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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五 의원 최초 공개 - 李明博 대통령 만들기 12년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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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在五 의원 최초 공개 - 李明博 대통령 만들기 12년 
  
『1996년「대통령 하라」고 권한 후「이명박 대통령」의 꿈 버린 적 없다』 
   
 『아직은 내가 할 역할 남아 있다. 앞으로도 쓴소리, 할 말은 하겠다』

 

(월간조선 2007년 2월호)

 

●『李明博 당선자는 지극히 낙천적인 분이에요. 안 되는 건 쉽게 잊어버려요. 거기 매달려서 미련을 갖거나 하지 않아요』
●『내 포지션은 언제나 左와 右 가운데 右였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어렵고, 일방적 對北 퍼주기는 곤란합니다』
●『한반도대운하 건설은 단순한 토목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틀을 새로 짜는 대한민국 개조사업』

 

李在五
1945년 경북 영양 출생. 영양中·高 졸업. 중앙大 경제학과 졸업. 장훈高·대성高·송곡女高 교사, 민통련 민주통일위원회 위원장.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5차례 투옥, 민중당 사무총장, 15·16·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총무·사무총장·원내대표·최고위원 역임. 現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특위 한반도대운하TF 상임고문.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23평 단독주택에 17년 거주
 
 
 李會昌(이회창)씨가 한나라당 총재로 있던 시절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李在五(이재오) 한나라당 의원 집을 방문했다. 李 前 총재는 정치인의 개인집 방문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총재와 원내총무로서 호흡을 맞춘 사이였다. 李의원의 집을 방문한 후 집을 나서며 李 前 총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李在五 의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제야 알았다』
 
  李 前 총재가 말한 「李在五의 힘」이란 청빈함이었다.
 
  재야 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李의원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 역촌동, 불광동 단칸방을 전전하며 세를 살았다. 1990년에 가진 돈 850만원에 2000만원을 대출받아 구산동에 23평짜리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3選(선)의 국회의원인 그는 지금까지 그곳에 살고 있다. 욕실에는 욕조가 없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승용차는 중고 소나타다.
 
  그가 원내총무 시절 부패방지법과 돈세탁방지법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 李在五. 그래서 그는 강하고 용감하다. 강하고 용감해서 오해도 많이 받고 욕도 많이 먹지만 그 강하고 용감함을 밑천 삼은 李의원의 저돌적 돌파력은 李明博(이명박)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당선자로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韓日회담 반대 시위 때 李明博과 조우
  
대통령 선거 유세 마지막 날인 2007년 12월18일 서울 신촌현대백화점 앞 李明博 대통령 후보 연설회에서 李후보와 함께 승리의 V자를 그리고 있는 李의원.

  해방둥이인 그는 1941년생인 李당선자보다 네 살 아래다. 李의원은 李당선자를 『형님』으로 호칭한다. 두 사람은 이른바 6·3 사태로 불리는 1964년 韓日회담 반대 데모 때 고려大 학생 대표와 중앙大 학생 대표로 처음 만났다.
 
  李당선자는 韓日회담 반대 데모 주동으로 6개월의 실형을 살았고, 李의원은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그 뒤 李당선자는 기업인의 길을 걸었고, 李의원은 교사의 길을 걷다가 5차례 10년간의 감옥생할을 하며 反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92년 李당선자가 6·3동지회 회장을 맡으면서다. 李의원은 당시 부회장을 맡았다. 회장과 부회장으로 다시 만났지만 지금과 같은 두 사람의 밀접한 교류는 없었다. 李당선자는 당시 여당의 14대 국회의원 신분이었고, 李의원은 진보적 성향의 야당인 민중당을 창당, 14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본격적인 교류는 15대 국회가 개원한 1996년부터였다. 李당선자는 신한국당(한나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李의원은 같은 당 소속으로 서울 은평 乙(을) 지역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李의원은 15대 국회에서 만난 李당선자에게 대통령 출마를 권유한다. 李당선자의 경부운하 건설 제안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李당선자는 1996년 7월 對정부 질문을 통해서 국토개조를 위한 어젠다로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한다. 다음은 그 제안의 일부 내용이다.
 
  <한계에 달한 철도·도로 수송 능력으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LA 간 해상운송비보다 높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느냐. 지금도 교통체증으로 연간 13조원이 넘는 경제손실이 발생하고, 매년 2조원씩 늘어나고 있다. 경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고, 유지 보수비가 필요하지 않다. 운하는 관광·레저 산업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一石三鳥(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를 만들어놓고 말 것이다>
 
 
  『형님, 대통령 하쇼』
 
  李의원은 李당선자가 운하 건설을 제안할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15대 국회에서 다시 만난 李明博 당선자가 운하에 대해서 주욱 설명을 하더라고요. 그때 제 머리에 스치는 영감이, 「이거다. 나라를 다시 한 번 바꾸는 길은 운하 건설이다. 운하라는 것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나라 전반을 새롭게 한 번 정리하고 가는 거다. 바로 이거다」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 대통령 하쇼」 그랬죠. 그러니까 당선자께서 「어, 뭐라고?」 해서 제가 다시 「형님은 국회의원 해 가지고는 평생 그 일 못 합니다. 내가 볼 때는 형님 체질이 국회의원 체질도 아니고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을 해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 테니까 형님은 대통령 하쇼」 그랬죠』
 
  李의원은 그때부터 「李明博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본격적인 출발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였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李당선자를 돕기 위해 李의원은 2002년 5월 한나라당 원내총무 임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당시 李明博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이때 그의 조직 장악 능력과 저돌적 돌파력은 「李明博 서울시장 당선」의 밑거름이 됐다.
 
  李의원의 저돌적 돌파력이 李당선자의 서울시장 당선과 대통령 당선에 밑거름이 됐지만, 서울시장 당선 당시와 대통령 당선 직후의 李의원이 처한 상황은 약간 다르다.
 
