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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 李明博의 大도박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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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 李明博의 大도박 
 
청계천 복원에 이어 京釜운하 건설 주장  
   
 『大權후보는 5년 후에 필요한 인재이지 지금 필요한 인재가 아니다』

●『기업인으로서 故 鄭周永 회장 여전히 존경, 정주영은 「난 사람」』
●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서 YS가 직접 사퇴 압력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火葬場)으로 시장 공관 옮길 생각 없다』
● 1990년 방영 KBS 주말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鄭회장과의 사이 금 가기 시작
●『뒤로 물러서는 것은 싫다』
●『現代는 金大中과 金正日 사이에 끼어 희생됐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魔力을 지닌 사람
  
 기자는 李明博(이명박·62) 서울시장과 한 달여에 걸쳐 네 번 만났다. 두 번의 인터뷰를 비롯해 市政(시정)활동 수행, 시장 공관 방문 등을 통해 그를 가까이서 보기도 하고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도 했다. 과거 현대건설 시절에 李시장과 함께 일한 동료, 현재 李시장과 함께 일하는 서울시 공무원, 대학 동창 등 주변 인물들도 만났다. 인간 李明博의 참모습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주변 인물들은 李明博을 「정직하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千信一·천신일·60·세중 회장·고려대 동문), 「운이 따르는 사람」(鄭斗彦·정두언·46·서울시 정무부시장), 「슈퍼맨」(金光明·김광명·63·前 현대건설 해외담당 사장) 등으로 평가했다.
 
  기자가 갖고 있는 李明博 시장에 대한 기존 이미지는 뚝심과 저돌성이었다. 덧붙여 그의 이름과 늘 동반하는 「神話(신화)」라는 말이 주는 畏敬(외경)도 갖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에게서 친숙한 인간미를 느끼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 서른다섯이란 나이에 대기업의 사장이 됨으로써 그의 생활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통사람들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빠른 출세가 가져다준 부산물일 것이다.
 
  그에게서는 魅力(매력)보다는 魔力(마력)이 느껴졌고, 그 魔力이 그의 魅力이었다. 서울시민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은 잔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라 강한 추진력을 가진 시장일 것이다. 지금 李明博 시장에게는 魅力보다 魔力이 더 필요하고, 누구보다도 그 점을 본인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李시장은 감성에 호소하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것보다는 정책과 그 정책의 집행으로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듯하다. 그는 태생적으로 일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사람인 것이다.
   
  2만5000상점, 상인 20만 명이 영향받는 大役事
 
  李明博 시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 7월2일 아침이었다. 혜화동에 있는 시장 공관에서 만나 간단한 인터뷰를 한 후 함께 전철을 타고 출근하기로 했다.
 
  7월2일 오전 6시50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소재 서울시장 공관 접견실 탁자 위에는 서울시 회의자료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집에까지 갖고 오는 모양이었다. 하루 전인 7월1일은 그가 서울시장 취임 1주년을 맞은 날이다. 접견실에는 취임 1주년을 축하하는 화분과 꽃바구니가 몇 개 놓여 있었다. 李시장에게는 7월1일이 취임 1주년이라는 의미보다는 청계천 복원의 첫 삽을 뜬 날이라는 데 더 의의가 있을 것이다.
 
  李明博 시장은 청계천 복원 기공식 하루 전날인 6월30일 밤 12시에 청계천 현장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거침없이 피력하는 李시장이지만 청계천 복원 사업이 주는 심리적인 압박감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부인 金潤玉(김윤옥·56) 여사와 李시장이 나란히 접견실로 나왔다. 다소곳이 앉아 있던 金여사는 기자와 李시장의 인터뷰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어제 오후 2시에 청계천 복원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취임 후 1년여의 준비 끝에 기공식이 열렸는데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청계천 복원 공사는 교통 문제 등으로 수도권 전체에 영향을 주는 사업입니다. 수도권 인구가 2000만 명이면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에게 영향을 주는 일인데도 많은 국민들이 청계천 복원을 당위로 여기게 된 게 우선 기쁩니다. 게다가 청계천 주변 상인들 문제도 어느 정도 정리가 돼 가고 있구요. 어제 나도 출근 시간에 거리에 나가 보니까 일부에서 우려하던 교통대란은 없었고 원활하게 소통이 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근래에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못 보다가 청계천 복원 사업을 계기로 직접 보게 되니까 기뻤어요』
 
  ―지금까지야 서울 시민들 입장에서는 당장 교통혼잡 등의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니까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앞으로 공사가 본격화하면 교통혼잡 등을 직접 느끼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반대 입장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동안 청계천 고가 보수나, 성수대교 등 도심 교통 흐름에 치명적 영향을 주는 프로젝트를 사전에 이만큼 준비한 적이 없어요. 저는 크게 걱정 안 해요』
 
  「잠재적」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李明博 시장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당의 차기 리더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기를 꿈꾸는 「대통령 후보군」에게 서울 시장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지금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지도자로서의 검증대 위에 서 있다. 청계천 복원은 그 검증대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검토 단계에서부터 그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다. 복원 사업으로 인한 서울 시내의 교통 대란 유발 가능성, 2만5000여 개의 상점과 20만여 명에 달하는 상인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사업장 이전 문제, 청계천 주변 노점상들의 반발 등 수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개발이라는 데 동의를 하면서도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들이다.
 
