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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험] 수줍은 원칙주의자 趙舜衡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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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수줍은 원칙주의자 趙舜衡 
 
『집권 여당이 뿌리째 흔들리니 정계 개편이 불가피 하죠』 
    
 『대통령부터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확신이 없어…차기 대통령은 韓美동맹에 대해 확고한 생각이 있어야』
 
趙舜衡
1935년 서울 출생. 서울中·高, 서울大 법학과 졸업. 美 조지타운大 외교학과 수학. 삼성물산 부장, 11·12·14·15·16·17代 국회의원, 한겨레민주당 공동대표, 민주당 부총재·최고위원, 국민회의 사무총장, 새천년민주당 대표 역임. 
  

(출처:2006년 9월호 월간조선)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탄핵 주역의 복귀
 
 지난 7월의 마지막 날 오전 8시50분. 서울 여의도 소재 증권거래소 건너편 민주당사는 활기가 넘쳤다. 7·26 재보선에서 민주당 趙舜衡(조순형·71) 후보가 서울 성북乙(을)에서 승리한 기쁨이 만든 여진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았다.
 
  오전 9시께 趙舜衡 의원이 일행들과 함께 확대간부회의 참석차 대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이날은 海公 申翼熙(해공 신익희) 선생, 維石 趙炳玉(유석 조병옥) 박사, 張勉(장면) 前 총리, 朴順天(박순천) 여사, 鄭一亨(정일형) 박사 등 역대 야당 지도자들의 묘소를 참배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민주당이 50년 전통의 정당임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이른바 「뿌리찾기」 투어가 시작된 날이다.
 
  기자가 인사를 하자, 趙의원은 멋쩍은 듯 손을 내밀며 『뭘 아침부터 여기까지 오고 그래요』 하며 수줍게 웃었다. 기자의 『동행 취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가 시작되자 수줍음은 사라지고 예의 그가 「원칙주의자」임을 떠올리게 하는 「조순형式」 발언이 나왔다.
 
  『김병준 부총리가 「사퇴하라」는 여론에도 버티고 있는데, 한명숙 총리를 방문해 헌법에 의거 대통령에게 해임건의를 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사퇴 논란이 한창이던 당시 金秉準(김병준) 부총리 문제와 관련된 발언을 하며 사퇴 촉구 근거로 헌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장 밖에서의 「원조 대쪽」은 너무 수줍음을 탔다. 李會昌(이회창) 前 한나라당 총재가 「대쪽」이라는 별명을 얻기 전 「대쪽」은 趙 의원에게 먼저 붙여진 별명이었다.
 
  趙의원은 기자와 대화 중 눈 둘 곳을 몰라서 고개를 숙이거나 창 밖을 내다보며 질문에 답했다. 목소리도 작았고,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長廣說(장광설)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그랬다면 기자는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趙의원과의 인터뷰는 말 잇기가 쉽지 않았다.
 
  길을 걸으면서도 마찬가지.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보거나 고개를 외로 꼬며 대답했다. 묘소 참배를 하면서도 그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길게 나누지 않았다. 서울 수유리에 있는 선친 趙炳玉 박사의 묘역 앞에 국회의원 당선증을 바칠 때도 그는 조용했다.
 
  「김대중 도서관」으로 金大中 前 대통령을 예방한 8월1일 아침에도 그랬다. 도서관 로비에서 金大中 대통령이 들어오게 될 출입문만을 응시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함께 金大中 대통령을 예방하기로 한 韓和甲(한화갑) 민주당 대표와 張裳(장상) 대표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와서 반갑게 악수를 청할 때도 그의 몸놀림은 「숙달된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달라 보였다.
    
  강아지와 더 깊은 대화(?)
 
  짬을 내 당선 인사차 찾은 성북구 종암동 시장을 다니면서 趙의원과 가장 오래 대화를 나눈 것은 시장 상인이 아닌 건어물 가게에서 만난 강아지였다. 집에서 진돗개를 키운다는 趙의원은 『개를 무척 좋아한다』는 愛犬家(애견가)이다. 그 다음으로 긴 대화는 길에서 만난 갓난아이 차지였다.
 
  그런 그의 행동과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수줍은 선비」라는 별명이라면 모를까. 언젠가 선배 기자가 趙舜衡 의원을 인터뷰한 후 『인터뷰 장소가 국회 도서관이었다』면서 『색다른 장소에서의 인터뷰였지만 어쩐지 그 장소가 趙의원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고 한 말이 이해됐다.
 
  한마디로 趙舜衡이란 사람은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재미없는 국회의원」과 기자는 동행 취재 중 그의 지역구가 있는 서울 성북구 소재 한 커피숍에서 오후의 불볕더위를 피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趙의원께서는 재미없으시다는 평가를 받는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남들이 보기에 재미없다고 생각하겠죠. 저는 특히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는 정치인으로서 부적격자거든요(웃음). 정치인뿐만 아니라 사회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하고 잘 지내려면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친화력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게 좀 부족해요.
 