  李明博 당선자가 서울시장에 당선됐을 때 李의원은 서울시장직무 인수위원장을 맡아 청계천복원사업, 강남북균형개발사업 등 李당선자의 공약이행 작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지난 1월5일 문경새재에서 열린 한반도대운하 성공기원 등반 겸 출판기념회에서 李의원이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러시아 특사로 임명받아
 
  李당선자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는 大選(대선) 과정에서 후보 경선을 벌였던 朴槿惠(박근혜) 前 대표 측과의 갈등으로 최고위원직까지 내던지며 다짐했던 「土衣從軍」(토의종군: 옷에 흙이 묻을 정도로 몸을 낮추겠다는 조어)의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자의 반 타의 반」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었다.
 
  그가 역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李明博 정부의 최대 공약 사업이 될 한반도대운하 사업에 관여하게 됐고, 李당선자의 러시아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현재 李의원이 맡고 있는 공식 직함은 「한반도대운하 TF 상임고문」이다.
 
  지난 1월4일 오전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李在五 의원의 지구당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李의원은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자전거로 지역구를 한 바퀴 돌고 왔다고 한다. 사무실 책장에는 「경제학 원론」, 「신경제학개론」 같은 경제 관련 서적과 「한국대통령학 & 대권 시나리오」, 「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 등 대통령 관련 서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신간회 연구」 같은 서적들도 눈길을 끌었다.
 
  기자의 눈에는 「딱딱해 보이는」 책들이 빼곡한 책장을 뒤로 하고 자리에 앉은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보름 이상이 지났지만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가끔 「오늘은 나가서 뭘 해명해야 되지? 또 뭐가 터졌지?」 그 생각하다가 「아, 선거 끝났지」 하면서 깜짝 놀라곤 한다』고 했다.
 
  ―요즘 여의도에는 「土衣從軍」 자세를 계속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안 가시는 겁니까.
 
  『선거법상,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의정활동 보고서를 돌릴 수 있는 기간이 1월9일까지입니다. 출판기념회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에 9일까지 의원들의 출판기념회 러시죠. 다른 국회의원들 모두 저처럼 지역구에서 바쁘게 뛰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내일(1월5일) 문경새재에서 등반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군요.
 
  『선거법 관련도 있지만 한반도대운하 가운데 경부운하의 최대 난코스가 그곳입니다. 충주에서 문경까지를 연결하는 조령터널이 만들어질 곳이죠. 한반도대운하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곳을 걸어서 문경새재를 넘는 거죠. 출판기념회라기보다는 한반도대운하 성공 기원제의 의미가 강하죠』
 
 
  『한반도대운하 건설은 당위』
   
  李在五 의원은 한반도대운하 TF 상임고문이라는 직책 때문인지 운하 관련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 했다.
 
  ―張錫孝(장석효) 한반도대운하 TF 팀장은 최근 내년 2월에 영산강운하부터 착공하겠다고 했습니다. 李당선자는 선거기간 중 영산강을 탐사한 후에 수질 개선이 더 시급하다고 했는데, 영산강은 운하 건설과 수질 개선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겁니까.
 
  『저도 영산강에 배를 타고 가봤는데 물이 너무 썩었어요. 수질 개선과 운하 건설이 동시에 이루어져야겠죠. 수질이 오염됐다고 하는 것은 강에 부식물이 너무 많다는 건데요. 이걸 걷어 내야 하는데 영산강 운하 건설은 배가 다니는 강폭만 준설하는 게 아니고 주변 강둑 전체 바닥에 있는 부식물을 다 걷어 내는 일입니다. 강을 한번 대청소한다고 보면 되죠. 대청소도 하고 원래의 물길을 복원하는 것이니까 환경을 오염시키는 게 아니라 환경을 살리는 거죠』
 
  ―京釜運河(경부운하)는 民資(민자)로 건설하고, 호남운하·충청운하는 국고로 건설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는데.
 
  『제가 운하가 건설될 현장들을 가보니까 경부운하 지역은 낙동강과 한강의 모래·자갈 채취량으로 공사비의 60% 이상은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40%는 민자를 유치하겠다는 것이죠. 호남운하·충청운하가 건설될 지역은 그냥 가만 내버려 두더라도 1년에 수해 같은 재난 방지, 예방, 복구비용이 운하 건설비용만큼 들어요. 그래서 국고로 하겠다는 거죠』
 
  ―요즘은 일부 여론조사에서 역전됐습니다만, 아직도 운하 건설에 부정적인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대운하 건설을 강행할 생각이십니까.
 
  『강행이라기보다는 해야 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운하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 환경적인 부분, 교통적인 부분 등 가운데 검토할 사항은 검토하고, 문제점은 끊임없이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반대를 설득하며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운하를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의 百年大計(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사업입니다. 훗날을 내다보고 하는 국가적 사업이기 때문에 반대가 있다고 해서 안 한다면 역사를 만들 수 없겠죠』
 
  ―한반도대운하 건설이 국가의 百年大計 차원이라면 더욱 반대자들을 충분히 설득하는 일이 먼저 아닙니까.
 
  『한반도대운하 같은 국가적 큰 사업을 하지 않고는 지금 우리나라의 크게 침체된 흐름을 바꿀 수 없어요. 治山治水(치산치수)라는 측면에서 안 할 수 없어요. 제가 2006년 큰 수재를 당한 강원도 인제에 가본 일이 있어요』
 
  李의원은 종이를 가져와 가로로 길게 네 개의 선을 그었다. 바깥쪽 두 개의 선은 옛날 물길이고 안쪽 두 개의 선은 현재의 물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바깥쪽 선을 펜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전국의 江을 治山治水 차원에서 복원하자는 것』
 
  『여기가 시멘트 둑이었는데 그 둑에는 1920년이라고 써 있었어요. 1920년경에는 이곳까지 물이 흐르니까 물이 넘치는 걸 막기 위해 시멘트로 둑을 쌓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서 보니까 강폭이 자꾸 좁아지면서 둑 안쪽으로 녹지가 생기고 나중에는 그곳에 주택까지 들어섰던 거예요.
 