  李明博 시장은 이런 난제들을 헤쳐 가면서 청계천 복원사업을 벌여야 한다. 청계천 복원에 몰린 世人들의 관심이 성공 여부는 물론이고, 성공할 경우 李시장의 行步(행보)에 쏠리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市예산 3700여억원이 소요되는 청계천 복원은 계획대로라면 공사 시작 2년2개월여 후인 2005년 9월에 끝난다. 大權(대권)이라는 큰 꿈을 가진 정치인들이 서서히 움직여야 할 시기고, 국민들 역시 차기 주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이다.
 
  기자와 네 번 만나는 동안 李시장은 자신의 「정치적 꿈」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인터뷰 내내 지루할 정도로 그의 표정은 똑같았다. 간혹 웃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날카롭고 단단해 보이는 李시장의 속마음을 헤집고 들어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李明博 시장이었지만 시민들 앞에서는 달랐다. 시민들 앞에서는 자주 웃음을 보였고 적당한 유머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李시장의 그런 모습을 처음 만난 것은 매주 토요일 정오 서울시청 외국인투자상담실에서 열리는 「안녕하세요! 이명박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다.
 
  「안녕하세요! 이명박입니다」는 서울시의 민원인들과 시장이 직접 만나 민원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 시간이다. 李시장이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지난 6월7일에는 관악구 청사 신축과 관련돼 주택철거에 반대하는 주민들과의 대화 등 두 건의 시민과의 대화가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李시장은 민원인들의 불만을 시종 미소로 받아 주었다. 그 자리에서 민원인들의 민원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원인들은 대화가 끝나자 시작할 때와 달리 대체로 밝은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5년 후에 필요한 인재와 지금 필요한 인재는 다르다』
 
  서울시장 공관에서의 인터뷰는 이른 아침이라는 시간적 배경 때문에 기상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어졌다.
 
  ―어느 인터뷰에서 매일 4시45분경에 일어난다고 하셨던데 좀더 자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없습니까.
 
  『평생의 습관이에요. 내가 현대에 있을 때 아침 7시면 회의를 하니까 27년 동안 그게 습관이었어요. 대학에 다닐 때는 이태원에서 환경미화원을 4년 동안 했는데 그때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바로 시장에 들어가서 청소해야 하니까 일찍 일어나야 했거든요. 야간 상고를 다닐 때도 장사를 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장사 준비를 했고요. 어제도 청계천 현장을 둘러보고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어나는 시간은 똑같아요. 습관이 됐으니까』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그런 거는 없어요. 나는 낮잠을 못 자요. 쉬는 날에도 낮잠을 안 자는데, 대신 차만 타면 자요. 10분 거리라도 차를 타면 푹 자요. 그런데 이상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때만 되면 그 직전에 깨어나 말똥말똥해져요. 외국에 나갈 때도 나는 시차에 상관없이 그 나라 아침 시간에 깨요. 내가 생각해도 내 체질이 특이해요』
 
  ―한나라당 대표로 崔秉烈씨가 당선됐는데 한나당 당원으로서 崔秉烈 체제가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보십니까.
 
  『최병렬씨는 강하면서도 현실적인 분이니까 내년 총선 때까지 잘 끌고 나갈 것이라고 봐요』
 
  ―崔대표가 당선 직후 차기 대권 후보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2005년이면 차기 대권 후보가 등장하게 될 것이고 나이는 45세에서 55세 사이가 적당하다는 기준도 제시했는데요.
 
  『차기 대권 후보를 최병렬 대표가 언급할 일은 아니죠. 국민이 선택할 문제죠. 차기 대권 후보는 5년 후에 필요한 인재이지 지금 필요한 인재가 아니잖아요. 앞으로 더 두고 봐야죠』
 
  시장 공관에서의 인터뷰가 끝난 후 우리는 4호선 혜화역으로 향했다. 서울 시장 공관에서는 4호선 삼선역이 더 가깝다.
 
  ―삼선역이 가까운데 왜 혜화역으로 가십니까.
 
  『나는 뒤로 물러서는 게 싫어요(웃음)』
 
  지하철역 수로 볼 때 李시장의 최종 목적지인 시청역에서는 혜화역이 가깝다. 공관을 나서며 李시장이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 중앙일보 김상택이 만평 봤어?』
 
  7월2일자 중앙일보 김상택 만평은 청계고가도로 철거장면과 함께 『복원 성공하면 대선 출마할 거죠』 하는 대사가 실려 있었다. 물론 그 대사는 李시장에 대한 말이다.
 