  한 번 친해진 사람은 오래 가긴 하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아요. 제 성격 탓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다가 제가 예를 들면 골프를 안 하고 있거든요. 못 하니까 안 하고, 안 하니까 못 하죠. 또 남들과 같이 할 수 있는 등산도 안 해요. 같이 하는 게 없으니까 재미없는 사람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죠(웃음). 무리짓는 것 못 하고 술 못 하니 재미없을 수밖에요』
 
  ―그럼 여가활동은 어떻게 하십니까.
  
당선 인사차 서울 성북구 소재 종암시장을 찾은 趙의원. 趙의원은 보권선거 후 지역구를 돌며 당선 인사를 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은 주로 책을 많이 봤어요. 제가 개를 좋아해서 진돗개를 예전부터 길러 보고 싶어 했는데 낙선 후에 진도에서 진돗개 암수 두 마리를 분양받아서 키우고 있어요. 그 개들과 같이 놀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개는 젊었을 때부터 끊이지 않고 길렀어요』
 
  ―술은 안 드시고 담배는 아예 안 피우신 겁니까.
 
  『담배는 10년 전에 끊었어요. 많이 피웠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끊었어요』
 
  趙의원은 옷깃에 국회의원 배지 대신 「PLAN」이라는 英文字(영문자)가 새겨진 배지를 달고 있었다.
 
  ―무슨 배지입니까.
 
  『PLAN 한국위원회 배지예요. 국제아동구호기구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과 결연해서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죠』
 
  ―국회의원 배지는 안 달고 왜 그 배지를 다셨습니까.
 
  『국회의원 배지를 보내오긴 했는데 이 배지가 보기 좋아요.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국회에서 달면 되잖아요. 제가 南美(남미) 콜롬비아에 후원하는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7, 8년 됐는데 그 아이가 두세 살 때부터 시작했죠. 지금 열 살 정도인데 가끔 사진도 오고 편지도 오고 그래요. 나로서는 얼마 안 되는 금액인데 그곳에서는 큰 금액이라고 그러더군요』
    
  정치 명문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
 
  趙舜衡 의원은 1935년 서울에서 자유당 시절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趙炳玉 박사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趙炳玉 박사는 일제 때 미국으로 유학, 컬럼비아大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인텔리였다. 어머니 노정면 여사도 펜실베이니아州 드류大를 졸업했다. 1996년 작고한 趙尹衡(조윤형) 前 국회부의장이 둘째 형이다.
 
  趙의원의 집은 정치 명문가이며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趙의원의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고향은 충남 천안군 병천면이다. 병천은 3·1 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가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가 趙의원의 할아버지(趙仁元)이다.
 
  趙의원의 할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일제의 흉탄에 부상을 입고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광복 후에는 이 공로로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趙炳玉 박사는 일제 시대 때 광주학생 수양동우회 신간회 사건에 연루돼 장기간 복역했다.
 
  이런 趙의원의 집안을 親日派(친일파) 운운한 동국大 강정구 교수의 발언에 趙의원이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강정구 교수는 지난해 9월 말 서울大에서 민교협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韓美동맹이 없었다면 친일파 후예들이 우리 정치사에 아예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라며, 趙의원과 함께 朴寬用(박관용) 前 국회의장, 朴槿惠(박근혜) 前 한나라당 대표, 열린당 辛基南(신기남) 의원 등을 언급했다. 趙의원은 강정구 교수를 사자명예훼손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趙의원은 지난 7월31일 역대 야당 지도자들의 묘소 순방 중 아버지 趙炳玉 박사 묘소 앞에서는 국회의원 당선증을 바쳤다.
 
  ―선친 趙炳玉 박사 앞에서 속으로 무슨 다짐을 하셨습니까.
 
  『어떻게 보면 제2의 정치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은데 앞으로 열심히 잘해서 마무리를 잘 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죠』
 
  趙舜衡 의원의 정치참여는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고, 그 중심에는 가족에 대한 의무와 국가에 대한 의무가 있었다고 한다. 趙의원의 이력을 간략하게 훑어 보자.
 
  서울高를 나온 趙의원은 1954년 서울 법대에 입학했다. 재학 중 軍복무를 마친 후 그는 美 조지워싱턴大 외교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1958년의 일이었다. 유학 중 자유당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1960년 5代 대통령 선거에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부친 趙炳玉 박사를 돕기 위해 귀국했지만, 1960년 2월 趙박사가 암으로 타계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4·19와 5·16이 일어났고, 그 사이 형 尹衡씨는 27세에 의정부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趙의원은 그 뒤 서울大에 복학해 1964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친구들과 잠깐 사업을 준비하다가 접은 후 1966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삼성물산 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1979년에 퇴직했다. 그리고 얼마 후, 趙의원을 숙명적으로 기다리고 있던 직업(?)은 「정치」였다.
 
  형 趙尹衡 前 국회부의장이 新군부의 정치활동 규제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대신 동생인 趙舜衡 의원에게 출마를 권유하고 나선 것이다.
 
