 고됨이 조금은 눅어지지 않을까. 지난 5월 14일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공연이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열렸다. <2025 박송희 선생님과의 동행>이다. 채수정 명창(한예종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이 이끄는 채수정소리단이 열었다.

박송희(朴松姬) 명창은 판소리를 단지 예술이 아닌 ‘삶의 도리’로 승화한 예인이다. 1927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궁핍한 시절 소리의 길로 들어섰다. 열여덟 살 무렵 성창옥 명창에게 입문한 후 박록주, 박동실, 정응민, 안기일, 조상현 등 당대를 대표하는 명창들에게 사사했다.

1950~60년대 동양창극단과 여성국극단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국립창극단에 정식 입단했다. 50대 중반, 늦은 입단이었다. 곧 주역으로 발탁돼 <흥보가>, <심청가>, <춘향가> 등 대표 작품에서 연기와 소리를 모두 겸비한 배우로 주목받았다. 2002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돈도 안 받고 소리를 가르쳐 준 스승 박록주 명창을 기리기 위해 그는 평생 흥보가를 불렀다.

박 명창은 교육자이기도 했다. 이번 공연을 이끈 채수정 명창 역시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채 교수는 2021년부터 스승의 날 즈음이면 <박송희 선생님과의 동행> 공연을 열고 있다.

박송희 명창과의 추억을 들려주는 정병헌 교수(왼쪽)과 채수정 명창

이번 공연은 판소리 전문 연구가인 정병헌 전 숙명여대 국문학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정 교수는 박 명창을 비롯한 판소리 예인들과의 추억과 곡 해설을 중간중간 들려줬다. ‘어린 명창을 한명 정해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나다’는 조언이 인상깊었다.

공연 중간 중간 박 명창의 생전 영상도 볼 수 있었다. 무척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생전 인터뷰에서 박 명창은 ‘스승(박록주 명창)을 생각해 지성스럽게 흥보가를 불렀다’고 말했다. ‘지성스럽다’는 요즘 구어체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표현이다. 고풍스럽고 신선하게 들렸다. 옛어른들의 언어야말로 한국어의 보물창고 아닐까.

박송희 명창 하면 단가 <인생백년>을 빼놓을 수 없다. 박 명창의 스승 박록주 명창이 생전 남긴 유서 격의 글에 박 명창이 직접 곡을 붙인 노래다. 인생의 무상함과 예인의 내면세계를 담았다. 이번 공연에서 채 명창은 <인생백년>과 <춘향가> 중 ‘오리정 이별 대목’을 들려줬다.

유영애 명창(맨 앞줄 왼쪽)과 채수정 명창

전라북도 무형무화재인 유영애 명창은 <심청가> 중 ‘심봉사 황성 잔치 올라가는 대목’을 선보였다. 유 명창의 소리를 들으며 소리한 시간이 쌓일수록 더 농익고 듣기 좋아지는 게 판소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봉사를 두고 젊은 소경과 달아난 뺑덕어멈의 사연을 들으면서 왠지 뺑덕어멈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됐다. 결혼생활 관련 여성들의 고민이 많이 올라오는 레몬테라스 같은 커뮤니티에 뺑덕어멈이 글을 올린다면, 뺑덕어멈을 편드는 댓글이 많을까 심봉사에게 돌아가라는 충고 댓글이 많이 달릴까.

거문고 합주(‘낙음류수’)나 가야금병창(<흥보자> 중 ‘제비노정기’) 역시 귀가 즐거운 연주였다. 소리 뿐 아니라 사제간의 정(情)을 느낄 수 있어서였을까, 11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재미있는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