  『그 친구는 말야, 내가 서울 시장 출마할 때도 대선 출마와 연결 짓더니, 또 그러네』
 
  ―서울 시장이라는 자리를 대권 도전과 연결시키는 것은 항상 있어 온 일인데요.
 
  『그런가, 그런데 지금이 그런 일에 신경 쓸 땐가요?』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자 마침 바르게 살기운동협의회 등에서 대중교통 이용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친숙한 얼굴들인 듯 안부를 나눴다.
 
  한 아주머니에게 李시장이 『더 예뻐지셨네요』 하자, 그 아주머니는 『마르신 것 같아요』라고 받았다. 곁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李시장 대신 대답을 한다.
 
  『걱정이 많아서 그래』
 
  李明博 시장 일행은 동대문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1호선 전철을 타자 李시장을 알아본 시민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李시장은 『고맙다』면서도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李시장보다 지하철 승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자동차 10부제는 안 합니까.
 
  李시장은 준비했다는 듯이 승객의 질문에 답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이렇게 요일제를 하려고 합니다. 시민 스스로 이번 요일에는 차를 운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요일에 맞는 스티커를 차에 부착하도록 하는 거죠. 강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스스로 지키도록 하자는 거죠. 정부에서 10부제, 5부제 하는 것은 강제적이지만 저는 높아진 시민의식이 자발적 참여를 가능케 하리라고 봅니다』
 
  기자가 물었다.
 
  ―시민의식에만 맡겨서 과연 될까요.
 
  『요일제에 참여하면 자동차세를 10% 줄여 주겠다든지 하는 인센티브도 생각 중입니다. 좋은 일에는 인센티브를 줘야 해요』
 
  李明博 시장은 움직이면서도 끊임없이 市政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있었다.
  李明博 시장과의 격식 갖춘 첫 인터뷰는 6월4일 오후 4시에 서울시장 접견실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盧武鉉 정부 들어서 처음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셨죠? 소감이 어떻습니까.
 
  『글쎄, 국무회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더라구요』
 
  ―어떤 점이 달라졌습니까.
 
  『장관들이 자기 소관의 업무가 아닌데도 한 마디씩 하는 분위기는 돼 있어요』
 
 
  『盧대통령의 전폭적 지지에 놀랐다』
 
  ―盧武鉉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도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겠다고 했는데 그런 점들이 역력하게 느껴집니까.
 
  『한 번 가서 뭐 역력히 느껴진다고 할 수는 없죠. 과거에는 국무회의가 차관회의에서 다 합의가 되면 의례적으로 통과시키는 기능이 많았어요. 그렇게 형식적으로 짜인 회의였는데, 내가 이번에 보니까 컴퓨터도 자리 앞에다 놓고, 사실 컴퓨터를 갖다 놓은 것, 그거는 별다른 거는 아니고, 어쩌면 그게 더 어색할 수도 있죠(웃음)』
 
  李明博 시장은 효율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CEO 출신이다.
 
  ―金大中 정부 시절의 각료회의와 盧武鉉 정부의 각료회의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느껴지십니까.
 
  『효율적이기는 지금의 각료회의가 더 효율적이겠지요. 서로 토론하고 하니까』
 
  ―盧대통령이 시장께 개인적으로 특별히 한 말을 없습니까.
 
  『정부 각료들도 전원 적극 협력해라, 이 사업은 서울시민의 자존심을 살리고 서울을 업그레이드시킨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또 내가 청계천 복원 사업을 대중교통으로 도심의 교통체계를 바꾸는 계기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대통령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얘기를 해주셨어요. 이 청계천 사업을 국가적 사업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자세여서 아주 흐믓했어요』
 
  ―「어려움이 첩첩이 쌓인 청계천 복원에 성공하면 李明博은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가 된다. 그래서 민주당 쪽에서는 청계천 복원 산업을 도와줄 수도 없고 안 도와줄 수도 없는 입장이다. 차기 잠재적 대권 후보라는 점 때문에 방해를 놓을 수도 있다」 혹시 이런 얘기들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들어봤다고 해야 맞겠지. 그런데 그런 정치적 해석을 내리면 이 일이 상당히 어려워져요. 그것은 자칫하면 민주당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한나라당도 그럴 수가 있죠. 내가 어떤 정치적 계산을 한다면 이 프로젝트를 할 수가 없죠. 이것은 정말 어떤 소명의식과 집념을 가지고 해야 되는 일이에요』
 
  ―청계천 복원 문제는 시장 출마 이전부터 생각했습니까.
 