  ―정치를 안 하셨다면 기업체에 계속 몸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어떻게 우연한 계기에 他意半 自意半(타의반 자의반)도 아니고, 他意에 의해서 시작하게 됐죠』
    
  두 번의 정치적 위기
 
  ―가족 모임에서 징발령이 내려진 겁니까.
 
  『예, 저희 형님이 강제 징발을 한 거죠. 가족에 대한 의무, 국가에 대한 의무 그런 것 자꾸 따지면서 해야 된다고 하셨죠. 제 자신도 일생에 한 번은 나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과 국민, 국가를 위해서 뭔가는 할 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 결과가 좋게 나오든 나쁘게 나오든 한 번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결과야 어떻게 되든 하겠다고 나섰죠. 그때도 모든 상황이 어렵게 돼 있었는데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소속으로 당선이 됐어요. 그게 시작이 됐죠』
 
  趙의원은 7·26 재보선에서 4.2% 차로 한나라당 崔秀永(최수영) 후보를 이기고 성북乙에서 당선됐다.
 
  ―성북乙에서 출마를 결심할 때는 나름대로 당선을 확신했습니까.
 
  『확신이라고 할까, 믿음은 어느 정도 있었죠. 그런 것 없이 출마하겠습니까. 누구나 마찬가지죠. 출마할 때는 나름대로 믿음과 확신이 있는 거죠』
 
  趙의원은 민주당 대표 시절 지역감정 해소를 명분으로 2004년 총선에서 대구의 신흥 정치 1번지인 수성甲(갑)에서 출마했었다.
 
  ―대구에서 출마할 때도 당선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까.
 
  『그렇진 않았죠. 하지만 최선은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이번 보궐선거 당선으로 金元基(김원기) 前 국회의장과 함께 현역 最多選(최다선)인 6選 의원이 된 趙의원은 시민단체나 국회 피감기관들이 선정하는 「우수의원」, 「모범의원」, 「출석률 100% 의원」 등의 단골 수상자다. 1999년 제정돼 소신과 품위가 있는 정치인에게 수여하는 「백봉 신사상」을 1회부터 4회까지 내리 받았다. 3회 때는 본인이 수상을 고사했다.
 
  정치인으로서는 몰라도 국회의원으로서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훈장들인 것이다.
 
  25년의 정치적 행적과 19년의 의정생활 중 趙의원은 두 번의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1988년의 한겨레민주당 창당과 2004년의 「탄핵 역풍」이다. 두 위기의 공통점은 국회의원 낙선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趙의원 자신은 두 위기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趙舜衡 의원은 1987년 大選을 앞두고 兩金 후보 단일화에 앞장섰다. 朴燦鍾(박찬종)·洪思德(홍사덕)·李哲(이철) 의원 등 당시 소장파 의원들과 兩金 단일화 운동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趙의원은 정치적 고아가 됐다.
    
  『후회는 없다』
 
  1988년 당시 재야의 諸廷坵(제정구·작고), 張乙炳(장을병)씨 등과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13代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정치 인생 중에서 한겨레민주당을 만들고 13代 국회의원 선거인 1988년 4·26 총선에서 낙선했던 때를 실패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실패는 했죠. 그러나 길게 봐서는 실패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결국 이어져서 새 정치에 대한 국민 요구가 있었고, 결국은 발전해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는 실패였지만 당시 상황을 봐서는 그런 시도가 있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런 시도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고, 한국 정치는 발전이 없었을 겁니다.
 
  물론 代價(대가)는 컸죠. 실패했으니까요. 지금도 저는 그때 잘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안 했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예요.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서 오히려 후련했죠』
 
  인터뷰 중 기자는 최신형이 아닌 녹음기의 상태를 걱정해야 했을 정도로 趙舜衡 의원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盧武鉉 대통령 탄핵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였다.
 
  ―보선에서 당선된 후 언론들은 趙의원의 당선을 盧武鉉 대통령 탄핵에 대한 정당성을 추인받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가 탄핵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는 견해도 있어요. 저는 그렇다고 해서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역사적인 사실 하나 가지고 몇백 년이 지나도 찬반 공방이 벌어지는데 하물며 탄핵은 2~3년 전에 있었던 일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어떻든 탄핵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해야 했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어요. 오히려 시일이 갈수록 확신이 더 굳어 있죠. 盧武鉉 정권 출범 후에 두세 차례 재보선이라든가, 특히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저는 이미 정리가 됐다고 봅니다. 지방선거는 단순히 정권에 대한 심판을 넘어서서 불신임에 가까운 심판이라고 봐요.
 
  우리나라가 내각제 국가였다면 틀림없이 정권 퇴진으로 갔을 거예요. 국민이 아예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제쳐 놓고, 「이번에는 우리가 탄핵해야 되겠다」 그런 걸로 봅니다』
    
  열린당이 먼저 탄핵을 이슈화
 
  ―「노사모」 대표 노혜경씨 같은 경우는 『趙의원의 당선이 탄핵에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열린당이 「조 아무개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은 탄핵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선거 결과는 제 승리로 나왔잖습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열린당 쪽에서는 인정해야죠.
 