  그러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 비가 한꺼번에 엄청나게 쏟아지니까 원래의 물길을 따라서 물이 흘렀고 그 안에 있던 집들이 몽땅 쓸려 나간 거예요. 지금 전국 강의 대부분이 그런 상황입니다. 운하 건설은 원래의 강둑을 살리고, 강 안쪽을 정비해서 원래의 강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상보다 비용이 훨씬 많이 드는 것 아닙니까.
 
  『얼핏 보기에는 지금 흐르고 있는 강 주변의 논이나 밭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하천부지였어요. 국가 땅이 대부분이니까 보상비가 많이 들지 않죠. 한강·낙동강·영산강·금강 전국 4대 강으로 흐르는 支川(지천)들도 농·공장 폐수가 그대로 흘러들어서 물이 썩은 곳이 많아요.
 
  이 支川에서 흐르는 물들을 하수관로를 통해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정수한 후 강으로 보내는 작업이 운하 건설과 함께 이루어질 겁니다. 원래의 강을 복원해서 생태오염과 수질오염을 방지해서 물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국의 강을 治山治水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이 운하 건설의 한 목적입니다』
 
  ―운하 건설은 환경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생태계를 복원하는 사업이라는 주장이신가요.
 
  『그렇죠. 이 물길을 따라서 매몰된 역사를 복원하고 문화재를 다시 발굴해 내면서 궁극적으로는 국토를 再창조하고, 再개조한다는 차원이지 단순히 수치로 물류량이 얼마냐, 하는 차원만은 아니라는 거죠. 부산에서 서울까지, 목포에서 광주까지, 부산에서 대전까지, 큰 운하길 주변에 있는 조그만 강들까지 연결되면 배를 타고 전국을 돌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운하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50년 후, 100년 후 우리 후손들에게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물려줄 수 있는 겁니다.
 
  우리 山河(산하)가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게 얼마나 볼 게 많아요. 그래서 운하를 건설해야 합니다. 단순히 물류차원으로만 운하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운하는 자원을 나르는 뱃길이 되기도 하지만 관광자원으로서도 기능하게 될 겁니다』
 
  ―한반도대운하 건설 주체가 대통령 직속 기구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저는 독립된 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사업을 위해 청계천복원추진사업본부를 만들었듯이 운하건설본부를 만들든지, 운하청을 만들든지 해서 운하 건설에 관련된 유관 기관들을 한 곳으로 통합해야죠』
 
  기자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李의원의 사상검증을 하자』고 했다. 李在五 의원은 웃으며 『제발, 이번 기회에 月刊朝鮮이 내 사상 좀 검증해 달라』고 했다.
  
李의원은 지지자들과 함께 추석연휴기간이었던 지난해 9월22~26일 한반도운하를 따라 조성될 자전거길 사전 탐방에 나섰다.

 
  『내 이념적 포지션은 원래부터 右』
 
  ―1990년 민중당 창당(초대 사무총장) 시 주역이었는데, 그때의 민중당과 지금의 민노당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민노당은 소위 「주사파」라고 하는 NL노선이 거의 주도권을 잡고 있죠. 그 당시의 민중당은 지금의 민노당 같은 이념적인 계급 노선보다 대중 노선의 길을 걸었어요. 상대적으로 당시의 다른 정당에 비해 좀 진보적으로 보였지만 북한이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죠. 지금의 민노당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진보적인 거죠』
 
  ―당시의 민중당을 진보정당으로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진보정당으로 볼 수도 있었겠지만 계급정당이나 이념정당은 아니었죠』
 
  ―2006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 때 재야활동 시절의 전력 때문에 상대방 진영으로부터 사상 공격을 당했는데, 李의원 스스로 보시기에 이념적 좌표를 左와 右로 갈랐을 때 李의원의 위치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원래부터 제 포지션은 右쪽입니다. 그러나 수구적인 보수는 아니죠. 저는 정말로 보수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보수가 건강하고 깨끗한 보수로 거듭나야 나라가 된다」는 믿음은 지금도 계속 갖고 있습니다. 제 노선은 부패하지 않은 자유민주주의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구적 입장을 견지했던 보수주의자들이 볼 때는 제가 진보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갖춘 사람들이 봤을 때는 제가 보수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거죠』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해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적은 있습니까.
 
  『저는 국가보안법 폐지는 어렵다고 봤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서로 상이한 체제가 존재하는 한 각기 자기 체제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국가보안법은 비록 상징적이기는 하더라도 대한민국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산물이니까 그걸 폐지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봤어요. 더구나 북한이 핵을 무장하고 있는 이 마당에는 폐지가 더 어렵죠. 다만 과거 권력유지를 위해서 활용되었던 점들은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죠』
 
 
  『햇볕정책은 운용이 잘못됐다』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金大中(김대중) 정부와 盧武鉉(노무현) 정부의 對北(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햇볕정책은 운용이 잘못됐어요. 햇볕을 쪼이면 옷의 단추를 풀어야 하는데 저 사람들은 햇볕을 쪼이면서 오히려 단추를 점점 더 잠갔어요. 핵을 만들고 미사일 실험한 게 그 예죠. 북한 측에서 1억원을 요구하면 1억원을 다 주어야 한다는 것이 金大中·盧武鉉 정권의 對北정책이죠.
 