  『청계천 복원은 이미 수년 전부터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가 결성되는 등 학계나 시민단체에서 그 필요성과 당위성이 제기돼 왔어요. 나 역시 1998년에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그 문제를 생각했어요. 발표는 안 됐지만 군사정권 때 청계천 안에서 몇 번 폭발사고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후에 서울시가 청계천 사방에다 구멍을 뚫어서 메탄 가스를 빼냈어요. 미국인들의 경우는 오래 전부터 그런 위험 때문에 청계고가로 안 다니는 게 공식화돼 있었어요. 안전과 환경에 다 문제가 있는 거죠. 미국에 있는 동안 유엔환경기구 쪽 사람들과 환경전문가들을 만났는데 21세기는 복개된 하천을 전부 뜯어내고 도심에 있는 고가는 전부 철거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했어요. 환경과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청계천 밑에 직접 들어가 보기도 하면서 청계천 복원과 관련된 세미나도 열고 했던 겁니다』
 
 
  『21세기는 복개된 하천을 복원하는 시대』
 
  ―안전이 문제라면 청계고가를 전면적으로 보수해서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서울시는 이미 2001년에 청계고가 안전도 조사를 해놓고 있었어요. 전임 시장 재직 때죠. 그 안전도 조사에서 2년10개월 동안 청계천 고가 중 3km 구간을 1020억원의 예산을 들여서 완전히 통제하고 새로 만들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어요. 복원에는 2년5개월이 소요돼요. 고가를 보수하는 것이나 청계천을 복원하는 거나 서울 시내 교통에 지장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시간도 줄이고 시대의 변화에 맞게 親환경적인 개발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죠. 그동안 청계고가에서 위험한 부분은 매일 점검해 보수를 해왔는데 하루에 비용이 700만원이나 들어갑니다』
 
  ―李시장께서는 용산기지 반환시 공원화, 청계천 복원, 뚝섬 공원 조성, 정보사 땅 공원화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혹시 환경문제에 눈뜨게 되면서 그동안 건설회사를 이끌어 오면서 어쩔 수 없이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한 보상심리가 거꾸로 녹지 조성이라든지, 청계천 복원이라든지 이런 쪽으로 나타나는 건 아닙니까.
 
  『그것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나는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그 시대마다 시대적 소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에는 개발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빵을 나누어 먹고 하는 게 그 시대의 소명이고, 지금은 환경을 생각하는 게 시대의 소명이에요. 지도자는 이런 변화를 늘 앞서서 이끌어야 합니다. 나는 시대에 따라서 내 스스로가 변화를 주도하면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강박관념은 없죠』
 
  서울시가 안고 있는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가 전임 시장 시절부터 서초구 원지동에 건립을 추진 중인 추모공원 조성이다. 이 추모공원 조성은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고 있다.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름은 「추모공원」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돼 있지만 내용은 화장장 건립이기 때문이다.
 
  ―서초구 추모공원 조성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내가 시장에 취임하고 보니까 그린벨트만 해제하고 땅도 한 평도 사지 않았고, 설계도면도 아니고 조감도 한 장만 있더라구요. 나는 원지동 주민들의 심정을 이해해요. 벽제 하면 화장터를 떠올리듯 원지동 하면 화장터를 떠올리는 게 싫은 겁니다. 바깥에서는 그냥 화장터 자체가 냄새 나는 것도 아니고, 매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환경적으로나 외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만 가지고 자꾸 얘기를 하는데, 주민들의 심리적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되죠. 또 행정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전임 시장이 추진하던 것을 지금 와서 취소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두 가지가 다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거기에다가 병원을 짓게 해서 그 병원이 그 일대 주민들을 위해서 서비스를 하게 하고 거기에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방안을 생각 중이에요. 규모도 애초보다 축소할 계획이구요』
 
  ―서울시장 공관을 그쪽으로 옮기실 계획은 없습니까.
 