  그래서 제가 당선소감에 「탄핵의 정당성이 인정됐고, 탄핵에 참여한 저를 포함한 16代 국회의원 모두의 명예회복이라든가 정치적 복권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거죠』
 
  ―명예회복과 정치적 복권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동안 마치 탄핵을 주도하고 참여한 사람을 왕조시대로 하면 대역죄를 지은 사람처럼 낙인을 찍고 했는데, 우선 그 명예회복이 돼야 합니다. 정치적 복권이라는 것은 洪思德 의원의 예를 보세요. 지난번 재보선 때 탄핵 주역이라는 이유로 한나라당이 공천을 거부했거든요. 사실상의 법적인 자격상실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하고 있죠. 그래서 정치적 복권이라는 말을 한 거죠』
    
  『盧대통령의 아집과 독선이 문제』
   
  ―5·31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趙의원께서는 盧武鉉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임으로 평가하시는데, 盧武鉉 정부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깊이 따져 들어가면 그건 盧武鉉 대통령의 개인 성격이나 품성 탓이라고 봐야죠. 저는 잊고 있었는데, 盧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에 제가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했더군요. 그 인터뷰에서 「앞으로 盧武鉉 정부가 어떻게 될 거냐」는 질문에 제가 이렇게 답했더군요. 「盧武鉉 대통령의 최대의 적은 盧武鉉 자신일 거다. 盧武鉉이 盧武鉉을 잘 통제하고 제어하고 한다면 성공할 것이고, 그렇게 못한다면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했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盧대통령의 아집과 독선이 문제예요. 남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비판을 적대시하고 그냥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것, 결국 그로 인해 오늘날의 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느냐, 이렇게 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실패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盧대통령 개인 품성 외에 시스템 차원에서 盧武鉉 정부의 실패 원인은 어떤 게 있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우선 人事(인사)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임명을 둘러싼 논란은 코드인사를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국정의 출발은 공정하고 올바른 人事죠.
 
  우리나라에 人材(인재)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파를 초월해서 각계각층의 人材들을 다 기용하고 도와 달라고 하면 누군들 안 받아들이겠습니까. 그걸 안 하고 20년도 채 안 되는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형성된 인적자원만 가지고 하는데 결국은 거기서 불행이 잉태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왜 당시 그렇게 품성의 문제가 있는 분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몰랐죠. 盧대통령의 잠재해 있는 품성을 몰랐던 것이죠.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그런 품성이 드러난 거죠. 물론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런 품성에 대해 알았던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다 좋게 평가하고 그랬죠. 그래서 그런 점을 얘기한다면 저희 민주당도 책임이 있죠(웃음)』
 
  ―趙의원님은 당시 大選에서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셨으니 더 큰 책임이 있는 셈이네요.
 
  『그렇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시 선거대책위원장 맡은 것을 후회하신 적도 있겠네요.
 
  『지금 와서는 후회를 하죠. 사실은 「꼭 盧후보를 밀어야겠다」, 「盧후보가 돼야한다」는 특별한 동기나 후보에 대한 확신, 믿음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어요』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끝난 후 당시 盧武鉉 후보에게 人事 문제에 관해 조언을 한 적이 있다면서요.
 
  『盧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보고 人事문제를 조언한 적이 있죠. 단 둘이서 만났을 때였는데 「청와대에 가면 家臣(가신)이나 측근은 절대 들이지 말라」고 했어요. 人事는 작은 人事를 잘 해야 큰 人事도 잘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盧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측근 人事를 많이 하고 코드 人事를 하고 있어요』
  
    탄핵 사유 더 늘었다
 
  ―盧武鉉 정부 들어서 입각 제의는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인수委 시절 盧武鉉 당선자가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4강 외교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4대 강국에 특사를 보냈어요. 미국은 鄭大哲(정대철) 의원을 보내고, 중국은 鄭東泳(정동영) 의원으로 하고, 저보고는 러시아를 가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러시아 특사로 갔다 온 것 말고는 없었어요』
 
  ―지난 번 대통령 탄핵 때보다 오히려 탄핵 사유가 더 늘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유가 늘었다는 겁니까.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 역사의 정통성, 정체성에 대한 盧대통령의 일련의 발언, 그 다음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키는 법률의 폐지 등 그런 것들이 탄핵 사유로 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그게 안 들어갔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체를 부정하는 듯한 일련의 발언들이 당시 탄핵 때도 이미 있었는데, 그때 들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때 우리가 생각은 했어요.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무리가 아니냐, 구체화시키긴 어렵지 않느냐」 해서 세 가지만 하고 말았죠』
    
  『내 이미지를 닮은 정치인은 咸承熙 前 의원』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당에 복귀한 千正培(천정배) 의원이 『趙舜衡 前 대표와 秋美愛(추미애) 前 의원을 열린우리당으로 데려오지 못한 것, 더 나아가 韓和甲 민주당 대표를 끌어안지 못한 것이 이 정권의 한계였다』고 말했는데요. 千의원과는 가까운 사이였습니까.
 