  李明博 정부의 對北정책은 저들이 1억원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면 1000만원만 주고 나머지 9000만원은 개혁·개방을 통해 우리가 준 1000만원을 종자돈으로 해서 벌어서 쓰라는 식이 될 겁니다. 그래야 북한의 소득도 3000 달러가 되고 먹고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 항상 얻어먹기만 하면 북한은 지금의 상황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종자돈 정도는 민족의 이름으로 협력해줄 수 있지만 그것도 전제가 있습니다.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상호주의를 말씀하시는 거죠.
 
  『생산적 상호주의죠.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웃음)』
 
  ―金泳三(김영삼) 前 대통령의 권유로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하셨는데 민중당 하시다가 신한국당을 선택한 것은 당시 아주 의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의외였죠. 일부에서는 충격을 받았고요. 제가 민중당으로 14대 총선에 출마해 실패했잖아요. 선거하기 전에는 「진보적 정당이 있어야 한다. 진보적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어요. 그런데 막상 선거를 해보니까 정당 지지율이 3%도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충격을 받았죠. 「대중의 정치적 이해라고 하는 게 몇몇 사람이 의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중의 정치적 이해에 맞추는 것이 정치다. 어차피 정치를 하려면 제도권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당시 金泳三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들인 거죠』
 
  ―당시 야당도 있었는데 왜 하필 여당으로 가신 겁니까.
 
  『그때만 해도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 보수정당이었기 때문에 여당이든 야당이든 큰 의미는 안 두었어요. 당시 국민회의나 신한국당이나 노선에서 무슨 차이가 있었습니까』
 
  ―이념이나 노선의 변화 때문에 신한국당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원래 제가 진보적 이념이나 노선에 기울어 있던 사람은 아니니까요. 단지 제가 실현하려고 했던 자유민주주의의 폭을 더 깊고 넓게 만들고, 깨끗하고 정의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려면 그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들어가서 신한국당을 부패하지 않는 정당으로 만들어야 나라가 더 발전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거죠. 그런 점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南民戰 사건과 李在五
 
  기자가 「그만 사상검증을 마치겠다」고 하자, 李의원은 『南民戰 사건도 물어야지』 했다.
 
  南民戰 사건은 공안기관에 의해 「북한 공산집단의 對南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된 사건이다. 1979년 10월4일부터 11월까지 84명의 조직원이 구속됐다. 구속된 조직원들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받았다. 유신 말기 최대 공안사건으로 李在五 의원은 이 사건과 관련돼 감옥살이를 했다.
 
  李의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자신이 南民戰 사건에 연루된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저는 교사들 지하조직인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총책으로 잡혀 가 감옥에 있었어요. 10월 유신 말기에 안동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과 관련돼 구속돼 있었는데 「민투」라는 게 지하조직이다 보니까 그 일부가 지하조직인 南民戰에 가입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죠.
 
  10·26 사태가 발생한 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다 풀려났어요. 그런데 신군부가 우리를 다 내보내면 신군부 정권의 반대 세력만 키워 주는 게 되니까 우리 「민투」 조직을 느닷없이 南民戰 산하 조직으로 만들어서 잡아들인 거예요. 참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건데 그걸 계속 우려먹는 분들이 있어요. 그걸 일일이 해명할 수 없고 말이야(웃음)』
 
  화제는 자연스럽게 17대 大選 관련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번에 大選 투표율이 낮았는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국민들이 네거티브에 너무 시달렸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일 겁니다. 두 번째로는 「李明博이 다 되는데, 뭐」 하는 정서도 있었고, 정치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李의원께서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당선자가 광운大에서 강연했던 이른바 BBK 동영상이 공개되자 오히려 당선을 확신하셨다」고 했는데, 大選 기간 중 최대의 고비가 아니었습니까.
 
  『그때가 고비이긴 했는데 BBK 동영상이 터지기 전에 올라갔던 지지율에서 부동표가 5% 정도 빠져나갈 것으로 생각했어요. 한 40% 내외만 나와도 이긴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부동표만 떨어져 나가고 나머지는 오히려 더 결집할 것으로 봤죠. 여론 변화 추이를 보니까 예상대로였고, 「결집되는 표만 봐도 이기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인간 李明博
   
  ―「李明博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12년간 최측근으로 당선자를 곁에서 지켜봐 왔는데 가까이에서 본 인간 李明博은 어떤 분입니까.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에서 상당히 내공이 쌓여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내면의 깊이를 갖고 있어요. 쉽게 사람을 모았다가 쉽게 버리는 분이 아니에요. 한번 신뢰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지고 끝까지 같이 간다는 점이 아주 대단하죠.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멀리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런 점에 대해서 당선자는 관대해요. 자기가 불리해진다고 하더라도 「나와 함께했던 동지를 버릴 수 있겠느냐, 잊을 수 있겠느냐」 하는 따뜻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죠』
 
  ―너무 좋은 점만 이야기하시는데 흉도 좀 보시죠(웃음).
 
  『(웃음) 더 있어요. 당선자께서는 참을 줄 아는 분이에요. 저는 참지 못하는 사람인데 제가 당선자에게 배운 것은 참는 거예요. 참는 게 얻는 건데, 저는 싸워서 얻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죠. 물론 민주화를 이루는 데는 기여했다고 하지만 저는 싸워서 얻은 게 없어요. 대통령 당선자는 참아서 얻는 길을 걸었죠』
 
  ―당선자에게 1996년에 대통령 출마를 권유한 후 마음이 바뀐 적은 없습니까.
 
  『당선자는 기업을 통해서 산업화의 길을 걷다가 국회에 들어왔고, 저는 反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국회에 들어왔어요. 산업화의 길을 걷다가 국회에 들어온 李明博 당선자는 「국가를 어떻게 경영해야겠다」, 「나라의 富나 개인의 富를 어떻게 창출해야겠다」는 것에 대한 설계를 이미 갖고 있었어요. 저는 국회의원 되기 전날까지 反독재 민주화운동만 했던 사람이니까 「군사독재만 청산되면 금방 나라가 잘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고요.
 