  『나는 그런 형식적인 제스처는 전혀 쓰고 싶지 않습니다』
 
 
  『수도 이전 타당성 검토해 봐야』
 
  ―추모공원 조성이 한참 논란이 됐을 때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거기 들어가는 입구에 시장 공관 위치가 그려져 있더라구요. 공관이 강남으로 간다는 것도 문제가 있고, 지역적으로 맞지가 않아요. 주민들에게 현실 그대로 납득시켜서 늦어도 7월까지는 합의를 하고 곧 설계를 가지고 땅을 살 겁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중 민주당 盧武鉉 후보 측에서 대전으로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자, 서울시와 李明博 시장은 현실성이 없다며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盧武鉉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대전으로의 행정 수도 이전 공약을 했습니다. 사실 「행정 수도」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청와대도 옮기고 국회도 옮기면 그게 수도 이전이지 행정 수도 이전은 아니죠. 말의 유희인데, 시장께서는 수도 이전이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그렇지요(말의 유희라는 말에 대해). 누구나 선거 때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지킬 수 없는 공약도 하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죠. 아주 선진국 같으면 현실성 없는 공약을 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득표에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지킬 수 없는 공약을 잘 내놓지 않죠. 나는 그 선거 공약을 놓고, 아직 실천도 안 했기 때문에 평가할 만한 때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서울 시장으로서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나는 물론 찬성 안 하죠. 통일 시대를 열었을 때를 생각한다면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다는 것은 맞지 않아요. 나는 지금부터 남북통일을 앞두고 행정 수도를 어디에다 둘 것인가를 진지하게 검토해서 대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盧武鉉 정부와 관련된 질문에 李明博 시장은 말을 극도로 아꼈다. 각을 세우지 않겠다는 뜻이 역력해 보였다.
 
  ―정치적인 질문을 안 드릴 수가 없는데요. 盧武鉉 정부를 불안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인 李明博으로서 盧武鉉 정부 100일을 평가해 주시죠.
 
  李시장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허허로운 웃음이 대답보다 먼저 나왔다.
 
  『허허, 그것 참 이야기하기가…』
 
  ―간단하게 「실망스럽다」 아니면 「잘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라도 평가해 주시죠.
 
  『그런데 뭐,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현 시점에서 보면 실망스러웠던 점도 있어요. 있는데 어쩌면 현실적으로 적응해 나가면서 변화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딱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나가는 게 아니고 현실적으로 변화 적응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 않나…』
 
 
  대통령이 잘못되면 야당은 좋을지 몰라도 나라가 어렵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연습하는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준비를 다 해놓고 시작해야지, 하면서 연습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변화에 적응해 나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은 盧대통령의 미국 방문보면서 하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대한민국 국민이 뽑았잖아요. 우리가 부정을 할 수가 없잖아요. 예를 들어 盧武鉉 대통령이 잘못됐다면 정치적으로는 야당이 좋을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은 상당히 어렵죠. 그러니까 내가 볼 때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盧武鉉 정부가 앞으로 닥쳐오는 문제에 대해서 점점 현실적으로 변화하고, 그렇게 해서 국민들을 안심시켜 나가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李明博 시장이 서울시장에 세 번이나 도전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李시장은 민자당 전국구 초선 의원 시절이던 1995년에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적이 있고, 민자당의 당명이 신한국당으로 바뀐 1998년에도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준비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야당 중진인 李鍾贊(이종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던 15대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 선거법 위반혐의로 2심 재판에서 벌금 400만원이 선고되자 경선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해 李시장은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李시장은 당시 「정치적 판결」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직 상실로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항간의 여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잠시 미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그는 다시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 당선됐다.
 
  李시장은 이 과정에서 1995년에는 초선 전국구 의원으로서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金泳三 대통령의 意中(의중)과 맞서면서 여당 역사상 처음으로 후보 경선제도를 도입하게 만들었다.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내심 鄭元植(정원식) 전 국무총리를 염두에 두었던 金 전 대통령과 당시 여권은 서울시장 경선을 주장하는 李明博 의원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했다고 한다.
 
  ―1995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 때 金泳三 당시 대통령과 담판을 하셨는데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후보 경선 참여를 포기하라는 직접적인 압력이 있었습니까.
 
  『YS가 압력을 가했죠. YS가 포기하라고 하기 이전에 많은 절차가 있었죠』
 
  ―무슨 절차가 있었다는 겁니까.
 
  『정무수석, 당 대표, 안기부장 등의 사퇴 압력이 있었죠. 하여튼 받을 수 있는 압력은 다 받았는데, 그때 나는 공정경선을 어떤 경우에든 못 할 거라는 걸 알았어요. 집권 여당 내에서 대통령과 끝까지 맞서서 자신의 뜻을 관철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당시 나는 초선의원이었구요. 하지만 내가 그때 굽히지 않은 결과, 그 후에는 여당도 모두 경선으로 갔습니다. 그 점에서 굉장한 보람을 느낍니다』
 
  李明博 시장은 1992년에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의 정치 입문을 적극적으로 권유한 이가 서울시장 후보 경선 사퇴를 종용했던 金泳三 전 대통령이다.
 
 
  YS가 정치참여 권유
 
  ―정치를 꿈꾼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盧泰愚(노태우) 정권 때죠. 그때 경제가 굉장히 어려워졌고. 경제계와 정치권이 굉장히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어요. 그때 경제계에서는 「우리 한국 경제가 1만 달러까지는 성장을 할 수 있지만, 2만 달러를 뛰어넘으려면 이러한 정치체제 정부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가지고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기업이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는 있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굉장히 국제화되고 효율화된 것을 최첨단으로 먼저 받아들인 조직이기 때문에 기업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한번 그런 쪽(정계)에도 진출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참여해야 된다」 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현대그룹 鄭周永(정주영) 회장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할 때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기업 오너의 정치참여보다는 전문경영인의 정치참여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처음에 권유를 했습니까.
 