  『아니에요, 특별히 가까운 것은 없고요. 법사위에서 같이 활동을 하던 당시 자금세탁법 제정 과정에서 여야 3당이 당론으로 정치자금 부분을 뺐었는데 제가 반대했어요. 「정치자금도 넣어야 된다」고. 그랬더니 千正培 의원이 「정치자금을 넣어야 한다」고 하면서 같이 공감했거든요. 그런 인연은 있지만 특별한 관계는 없어요』
 
  ―후배 정치인들 중에 국회의원 趙舜衡의 이미지를 닮은 정치인이 있다고 보십니까.
 
  『(웃음) 그건 어려운 질문인데, 누구를 특정해서 말하기는 어려운데… 16代 국회 말 법사위에서 함께 활동한 咸承熙 (함승희) 前 의원이 인상적이더라고요. 검사로서도 훌륭한 검사였죠. 제가 보기에는 검사로 계속 있었으면 더 큰일을 했을 거예요. 의정활동도 그렇고 법률 지식도 해박하고 논리적이고 거침이 없어요. 검찰도 비판하고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趙舜衡 의원은 보궐선거 당선 직후 조선일보 기자와 동행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 중 열린당 金槿泰(김근태) 의장의 전화가 왔지만 趙의원은 받지 않았다. 열린당 禹相虎(우상호) 대변인은 이 사실이 보도되자 『축하전화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趙의원이) 협량한 것인지 의아했다』면서 『이것은 정치지도자들 간에 보여야 할 원숙한 모습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열린당 金槿泰 의장의 전화를 안 받으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아이 참, 왜 그것까지 써가지고(웃음). 그때 전화받을 형편이 못 됐어요.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고 조금 있다가 제가 전화하겠다고 했던 거죠. 그걸 일부러 안 받은 걸로 해서 「속 좁은 사람」이라는 논평을 하고 그랬다면서요. 그런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더 속 좁은 거 아닙니까. 요새 바쁜 세상에 전화하다 보면 금방 통화가 안 될 수도 있는 거지, 참』
 
  ―그래서 金의장에게 전화를 하셨습니까.
 
  『제가 집에서 직접 전화를 했어요. 휴대폰 번호를 몰라서 의장실로 전화를 했는데 비서실에서 「왜 수행비서가 전화를 안 하고 직접 하십니까」 하면서 저라는 걸 믿질 않아요. 金의장과 통화는 못했는데 나중에는 믿는 것 같아서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안 가르쳐 주더군요. 자기들이 연락해서 나중에 통화되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에 전화가 안 왔어요. 장난전화라고 생각했나봐요(웃음)』
  
    韓美동맹은 대한민국 생존의 근거
 
  ―盧武鉉 정부의 실패 요인 중 하나로 盧대통령의 품성과 성격을 들었는데 차기 대통령은 어떤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여러 가지 있지만 최근에 盧대통령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관용과 포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盧武鉉 대통령 본인은 안 그렇다고 하지만 그분의 리더십은 대립과 갈등이거든요』
 
  ―그런 품격 외에 더 필요한 것은 뭐가 있습니까.
 
  『知的(지적) 능력도 중요하죠. 애국심도 중요하고, 그 다음에 역사관이라고 그럴까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확고한 신념,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盧武鉉 정부 들어와서 국회에 진출한 분들 가운데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부터 그런데요, 뭐. 대통령부터 확신이 없잖습니까. 대통령 자체가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듯한 말도 했잖아요.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는 말까지 했잖아요』
 
  ―韓美동맹의 와해를 걱정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韓美동맹은 대한민국 생존의 근거라고 할까요, 조건이라고 할까, 국가이익을 봐서는 앞으로 적어도 20년 내지 30년은 유지해야 될 동맹 관계죠. 韓美동맹에 대해서도 다음 대통령은 확고한 생각을 갖고 지켜 나가야 된다고 봅니다. 그거 없이는 우리가 생존하고 발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 정부 들어 동국大 강정구 교수 처럼 국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발언을 학문의 자유라는 영역으로 용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위험한 발언이죠. 그것이 학문의 자유 범주 내에 있다고 본인들은 그러지만 국기와 국체를 흔드는, 헌법의 기본 이념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발언들입니다. 더군다나 청년들을 가르치는 책임 있는 대학교수가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위험하죠. 함부로 기소하거나 사법처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데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해야 된다고 봅니다.
 
  북한을 지배하는 것은 헌법도 아니고 노동당 규약입니다. 노동당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데 노동당 규약에 아직도 적화통일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안보觀이 이완되는 것은 안 됩니다.
 
  金大中 대통령도 6·15 선언, 그 이전에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첫 번째 강조한 게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韓美동맹 관계도 공고히 하는 것을 강조했죠』
 
  ―국가안보관의 해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韓美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金大中 정부 때부터였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그런 지적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金大中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적이 없어요. 물론 그 당시 민주당에서 대체입법론이 나오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것도 실현은 안 됐습니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국민적인 안보관의 해이나 韓美동맹의 와해는 盧武鉉 정부부터 본격화했어요』
    
  高建 인기는 盧대통령의 경박한 언행에 대비되기 때문
 
  ―차기 대통령의 자격 조건으로 관용과 포용의 리더십을 말씀하셨는데, 현재 거론되는 大選(대선) 주자들 가운데 그런 자격을 갖춘 분이 보입니까.
 