  한반도운하에 대한 설명을 듣던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李明博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것에서 생각을 달리하거나 우회해 본 적이 없어요. 그날 이후 이번 大選까지 12년여 간 긴 세월 동안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중간에 「저 사람 말고 이 사람이 해야겠다」, 「저 사람 말고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당선자께서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 그만두고 미국에 가 있을 때든 언제든』
 
  ―당선자가 1998년에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떼게 됐는데, 그때는 어떤 말로 위로해 주셨습니까.
 
  『그때 제가 「국회의원 하나마나니까 오히려 잘됐습니다」, 「형님은 평생 국회의원만 할 사람 아니니까, 서울시장 준비나 하시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당선자도 「그래 뭐, 내가 국회의원 한 번 해봤으면 됐지, 뭐」 그러시더군요』
 
 
  『李明博은 과거를 버리니까 미래에 도전할 수 있어』
 
  ―당선자가 국회의원직 박탈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셨군요.
 
  『원래 그분이 지극히 낙천적인 분이에요. 안 되는 건 쉽게 잊어버려요. 거기 매달려서 미련을 갖거나 하지 않아요』
 
  ―그게 당선자의 건강 비결인 것 같네요.
 
  『건강 비결도 비결이지만 그런 성격이니까 꾸준히 도전할 수 있는 거예요. 과거에 미련을 갖거나 집착하는 사람은 미래에 도전 못 합니다. 과거를 버리는 사람만이 미래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李의원도 그런 성격입니까.
 
  『제 철학도 그래요. 과거를 과감하게 버려야 미래에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거지, 과거에 연연해 있으면 미래에 도전 못 하는 겁니다. 잘못된 역사는 잘못된 역사대로 역사가 기록하는 것이지 개인이 기록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군사독재 시절의 폐해는 역사로 기록돼야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 시절에 탄압받았다는 기억을 버렸어요』
 
 
  『나도 과거를 빨리 잊는 사람』
   
  ―朴槿惠(박근혜) 前 대표와는 李의원이 유신 시절 겪은 고난 때문에 사이가 안 좋다고 하는 분들이 있던데.
 
  『전혀 아닙니다. 저는 제 마음속에 李明博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때문에 李明博과 반대되는 사람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빨리 잊는 사람이에요』
 
  ―왜 초지일관 「李明博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지난 민주화 시절에는 민주화를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어요. 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군사독재가 끝나야 된다고 생각해서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봤죠. 하지만 이 시기에는 李明博 같은 국가경영에 철학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하고 그 사람을 대통령 만드는 길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1996년 李明博 당선자로부터 운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또 운하에 대한 이야기나 청계천에 대한 이야기나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한 일관성이 없었다면 저는 지지를 안 했겠죠. 국가의 먼 미래를 위해서 뭔가를 이루어 내려는 자기 철학의 일관성, 자기 생각의 일관성, 큰 흐름에 대해서 당선자가 보여 준 변함 없는 일관성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게 정치인의 덕목이잖아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던질 줄 아는 것도 정치인의 덕목입니다』
 
  ―당선자가 우는 모습을 본 적 있습니까.
 
  『어머니 생각할 때 눈물짓곤 하시죠. 당선자께서 소년 시절에 어머니가 들려 주신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흘리시죠.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요』
 
  ―두 분 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는데 누가 더 어려웠습니까.
 
  『제가 늘 그러죠. 「형님은 그래도 아이스케이크 팔 데라도 있었지만 영양 산골에서 뭐 팔 데도 없고 매일 칡뿌리 캐먹었다. 형님은 어려서 돈이라도 만져 봤지만 나는 돈 한 푼 못 만져 보고 산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더 어려웠다」고 말하죠(웃음)』
 
  ―당선자와 의견 차이로 말다툼한 적은 없습니까.
 
  『지금까지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의견 충돌로 싸운 적은 없어요. 그게 좀 특이한 거죠. 대개 제 주장을 펴다가도 당선자가 말하면 제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편이죠. 또 당선자가 이야기를 하다가 제 말이 맞으면 당선자가 「그 말도 맞다」하고 받아들이죠. 지금까지 대화를 통해서 의견을 조정해 왔어요』
 
  ―李의원께서 생각하시는 당선자 용인술의 특징은 어떤 겁니까.
 
 
  李明博, 사람 위해 자리 안 만든다
   
  『사람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사람을 쓰는 게 특징이죠. 아무리 가깝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이 맞지 않다 싶으면 뒤로 물러나게 하죠. 그러다가 일할 시기가 오면 그 사람을 데려다 쓰시죠』
 
  李在五 의원은 2006년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했었다. 2006년 초 서울시장 출마 예상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선호인물 여론조사에서는 30.0%로 1위를 차지했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려다가 뜻을 접은 이유가 당내 조직이 약한 李당선자를 위해 원내대표 경선에 나서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랬죠. 당시 李明博 당선자는 당내 조직이 전무하다시피 했죠.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 정두언 의원 정도가 있었죠. 원내대표는 의원들을 총괄하니까 원내대표를 하는 것이 당 내외에 李明博 기반을 확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죠』
 
  ―당선자가 원내대표 출마를 부탁하신 겁니까.
 
  『부탁한 것은 아니고 저 스스로 판단한 거죠. 눈치를 보니까 그런 것 같아서(웃음)』
 
  ―당선된 이후에도 당선자를 만나면 『형님』이라고 부르십니까.
 
  『둘이 있을 때는 그렇죠. 둘이 있을 때는 다른 호칭을 사용한다는 게 거북하잖아요.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깍듯이 해야죠. 그것은 국가에 대한 예의니까요』
 
  ―BBK 특검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유명무실해지지 않겠습니까. 흐지부지되겠죠. 나올 게 뭐가 있어야죠. 검찰이 다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처음에는 BBK 특검을 반대했습니까.
 