  『내 스스로도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정치를 시작할 때는 지방자치제가 부활돼 처음으로 실시되던 때예요. 그해 6월에 실시됐을 겁니다. 1월에 현대를 그만둔 뒤 金泳三 대통령이 민자당 대표이던 시절에 플라자 호텔에서 단독으로 서너 번 만났습니다. 그때 나한테 강남에 출마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을 했어요. 나는 끝까지 반대했어요. 그때 반대를 한 이유가 내가 출마하면 당시 鄭周永 회장이 黨을 만들 때 반대하고 나왔기 때문에 정주영 회장을 비난해야 되잖아요. 정주영 회장과 헤어졌지만 비난하고 그런 관계는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가면 그렇게 된다 해서 반대했어요』
 
  ―金泳三 전 대통령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분은 정치의 大家(대가) 아닙니까. 정치를 하려면 그런 관계에서도 저런 관계로 변할 수 있다, 그러는 거예요. 나는 정치인은 그럴 수 있겠지만, 아직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 한다고 했어요. 그때 내가 6월에 지방자치제 선거가 시작되면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는 제안을 했어요. 그런 제안을 하니까, 그때 가서 결정 짓자는 얘기가 됐던 거예요. 그래서 정치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럼 처음에 정치를 시작할 때의 목표는 서울시장이었습니까.
 
  『국회의원 출마하려고 맘먹은 것은 아니었어요』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서울시장 뜻 둬
 
  李明博 시장은 오래 전부터 물류난 해소를 위해 부산과 서울을 잇는 京釜(경부)운하 건설을 주장해 왔다. 한강·낙동강 등 기존의 강을 이으면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첫 국회 등원에서 京釜운하 건설을 주장하셨는데, 만약에 대권에 도전하신다면 경부 운하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우실 생각입니까. 청계천 복원보다 더 큰 도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청계천보다는 좀 쉬울 겁니다(웃음)』
 
  ―그게 어떻게 더 쉽습니까.
 
  『청계천 복원은 이해당사자가 있죠. 상인 20만이라든가 상점 2만5000이 있고, 또 노점상이 있고, 이렇게 반대하는 이해 당사자가 있지만, 경부 운하는 모두에게 다 좋으니까요. 경남도 좋아지고, 충청도도 좋아지고 경기도도 좋아지고』
 
  ―해당 지역 주민들이 이해 당사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역주민들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죠. 강만 따라오는 거니까』
 
  ―시장께서는 청계천 복원보다도 오히려 경부 운하를 더 건설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역사가 더 길었죠. 그거(경부 운하)는 오래 전부터 검토해 왔던 거구요』
 
  두 번째 인터뷰는 6월7일 오후 1시30분부터 이루어졌다. 李明博 시장은 점심 식사 전이었다. 접견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목이 마른 듯 물부터 마셨다. 바빠 보이는 모습이었다.
 
  李明博 시장과 現代, 現代의 오너였던 故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두 사람은 중소기업이었던 현대를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키웠다. 입사 5년 만에 이사직에 오르고, 12년 만인 서른다섯 나이에 현대건설의 최고 경영자로 李시장이 초고속 승진하는 것과 비례해 현대도 초고속 성장을 했다. 과거 현대그룹의 초고속 성장사를 신화라고 한다면 그 신화의 주인공은 鄭周永과 李明博이다.
 
  두 사람은 1992년 1월 정치참여 방식을 놓고 이견을 보이다가 끝내 결별했다. 李시장은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鄭회장은 직접 국민당을 창당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단단해 보였던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게 된 계기는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1990년 초부터 1년간 방영됐던 이 주말 드라마의 시청률은 45%였다. 이 드라마는 李明博 시장을 모델로 제작됐고, 鄭회장은 자신을 모델로 삼은 드라마이기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야망의 세월」이 어떤 이유로 李시장을 모델로 삼게 됐는지 후에라도 들어 봤습니까.
 
  『나중에 KBS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원래는 정주영 회장도 대상이었는데 오너는 대상으로 할 수가 없고 전문경영인 중에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대요. 그래서 전문경영인을 찾다가 내가 대상이 됐다는 거죠. 하지만 나는 나를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걸 반대했죠』
 
  ―「야망의 세월」을 집필한 작가 나연숙씨가 직접 찾아와서 취재도 하고 그랬습니까.
 
  『굉장히 많이 했지요. 그런데 나는 응해주지 않았지요』
 
  ―시장님을 직접 취재한 건 아니군요.
 