  『(웃음) 모르겠어요』
 
  ―高建(고건) 前 총리에 대해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면서 비판했는데요.
 
  『그런 얘기는 몇 번 했어요. 정계 개편 얘기만 나오면 高建 총리에 대해 우선적으로 물어보는데, 참 곤혹스러워요. 그분은 점잖은 분이고 제가 봐도 손색없는 분인데 자꾸 비판하는 것처럼 보여서 곤혹스러워요. 하여간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죠. 말하자면 결국 대의정치·정당정치라는 것은 與냐, 野냐, 이런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전개되는 것입니다.
 
  高建 前 총리는 더군다나 盧武鉉 정부에서 총리를 했기 때문에 「盧武鉉 정권의 국정운영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느냐」, 「盧武鉉 정권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대선 후보가 돼서 당선이 된다면 그것은 盧武鉉 정권을 승계하는 거냐, 교체하는 거냐」 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죠』
 
  ―그래도 현재 거론되고 있는 유력 大選주자들 가운데 민주당과 손잡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분이 高建 前 총리인 것 같습니다. 高총리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있습니까.
 
  『가능성이야 있죠. 전제는 앞서 말한대로 정치적 입장을 먼저 밝혀야 한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정통성, 韓美동맹 등 정체성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고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 당이 합치든 어떤 세력과 합치든 정계 개편 논의에 들어가야 합니다.
 
  大選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高총리 정도의 영향력과 비중이 있는 분이라면 그때그때 중요한 현안에 발언을 해야 해요. 원론적인 입장이 아닌 구체적인 생각을 내놔야 하는 거죠. 그분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高총리의 경우는 이미 대통령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검증된 인물 아닌가요?』
    
  「DJ는 쉬운 일도 어렵게 하고, YS는 어려운 일도 쉽게 생각」
 
  ―高建 前 총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요즘 거론되고 있는 유력 大選주자들의 인물평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유, 잘 모르겠어요. 안 하는 게 좋겠어요(웃음)』
 
  ―李明博(이명박) 前 서울시장을 몇 차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반에 알려진 것과 달리 매사에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라 상당히 치밀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그분은 공채사원으로 현대에 들어가서 최대의 건설회사 CEO까지 오른 분이죠. 실물경제를 많이 다뤘기 때문에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사물에 접근하는 게 아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분 같더군요. 국가 지도자로서 좋은 자질이죠. 4년 동안 서울 市政(시정)을 이끌었기 때문에 유능한 행정가로서의 이미지도 잘 쌓았고 청계천 복원 같은 눈에 보이는 업적도 남긴 분이죠』
 
  ―朴槿惠 前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 참, 다른 당 분들인데 자꾸 물으면… 어쨌든 朴 前 대표는 큰 선거를 승리로 이끈 데서 알 수 있듯이 지도력을 갖춘 분이라고 봅니다. 대중적인 인기도 높고요』
 
  ―月刊朝鮮 趙甲濟(조갑제) 편집위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에서 「한나라당의 大選 필승 카드 중 하나로 朴槿惠 前 한나라당 대표와 李明博 시장의 권력 분점」을 제시했습니다. 경선에서 승리한 사람이 패배한 사람에게 내치를 책임지는 실세 국무총리 자리를 보장하는 약속을 한다는 거죠. 한나라당의 그런 카드가 정말 가능한 일로 보십니까.
 
  『한나라당으로서는 大選을 앞두고는 분열을 근원적으로 막고, 大選에서도 분열을 막고 한다는 차원에서 좋은 카드라고 봅니다. 운영하기에 달렸죠. 과연 그 약속을 서로 지키느냐가 관건이죠. 가까운 예로 DJP 연합이 있잖습니까. 물론 DJP 연합은 정당 간의 연합이지만 정권을 공유해서 서로 운영했던 전례는 있죠. 물론 끝에 가서는 서로 좋지 않게 헤어졌지만』
    
  大選 전 정계 개편은 이루어진다
 
  ―趙의원께서 보시기에 현재의 민주당 인적 구성으로 차기 大選에서 후보를 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요? 글쎄요. 뭐, 당장 여론조사상의 거론되는 인물은 아직 없죠. 그렇기는 하나 정당이라는 게 아무리 의석이 적고 작은 정당이라도 정당은 정당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존 구성원 중에서라도 찾아서, 또 그런 의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내세우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다른 후보와 연합할 수도 있는 거고요』
 
  ―高建 총리 측과 합치든 열린당 일부와 같은 살림을 차리든 민주당 중심의 정계 개편이 돼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시죠.
 
  『그렇게 생각하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선 열린당과 한나라당을 제외하면 나머지 정당은 국민중심당밖에 없잖습니까. 민노당은 논외고요. 국민중심당 그리고 高建씨를 중심으로 한 세력 정도인데, 의석 차이는 얼마 안 나지만 민주당이 중심이 돼야죠.
 
