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뉴시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 얼음처럼 빛나고, /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 가장 높은 정신은 /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 산정(山頂)은 /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 빛을 받들고 있다.' - 조정권, 산정묘지 中
연작시집 《산정묘지》로 유명한 조정권 시인이 8일 새벽 5시30분 향년 68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간경화 등 지병으로 수년 동안 투병생활을 해오다 이날 영면했다.
1949년 서울에서 출생한 조 시인은 1970년 《현대시학》에 시 <흑판>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당시 시인 박목월과 구상 등의 추천을 받았다. 이후 《허심송》 《산정묘지》 《고요로의 초대》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시냇달》 등의 시집을 펴냈다.
조 시인은 '정신주의'로 분류되는 시세계를 축조해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한국시단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 따르면 조 시인의 작품은 순수한 시적 감성이 주조(主潮)를 이룬다. 소년처럼 맑고 찬연한 시적 정서의 기반에는 강철과 같은 정신의 의지력이 존재한다. 이 정신의 의지력을 통해 그의 시는 새로운 형식으로 부단히 변모해 나갔다.
그의 정신주의 시세계는 연작시집 《산정묘지》에서 빛을 발한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은 《산정묘지》의 작품경향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산정묘지》 연작은 차갑고 빛나는 겨울산의 이미지와 강건한 정신의 역동적 상승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세속의 헛된 휴식상태에서 벗어나 견인의 자세로 산정에 이르려는 구도적 등정은 혼탁한 세상에 대한 질책이자 자기초월의 상향적 세계를 표상한다.
이와 같은 정신의 움직임은 투명하고 순도 높은 의식의 결정체인 얼음의 이미지를 통해 뛰어난 시적 성취를 얻는다.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지향하는 법'이라는 잠언적 시구를 통해 드러나는 겨울산의 정상은 조정권 시가 도달한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 시인의 유작이 된 마지막 시집 《시냇달》(서정시학, 2014) 추천평에서 문학평론가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는 그의 시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조정권의 시는 청빈과 고요가 시상의 농담과 준법을 이룬 수묵화첩이다. 그의 시편들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가감하게 절삭한 자발적 가난의 언어로 개진된다. 그에게 말은 말하지 않기 위한 말이다. 그래서 그의 시의 주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고 수사가 아니라 여백이다."
중앙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한 조 시인은 문화예술지 《공간》 편집장을 역임하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에 재직했다.
1985년 제5회 녹원문학상, 1987년 제20회 한국시인협회상, 1991년 제11회 김수영문학상, 1992년 제6회 소월시문학상, 1994년 제39회 현대시문학상, 2011년 제3회 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부인 주경희씨, 두 딸 채린·혜린씨, 사위 정준영·배호남씨가 있다. 장례는 한국시인협회 시인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일 오전 8시, 장지는 용인공원 묘원이다. 02-2072-2011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