  『우리로서는 그 내용은 염려하지 않는데, 단지 신당이 총선과 관련해서 정치 공세로 사용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했던 거죠』
 
 
  당선 축하금 나오면 법대로 처벌해야
  

  ―삼성특검 수사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이나 당선 축하금이 나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당선 축하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특검에서 나오면 그건 법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李의원은 2004년 5월 국회의원 40여 명과 함께 「국가발전전략연구회」를 조직했다. 「李明博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전초기지를 만든 셈이었다. 李의원은 지난해 12월26일 이 모임을 해체했다.
 
  ―국가발전전략연구회를 해체하면서 『43년간의 투쟁은 끝났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1964년 韓日회담 반대 학생운동에서 시작해서 2007년 12월19일 李明博 당선자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걸린 기간이 43년입니다. 그 기간 동안 저 스스로 「역사도 투쟁을 통해서 바꾸는 거고, 개인의 가치관도 투쟁을 통해서 형성돼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살았어요.
 
  저는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물론이고 한나라당에 들어와서 권력의 부정·부패와 투쟁을 해왔어요. 당내에서는 극보수 수구주의자들, 기득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적인 흐름과 싸웠어요. 이런 투쟁은 「제대로 된 정권 한번 세워 봐야겠다. 제대로 된 대통령 만들어 봐야겠다」 하는 제 마음속 의지와 같이 공존했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李明博 정부가 들어섰으니 투쟁을 멈추겠다는 의미였군요.
 
  『그렇죠. 우리가 李明博 대통령을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만든 정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또 그 정권의 성공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고를 긍정적이고 합리적으로 바꾸어야 하죠. 좀더 남을 배려하고 남을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고요. 「싸워서 이기는 시대는 끝났고, 섬겨서 이기는 시대로 철학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투쟁으로 점철됐던 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났다는 이야기죠』
 
  ―당내 서클인 국가발전전략연구회를 해체할 필요까지 있었습니까.
 
  『李明博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서 국가발전전략연구회라는 당내 최대 서클을 만들어 냈어요. 그렇기 때문에 李明博 정부가 출범한 후에 그 조직이 유지되면 또 다른 당내 기득권 세력이 될 수 있어요. 기득권 세력화하기 전에 해체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죠』
 
  ―스스로를 대통령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까.
 
  『(웃음) 난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李明博 대통령 당선자 주변 측근 중에는 벌써 권력을 다 가진 것처럼 말이나 행동을 한다는 비판을 받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런 분들을 불러다가 야단은 치십니까.
 
 
  권력을 감당할 준비 덜 된 경우 있어
 
  『저는 그분이 대통령 당선된 지 보름이 넘었는데도 긴가민가할 때가 있어요. 아직은 저부터 제정신을 덜 차렸다고 보면 돼요(웃음). 아주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한꺼번에 권력은 넘쳐나게 들어오고, 그 권력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는 아직까지 좀 덜 돼 있고, 그런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거죠. 그 자리를 잡아 가는 것이 당선자께서 말씀하셨던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낮은 자세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겠다」는 자세를 갖추는 거죠.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권력이 다가오니까 세상만사를 뭐든지 다 할 것 같고, 소리만 지르면 다 될 것 같은 기분이 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본질은 아니니까 넓은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면 좋겠어요. 결국은 李明博 정부 5년을 성공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할 겁니다』
 
 
  정계 은퇴 성명서 준비한 사연
  
李明博 대통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해 12월19일 밤 李당선자와 李의원이 청계천에서 만나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여론조사에서는 이겼지만, 한나라당 대의원 투표에서는 졌습니다. 黨心(당심)을 잡는 데는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李의원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대의원 투표에서 진 것은 아니죠. 국민참여 선거인단이라고 있었잖습니까. 그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데 우리가 오류를 범했습니다. 유권자의 연령비율대로 선거인단을 구성해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상대 후보의 지지율이 높았던 60代 이상 분들이 40% 이상을 차지했어요. 선거인단 투표에서 우리가 진 것이, 대의원 투표에서 진 것은 아니에요. 당시 오히려 우리가 확보한 지구당 수가 많았으니까요』
 
  ―경선 개표 전당대회를 하는 날(2007년 8월20일)은 아찔했겠습니다.
 
  『경선 행사장인 올림픽체조경기장에 가니까 오후 2시께였는데 「2000표를 지고 있다」고 그래요. 저는 졌다고 생각했어요. 행사장을 나와 여의도로 가면서 차 안에서 정계 은퇴 성명서를 썼어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12년여를 변함없이 李明博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서 나 자신을 바쳤고, 누가 봐도 이긴다고 했는데 졌다? 아, 이것은 내가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여기까지구나. 사람이 능력을 알았을 때 물러가는 것이 좋다. 그게 국민에게 피해를 덜 주는 거다. 정계를 은퇴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졌습니다…」 이렇게 주욱 써 내려 갔어요.
 
  여의도에 다 왔는데 경선 현장에서 전화가 왔어요. 「지금 한 800표 정도로 차이가 줄었는데 여론조사에서는 확실히 이겼느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여론조사에서는 이길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러면 잘 하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다시 돌아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차를 돌려서 경선 행사장으로 갔어요』
 
  李의원은 당시 상황이 연상되는 듯 말을 마치면서 『아이고』 했다.
 
  ―저희가 그날 오전에 들은 경찰이나 기업 등의 정보 보고로는 李明博 당선자가 이기는 것으로 다 나와 있었는데요.
 
  『그렇게 들려오는데 현장에서는 표가 안 나오잖아요(웃음). 정보는 전부 이긴다고 들려오는데 말이죠. 아이고(웃음)』
 
 
  『좌시하지 않겠다』 말한 적 없어
 
  ―우문이지만 한나라당 경선과 大選 본선 중 어떤 게 힘들었습니까.
 