  50년의 역사와 전통이 있고, 호남, 광주 전남과 전북 일부, 수도권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적 기반이 있고요. 그런 여건이나 현실로 봐서 「민주당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실제 논의에 들어가면 신중하게 해야죠. 겸손하고 겸허하게 해야지 그걸 「우리 중심이다」, 그래가지고는 안 되겠죠』
 
  ―민주당 내부에서 정계 개편의 전제로 反盧냐, 非盧냐 하는 입장 정리가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명분상으로 일단 기본성격은 反盧가 될 겁니다』
 
  ―기본노선이 反盧가 된다면 열린당 일부 의원 중에는 함께할 수 없는 분들이 꽤 있겠네요.
 
  『그렇죠. 韓和甲 대표도 이야기를 분명히 했지만 지난번 分黨(분당)을 주도한 사람들은 안 되겠죠. 물론 본인이 참여도 안 하겠죠. 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대상으로 안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大選을 앞두고 정계 개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보십니까.
 
  『이루어질 겁니다. 이루어질 수밖에 없죠. 원론적인 얘깁니다만 大選을 앞두고 정계 개편을 꼭 한 번씩 하고 이합집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정치 후진적인 현상이죠. 정당구조, 정치구조는 총선에서 국민들이 의석을 배정해 주는 것 아닙니까.
 
  주권자인 국민이 해주는 건데, 그게 다음 총선까지 지속돼야죠. 그래야지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됩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정계 개편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번 총선이 「탄핵 역풍」이라는 요소도 있었고, 더군다나 집권 여당이 지금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그러니까 정계 개편이 불가피하죠. 뭔가를 再정비해야죠』
 
  ―친하게 만나는 정치인은 누가 있습니까.
 
  『다른 분들과 잘 지내고는 있지만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계보도 없는 사람이죠』
 
  ―성격이 소극적이십니까.
 
  『저는 본래 내성적이거든요. 내성적인 사람이 소극적이죠(웃음). 제가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그때는 나서고 좀 그럽니다』
  
    『쓴소리 계속할 것』
 
  ―법대를 나오셨는데 고시에 도전할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시험이 어렵다고 생각해서 공부를 안 했어요(웃음)』
 
  趙舜衡 의원은 12代 때 문화공보委, 14代 때 교육청소년委 위원장을 지낸 것 빼고는 19년 의정생활의 대부분을 법제사법위(法司委)에서 보냈다. 법사위는 국회의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상임위 중 하나다. 예산을 따내는 일 등 지역구 사업과는 관련이 없는 상임위이기 때문이다. 趙의원은 이번에도 법사위를 택했다.
 
  ―법사위를 고집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국회는 기본적으로 입법부가 아닙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국회의원은 법에 대한 소양이 있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원이라면 법사위에서 한 번쯤은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각 상임위별로 넘어오는 법안 가운데 상충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것들을 법사위에서 조정을 해야 하니까 법사위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거죠』
 
  趙의원은 이야기 중 곁에 있던 비서관에게 갑자기 『국정감사가 언제지?』라고 물었다. 비서관이 『9월경 아닙니까』라고 대답하자 『큰일이네. 국정감사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라며 비서관에게 『내일부터라도 당장 국정감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현역 최다선인 6選이신데 「쓴소리」는 앞으로도 계속하실 겁니까.
 
  『그렇죠. 하도 「미스터 쓴소리」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이거 밤낮 쓴소리만 하고 지내는 사람이라는 것 아닌가, 좋은 일, 큰일, 적극적인 일은 못 하고 그냥 비판만 하고 쓴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쓴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현실이 그렇게 돼 가는 것 같아요. 지금도 저는 야당 국회의원인데 야당 국회의원의 본분이 뭡니까.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계속할 수밖에 없죠』
 
  趙舜衡 의원, 그의 말대로 그는 권력과 잘못된 제도를 향해 계속 쓴소리를 하게 될 것 같다. 국민들에게는 그의 「쓴소리」가 「단소리」로 들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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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인 金錦枝 여사가 말하는 내 남편 趙舜衡
 
  『재미없지만 유머감각은 있어요』
    
  「마누라 잘 만난 덕」
 
  趙舜衡 의원에게 부인 金錦枝(김금지·64) 여사는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처음 정치에 입문할 때도 金여사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고, 이번 7·26 재보선에서도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참모 역할을 했다.
 
  金여사는 연극배우협회 회장을 지낸 연극계의 원로로, 한때는 趙의원이 「연극배우 金錦枝의 남편」으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했다. 趙의원이 「미스터 원칙」, 「미스터 클린」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金여사의 헌신이 컸다. 연극활동을 하면서 구둣가게를 운영해 남편이 어디에다 손벌릴 이유를 원천봉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963년에 만나 5년간 열애한 후 1968년에 결혼해 슬하에 成德(성덕·36)씨와 素瑛(소영·35)씨 남매를 두고 있다.
 