  『나연숙씨가 정주영 회장을 찾아가서 「李회장이 취재에 협조를 하게 지시 해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해가 있었어요. 말하는 과정에서 정주영 회장은 나를 만나서 자기 이야기를 하게 해달라는 걸로 이해를 했던 거예요』
 
  ―그럼 鄭회장께서는 자신이 주인공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 아닙니까.
 
  『예,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본인이 KBS 사장까지 만나서 항의를 하고, 그랬던 일이 있죠. 그런 착각이 좀 있었거든요. 그 일로 약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죠. 나는 그걸(드라마 제작을) 반대했어요. 작가를 여러 번 만나 반대를 했어요. 그런데 결국 자료는 회사에서 다 가져가고 여기저기 취재를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죠』
 
  ―이 드라마가 李시장과 鄭회장 사이를 금 가게 하는 데 불씨가 된 것이군요.
 
  『그게 인간의 심리니까요. 이게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없지만 鄭회장 친한 사람이 나도 친한 사람이고, 내가 친한 사람이 鄭회장도 친한 사람이고,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당황해 하고 이런 걸로 봐서는 鄭周永 회장이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하는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어요』
 
  ―이왕 정치를 할 것이면 鄭周永 회장과 함께 해도 되는데 왜 안 하셨습니까.
 
  『나는 鄭周永 회장이 정치를 하는 것은 반대했죠. 나는 지금 왜 그때 끝까지 반대를 못 했을까 후회하죠. 그런데 반대를 할 수가 없었어요』
 
  ―왜 시장께서는 정치를 해도 되고 鄭周永 회장은 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는 종이 위에 현대, 삼성, 대우 등의 재벌 이름을 써 놓고 동그라미를 치며 대답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죠. 그 당시 현대가 제일 큰 기업이었고 그 다음에 삼성, 대우, 그 다음에 LG가 있는데, 우리나라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봐도 이들 3∼4개 회사가 전체의 30~40%를 차지하던 때였어요. 막강한 금력을 가진 현역 회장이 또 정치권력까지 잡는다는 것은 위험하죠. 鄭회장이 어쩌면 기성 정치인보다 더 낫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나는 인정을 해요. 그런데 한국 역사를 길게 보면 鄭周永씨가 잡으면 나라고 못 할 거냐, 삼성에서도 하자, 대우에서도 하자, 이렇게 됐을 경우에는 국가적으로 굉장히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鄭周永은 「난사람」』
 
  ―시장께서 1965년부터 1992년까지 27년간 곁에서 지켜본 鄭周永 회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면 「난사람」이죠. 어떤 기업인하고도 차별되는 사람이라고 봐야 되지요. 鄭周永 회장 자체로는 이 땅의 기업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일을 했고 존경하는 인물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우리 한국 사회가 시장경제 자본주의로 나가는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존경받는 인물로 돼 있는 것이 좋다, 이렇게 보죠.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창업한 것도 아니고 남의 돈을 빌려서 창업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자기 힘으로 이룬 사람이에요.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켰고요.
 
  지금 문제가 돼 있기는 하지만, 나는 남북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기업인으로서의 鄭周永 회장은 여전히 존경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기업인으로서의 鄭周永 회장을 존경해요. 우리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어느 부분적인 일 때문에 그 사람이 해놓은 일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좀 전에 鄭회장께서 남북관계에 물꼬를 텄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金大中 前 대통령의 對北 정책에 현대가 희생이 됐다고 보십니까.
 
  『글쎄 그건 내가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고요. 내가 현대를 떠난 지 오래됐으니까.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어른이 애를 이용한 것도 아니고 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고 했으니까, 아마 내가 볼 때는 양쪽이 다 서로 활용했었다고 보지만, 아무튼 권력을 가진 정치권이 기업인을 이용한 비중이 더 크겠죠』
 
  ―金大中 前 대통령은 남북 頂上회담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고, 頂上회담은 現代가 金正日의 승낙을 받아 옴으로써 성사됐습니다. 이런 결과를 놓고 鄭周永 회장이 現代를 운영하는 데 金大中 前 대통령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북한으로 간 돈도 사실 현대의 돈이 아니라 은행에서 나온 돈 아닙니까. 현대그룹에는 또 공적자금도 많이 투입됐습니다.
 
  『공적자금은 떼먹어도 되는 거고…(웃음). 그런데 鄭周永씨는 나라 돈 축내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에요. 자기 이해에는 동물적으로 빠르지만』
 
  ―鄭회장이 頂上회담을 기업운영에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죠?
 
  『현대가 YS 5년 동안 힘들었어요. 그 기간이 그룹을 구조조정하는 긍정적 역할도 했지만, 그게 DJ 시절에는 반작용도 있었던 것 같아요. 鄭회장은 독점욕이 강한 사람이에요. 당시 對北 사업의 경쟁자로 통일그룹이 있었죠. 文鮮明과 金日成이 금강산 개발 같은 것들을 합의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鄭회장이 독점을 하려니까 정치력이 필요했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YS 때 당한 심리적 반작용과 독점욕이 현대의 대북 사업에서 그런 결과를 낳게 했다고 봐요. 물론 이거는 순전히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現代는 DJ와 金正日 사이에 끼여 희생』
 
  ―現代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현대의 무너지는 상황을 보는 심정이 어떻습니까.
 