  『경선이 힘들었죠. 본선이야 BBK 가지고 떠들다가 끝난 거고. 경선이 피 말리는 전쟁이었어요. 본선이야 솔직히 저희들이 엄살 좀 떤 거죠』
 
  ―경선이 끝난 후 경쟁자였던 朴槿惠 前 대표 측으로부터 「오만하다, 당화합의 걸림돌이다」 라는 소리를 들으셨는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경솔했던 것은 당 경선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걸 의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제게 권력의 힘이 엄청 모이는 것처럼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경선 전이나 경선 후나 똑같이 제 방식대로 일을 했어요. 상대방이 느끼기에는 경선 전의 제 위상과 경선 후의 제 위상이 차이가 있는데 과거와 똑같이 행동을 하니까 저를 오만하게 봤던 거죠. 제가 경선 직후 지금처럼 土衣從軍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으면 그런 소리 안 듣는 건데(웃음)』
 
  ―『朴측이 먼저 반성해야…』 등의 말 실수가 있었잖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언론에 제가 「朴측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도됐는데,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얘기했어요.
 
  「상생이라는 것은 해원상생이다. 서로 가지고 있는 원한을 풀어야 상생이 되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당선한 측에서나 패한 측에서 서로 반성해야 된다. 당선한 측에서도 너무한 게 없었는지 반성해야 되고, 패배한 측에서도 너무한 게 없었는지 반성해야 되고, 그 반성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화합을 해야 이게 마음적으로 화합이 되지 속으로는 욕하면서 겉으로 대세에 밀려서 화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금은 서로 반성할 시기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기사 제목을 「朴측이 먼저 반성해야」라고 해놓은 거예요. 그때 분위기는 무조건 나를 때릴 때니까 그래서 오해를 산 것 같아요』
 
 
  경선 후유증 오래갈 것
  
최고의원직에서 사퇴한 후 土衣從軍에 나선 李의원이 충남 서산군 동부시장을 찾아 상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좌시하지 않겠다』고 해서 朴대표로부터 『오만의 극치』라는 반격을 받고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났는데.
 
  『참 억울한 일 중 하나인데, 저는 朴대표 진영을 향해 「좌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우리 지구당 사무실을 찾아온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경선이 지난 지 60일이 됐다. 앞으로 본선이 40일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당이 무슨 일을 하느냐. 아무것도 안 하지 않느냐. 李明博 후보를 만들었으면 李明博 후보를 당선시켜야 하는데, 당선 시키려는 당의 흐름이 안 보이지 않지 않느냐. 당이 이렇게 가면 되겠느냐. 한쪽에선 매일 낙마할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 그러고, 한쪽에서는 필승 결의 대회하러 다니고, 한쪽에서는 등산 다니고… 이러한 당의 모습을 그냥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게 말이 되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신문기사는 「좌시하지 않겠다」로 나간 거예요』
 
  ―경선 기간이 너무 길지는 않습니까.
 
  『너무 길었어요』
 
  ―제도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보완할 필요가 있어요. 너무 진이 빠지고 골은 점점 깊어지고, 골이 깊은 만큼 메우는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경선 과정에서 양측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이번 한나라당 경선은 경선에서만 되면 본선은 된다고 하는 확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치열했던 거죠. 오만하게 말하면 신당에서 누가 나와도 이긴다고 봤기 때문에 사생결단한 거죠』
 
  ―후보 검증절차를 개선할 필요는 없다고 보십니까.
 
  『검증절차는 필요하죠. 다만 검증은 정책 검증을 하고 대통령이 되기에 정말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 있다든지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가 돼야지, 없는 것을 만들어서 퍼뜨리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되죠』
 
  ―경선 후유증은 언제쯤 사라질 것 같습니까.
 
  『지금 공천시기와 관련한 입장 차이가 그 후유증 가운데 하나죠. 쉽게 안 사라질 겁니다. 두고두고 치료해야죠. 아마 4월 총선이 끝나고도 상당히 오래갈 겁니다. 겉으로는 웃을 수 있겠지만 돌아서면 생각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어부지리 노리는 李會昌당 성공 못 해』
 
  ―李會昌 前 총재 출마는 예상하셨습니까.
 
  『저는 전혀 예상 못 했어요. 출마 선언 일주일 전에도 만났어요. 제가 상임 고문을 해달라고 할 때 본인께서 「나는 뒤에서 돕겠다」 해서 믿었어요』
 
  ―李會昌 당은 성공할 것 같습니까.
 
  『역사상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한 당이 성공한 예가 없어요』
 
  ―李慶淑(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임명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반대했다기보다는 문제를 지적한 거죠. 李慶淑 위원장 개인은 제가 잘 알죠. 李위원장이 1980년에 국보위 입법위원 한 것을 우리가 숨기고 넘어갔다가 만일 언론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면 진짜 우리는 오만하게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부에서 충분히 지적하고 거르면서 「과거를 넘어 능력을 중시해서 하자」 하는 데 동의가 이루어지면 그건 우리가 함께 극복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 문제점을 지적한 거죠. 당선자 주변에서 당선에 취해서 그런 문제점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 자체가 이미 문제가 되죠』
 
  ―당선자는 대학총장들만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웃음) 총장만 좋아하는 게 아니고 주변에 친한 사람들이 그렇게 된 거죠. 서울시장 시절이나 국회 정치 휴지기에 주로 총장들과 교류했죠. 그분들이 지금이야 총장이지만 전에는 총장이었나요. 그랬을 때부터 아는 분들이죠』
 
  ―당선자는 고려大 행사만 있으면 꼭 참석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려大만 너무 챙긴다는 소리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저는 이해가 갑니다. 당선자는 고려大를 정말 어렵게 다녔잖아요.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을 하면서 苦學(고학)했고, 학생운동하다가 6개월 동안 감옥살이도 했고. 그래서 그 대학 시절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편안하게 대학생활을 한 사람보다 대학 시절의 추억이 더 애틋할 수밖에 없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중앙大에 1964년에 들어가서 1965년에 제적이 되고, 1994년에 복학이 돼서 1996년에 입학 32년 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감옥에 가 있을 때 꿈만 꿨다 하면 대학에 가 있어요. 어떤 수를 내서라도 모교에 복학해서 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니까 학교 시절을 그렇게 거친 사람들은 모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깊죠. 자신의 젊은 시절에 고난의 역사를 함께했던 곳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당선자는 모교에 대한 애정이 남들보다 깊을 거예요』
 
  ―곧 組閣(조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조언은 하실 생각입니까.
 