  金여사는 2004년 총선 때 대구에서 趙의원이 낙선하자, 학교 강의를 접고 가족모임을 포함해 일주일에 네 번을 남편과 함께 외출했다고 한다.
 
  『남편이 낙선한 후 저는 이걸로 정치 인생이 끝난다고 해도 「내 남편의 삶은 절대로 실패한 삶이 아니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다섯 번이나 국회의원을 하면서 「미스터 클린이다」, 「올곧다」 그런 평가를 들었으니까요. 존경받으면서 물러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저는 제 남편이 남은 인생을 충분히 즐기면서 살아도 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즐기려면 돈이 필요한데 다행히 제가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된 거죠. 제가 그랬어요. 「마누라 잘 만난 덕」이라고요(웃음).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랬어요』
 
  ―재미없는 남편과 사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네, 재미없어요. 그런데 제가 재미있거든요(웃음). 남편은 내가 말만 하면 웃어요. 두 사람이 똑같이 재미있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주 재미없지 않아요. 유머감각이 있어요. 미적인 감각도 있고. 사진을 괜히 잘 찍는 게 아니죠.
 
  남편은 낯을 가리고 수줍어하고 내성적인데, 호랑이상으로 알려진 저희 시아버님도 사실은 내성적이었대요. 대신 한 번 사귀고 좋아하면 몇십 년이고 한결같이 사귀죠』
    
  「상식을 지키는 사람」
   
  ―너무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게 오히려 부담되지는 않습니까.
 
  『깨끗하다고들 하는데 맞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정상 아니에요? 돈 안 받아야 되는 거는 상식이죠. 유달리 남편이 깨끗해서가 아니라 상식을 지키는 게 그렇게 보이는 거죠. 남편만큼 깨끗한 사람들이 저는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바른소리도 당연히 해야 되는 소리예요. 다른 사람들이 안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돋보이는 거죠』
 
  ―일주일에 4일 외출을 하고 나머지 3일은 뭐하셨습니까.
 
  『나머지 사흘은 인터넷 뒤지고 공부하고 자료를 잔뜩 싸놓고 공부를 해요』
 
  ―趙의원은 공부 외에 취미가 없습니까.
 
  『아뇨. 그분 취미는 전쟁사예요. 제2차 세계대전史에 대해서는 박사예요. 모르는 게 없어요. 관련 서적도 많고.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였냐면 국방부 장관 아니면 해군제독, 국가정보를 관리하는 책임자 같은 걸 하고 싶어 했어요. 해군제독을 좋아한 것은 제복이 너무 멋있대요(웃음). 군함·탱크 모형 모으는 게 취미예요』
 
  ―趙의원이 보궐선거 출마 결심은 언제 하셨습니까.
 
  『이번에 5·31 지방선거 결과를 보고 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게 아니에요. 사실은 지방선거 이전에 결심을 했고, 출마 선언은 지방선거 이후에 하기로 했던 거예요』
 
  ―민주당 내부 사정 때문에 공천이 어려울 수도 있었는데요.
 
  『무소속이라도 출마하려고 결심했었어요. 주변에서 민주당 간판보다는 무소속 출마를 권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그런데 남편은 선친과 민주당의 인연, 그리고 자신이 당대표를 지낸 인연 때문에 민주당 공천이 순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천을 신청했던 거예요. 다행히 공천이 된 후 민주당이 주류·非주류 없이 돕더라고요. 참 고마웠습니다』
 
  ―趙의원께서 친하게 지내는 정치인들이 있습니까.
 
  『성격상 별로 없어요.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분들은 있어요. 함승희 의원, 김경재 의원, 김충조 의원, 신순범 의원, 이철 의원 같은 분들을 남편이 좋아했어요』
 
  ―趙의원이 어떤 직책을 가졌으면 좋겠습니까.
 
  『국회의장을 하면 근사하게 할 것 같아요. 공정하게 하고, 할 얘기 하고, 참 멋지게 할 것 같아요』
 
  ―장관은요.
 
  『金大中 대통령 시절 법무장관 후보로 오르내리기는 했어요. 그런데 안 시키더라고요(웃음). 교육계에서 교육부총리로 추천한 적이 있었죠. 언론사에서는 되는 것으로 알고 전화도 오고 그랬는데 남편은 임명직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아요. 「예스 맨」이 아니니까(웃음)』
 
  ―남편으로서 趙舜衡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좋은 사람이죠. 나(아내)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나 역시 그렇지만(웃음)』
 
  ―두 분 중에 누구 배짱이 더 큽니까.
 
  『하나를 예로 들게요. 1970년대 동아일보 사태 때 남편은 동아일보 격려광고를 하면서 3000원 자리 조그만 광고를 내면서 자기 이름도 안 쓰고 「성덕 아빠」라고만 적었어요. 저는 10만원짜리 광고를 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립습니다」라고 써놓고 시아버님 사진도 넣고 제 이름도 넣었어요』
 
  말을 마치고 金여사는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정말 대비되는 부부였다.● 
 

입력 : 2007.07.23

조회 : 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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