  李明博 시장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글쎄 말이지. 現代라고 하는 기업은 한때 현대이즘, 현대 맨, 현대 캔 두 정신, 이런 여러 가지가 한국 사회와 젊은이들에게 각인이 됐던 기업이기 때문에 어쩌면 참 망하기가 어려운 회사죠. 실패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기본을 갖고 있던 회사라고 나는 봅니다. 現代가 DJ에게 이용됐다, 이렇게 보기보다는 DJ와 金正日 사이에 끼어 양쪽에게 피해를 입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죠. 정치로도 힘으로도 풀 수가 없는 그 묘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첨예한 남북 간의 관계에 현대가 들어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행한 거죠』
 
  ―現代그룹에서 세칭 「왕자의 난」 같은 분란이 벌어질 때 보시기에 안타깝지 않았습니까.
 
  『내가 볼 때는 現代그룹이 鄭周永씨를 중심으로 2세들이 굉장히 단합이 됐던 회사예요. 그런 것들도 다 남북 간에 서로 주도권을 가져 보려고 하다가… 하여튼 중요한 거는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뺏긴 거죠. 북한에다 소모를 했죠』
 
  李明博 시장은 1941년에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 때부터 김밥을 직접 팔아 가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역시 낮에는 풀빵을 구워 팔며 포항에 있는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려大 상대에 진학한 그는 이태원 시장통에서 환경미화원, 막노동 등을 하면서 대학을 마쳤다. 李시장의 형은 한나라당 李相得(이상득·68) 의원이다. 李의원은 육사와 서울대를 졸업했다.
  ―시장님의 성장기를 보면 가족들이 온통 형님인 李相得 의원의 교육을 위해서 나머지 형제들이 희생을 많이 했습니다. 직접 돈도 벌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고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혹시 형님에 대한 원망은 없었습니까.
 
  李시장은 형을 李相得 의원이라고 지칭했다.
 
  『내가 중학교 때 李相得 의원은 대학생이었으니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요. 나이가 비슷하다면 모르는데, 이게 6년 이상 차이가 나니까 그런 거는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하고 의논해서 자식들이 다 국민학교, 중학교까지밖에 못 나오면 집안에 희망이 없으니까 결국 하나라도 잘 키우자고 해서 그렇게 된 거죠. 李相得 의원이 머리가 아주 좋았어요. 공부 잘 하고 그러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상득 의원을 선택한 거죠. 우리는 나이도 어리고』
 
  ―별명이 컴도저이신데 어떻게 해서 지어졌습니까.
 
  『내가 現代에 있을 때 현대가 급성장하니까 바깥에서 나를 저돌적이다, 추진력이 강하다, 하면서 나를 불도저 같다고 하니까, 회사 내부에서 저 사람이 불도저같이 막 밀어붙이는 사람이 아니다,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다, 이래 가지고 그 별명이 붙었어요. 컴퓨터와 불도저의 합성어죠』
 
  ―시장께서는 외모를 보면 朴正熙 대통령하고 느낌이 비슷한데, 본인 스스로 잘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잘생겼다 못생겼다 그런 것보다도 내가 대학 다닐 때 별명이 「小박정희」였지. 朴대통령에 대해 처음에도 부정적이었지만 기업에 들어가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원자력 발전소도 만들고 부산 항만을 만들고, 소위 국가 근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미래 지향적으로 하는 걸 보면서 내가 정치적 측면에서는 모르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재산은 얼마나 되십니까.
 
  『재산은 현금 갖고 있는 건 없는데, 하여튼 전부 공시지가로 하면 150~160억 될 거예요. 떨어질지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생 동안 내 재산관리를 해본 적이 없어요.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회사에서 관리해 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서 월급을 안 받고도 먹고 사니까 월급을 아름다운 재단에 다 보내고 있어요』
 
  ―오늘 두 번째 인터뷰를 하면서 느끼는 건데 시장께서는 원래 그렇게 표정의 변화가 없습니까.
 
  『원래 내가 얼굴에 표정을 잘 나타내죠. 화도 내고 그러는데, 공직자가 되고 나서는 잘 안 나타내려고 합니다. 내가 상당히 공무원화돼 가고 있어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李시장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일어섰다. 앉아서 마주 보고 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실제 키가 더 컸다. 청계천 복원 후 李明博 시장의 「지도자로서의 크기」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李明博 시장의 大도박이 시작됐다.● (2003년 월간조선 8월호) 

입력 : 200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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