  李의원은 기자의 취재수첩에 직접 논어에 나오는 「不在其位(부재기위) 不謀其政(불모기정)」이란 한자를 적어 주며 말했다.
 
  『저는 土衣從軍 중이에요. 논어에 보면 「不在其位는 不謀其政」이란 말이 있어요. 자기가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政事(정사)를 모의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제가 組閣에 대해서 조언할 위치에 있지 않은데 건방지게 그것을 논의하는 데 끼어들면 안 되죠』
 
 
  공천시기는 대통령 취임 이후로 해야
 
  ―공천시기 갈등은 어떻게 풀어 가야 하겠습니까.
 
  『그건 뭐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공천을 1월에 하느냐, 2월에 하느냐 하는 것이 물론 의미는 있습니다만, 이번 총선의 의미는 한나라당으로서는 李明博 정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원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첫째입니다.
 
  원내 과반 의석을 확보하려면 국민들이 李明博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을 때 해야 되잖아요. 취임하고 난 다음에 李明博 정부의 청사진이 나오고 나면 「아, 국민들이 저 청사진을 위해서라도 李明博 정부를 안정되게 만들어 줘야 하겠구나」 했을 때 과반수 의석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지, 지금 공천해서 명함 들고 지역에 가서 표 달라고 하면 인물의 대비만 되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죠. 李明博 브랜드로 선거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공천을 먼저 하고 늦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총선에 출마하려는 공직자들은 선거 60일 전에 사표를 내야 되는데, 영입하고 싶은 경험 있는 경제 관료들이나 자치단체장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사표를 내야죠. 그렇다고 우리가 공천 줄 테니까 사표 내라는 소리는 못 하죠. 어느 누구도 그건 보장 못 하죠. 기초자치단체장 같은 분들이 총선 출마를 원하면 공천 심사할 때 불이익을 당하는 수밖에 없어요. 구청장 하라고 뽑아 주었더니 임기가 반이나 남았는데 그만하겠다고 하면 안 되죠』
 
 
  공천의 기준은 당선 가능성, 시대적 요구
  

  ―공천의 기준은 정해져 있습니까.
 
  『두 가지죠. 첫째는 당선 가능성이고, 둘째는 시대적 요구에 맞느냐, 안 맞느냐죠』
 
  ―지금 시대는 어떤 인물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 시대의 요구라는 것이 변화, 창조, 새로움 그런 것이죠』
 
  ―7월 전당대회에서는 당권에 도전할 겁니까.
 
  『그건 그때 가봐야 압니다. 정치라는 게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최근에 『앞으로 당내에서나 정부에서나 李在五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게 노력해야죠.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쓴소리를 안 하고 할 말을 안 한다는 건 아닙니다』
 
  계속되는 정치 이야기에 李의원은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별명은「이사도라」
 
  ―별명이 「이사도라」라고 돼 있던데 현대무용가 이사도라 던컨과 관계 있는 별명입니까.
 
  『그건 아니고, 하도 많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에요. 사방팔방으로, 이쪽저쪽으로 하도 많이 지역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거죠』
 
  ―지금도 한 끼 5000원짜리 식사를 하십니까.
 
  『대개 설렁탕 한 그릇으로 때우죠. 남들을 대접하거나 대접받을 때는 꼭 그렇게 지켜지지는 않아요』
 
  ―大選 때문에 중고 소나타에서 카니발 승합차로 바꾸셨는데, 카니발도 중고입니까.
 
  『4월 총선 때까지 렌트한 거예요. 소나타는 우리 집사람한테 팔고(웃음)』
 
  ―지금까지 구산동 23평짜리 단독 주택에 사는데, 경제적으로 너무 무능한 것 아닙니까.
 
  『무능하죠. 거기는 땅값이 안 올라가요』
 
  ―돈 안 벌어온다고 부인에게서 혼 안 났습니까.
 
  『이제는 혼 안 나요(웃음)』
 
  李在五 의원은 1996년 12월26일 국회에서 벌어진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사건 이후 가슴에 달린 금배지를 떼어 버렸다.
 
  ―국회의원 배지는 지금도 달지 않습니까.
 
  『네』
 
  ―앞으로 계속 달고 다니지 않으실 겁니까.
 
  『제가 국회의원 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될 때 다시 달아야죠』
 
  ―이제는 잘 했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좀더 잘해야죠』
 
  ―만약 정치를 그만둔다면 무얼 하고 싶으십니까.
 
  『촌에 가서 살아야죠. 저는 정치를 그만두면 정치권에 얼씬거리지 않을 겁니다. 제 역할이 끝나면 자연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직 하실 역할이 있다는 말씀이죠.
 
  『아직은 역할이 좀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내 역할이 끝났다」 싶을 때 물러나지, 누구한테 떠밀려서 물러나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은 제가 할 역할이 남아 있습니다』
 
  그에게 아직 남은 역할이 무엇인지 물었다. 李의원은 미소만 지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방을 나왔을 때 지구당 사무실은 내방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입력 : 200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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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의 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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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천 (2017-09-14)   

    이재오, 전향서는 50043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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