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1. 문화

연극 <1984> '거짓과 광기의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조지 오웰의 <1984> 극화....오늘의 한국 현실 연상케 해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연극 <1984>, 국립극단, 한태숙 연출.
소설을 극화한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면, 늘 원작을 어떻게 요리했을까에 관심이 간다. 한태숙 연출의 연극 <1984>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조지 오웰의 원작을 요리한다.
   
시작은 한 무리의 독서클럽 사람들이 어떤 책에 대해 토론하는 걸로 시작한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1984>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관객들은 알 수 있다. 조금 더 듣다보면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때는 1984년으로부터 한참 지난 후의 세상임을 알 수 있다. 미래에 되돌아보는 <1984>라니! 기발하다. 하지만 이들이 언급하는 <1984>의 세계가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의 세계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들 한 구석에 기력이 빠진 추레한 모습의 사내가 앉아 있다. 독서클럽 멤버인 한 여성이 그를 알아본다.
“당신 윈스턴, 윈스턴 스미스죠?” 
물론 그녀가 어떻게 윈스턴 스미스를 알아보았는지, 윈스턴이 왜 거기에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우리가 익히 아는 <1984>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3개의 초거대국가간의 전쟁이 일상화되고 ‘자유는 굴종,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이라는 도착적(倒錯的)인 모토를 내건 당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 새말(신어‧新語)를 사용한 과거와 현재의 왜곡, 이중사고, 2분 증오, 진리부에 근무하는 윈스턴 스미스가 일기장을 사서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나가는 이야기, 윈스턴과 줄리아의 위험한 사랑, 오브라이언이 이끄는 지하조직에의 가담, 체포, 고문, 그리고 윈스턴의 굴복…. 
연극은 원작의 핵심적인 개념들과 중심 스토리들을 잘 포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처음에는 연극에 확 몰입하지 못했다. 아마 ‘원작과 연극은 얼마나 다를까’하는 생각에 몰두해서였을 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연극 속에 빠져들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굴종하기를 거부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려는 윈스턴을 보면서는 ‘지금 이 시대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저런 일’이라며 나 자신을 이입시켰다. 애정부(사상경찰)에 체포되어 처절한 고문을 당하는 윈스턴을 보면서는 ‘저런 지경을 당하면 나는 얼마나 굳건하게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과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윈스턴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망치로 얼굴을 후려쳐도, 전기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던 윈스턴은 결국 가장 잔혹한 고문, 즉 얼굴을 쥐들에게 뜯어먹히게 하는 고문을 당하게 되자 이렇게 외친다.
“제발 나에게 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에게 해요! 줄리아에게, 줄리아에게 해요!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해요!”
그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공할두려움 앞에서 이상(理想)도 이념도 다 던져버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그렇게 사랑하면서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했던 연인의 이름을 올리면서 그녀에게 하라고 절규하는 윈스턴을 보면서 ‘저게 인간이다, 저렇게 이기적인 게 인간이다, 저렇게 약한 게 인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신(神)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일까? 
연극을 보는 내내 ‘읽다 만 소설 <1984>를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대목에 이르러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연극은 소설만큼 먹먹하지는 않지만, 역시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리고 한 순간, 연극은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어느 순간 사라졌던 독서클럽 멤버들이 돌아온다. 클럽의 리더는 “윈스턴 스미스는 가공의 인물”이라면서도, 저자가 누구냐고 묻는 회원의 질문에 “그가 누구인지는 밝혀진 바 없다”고 말을 흐린다. 
 “당은 없어졌다”고 회원들이 말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당’이 소설 <1984>속의 영국사회당인지, 연극 속에서 독서클럽 멤버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지배했던 전체주의 정당인지, 혹은 지금은 사라진 동구 현실사회주의 정당인지 애매하다. 심지어 여성 회원 한 명은 “혹시 당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니냐? 당이 없어진 것으로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그렇게 믿게 만든 것 아니냐?”는 말까지 던진다. 
      
자리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는 여전히 멍을 때리고 있다. 그가 애정부(사상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전향을 해서 목숨을 용케 부지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그때까지 몹쓸 악몽을 꾸다가 깨어난 것인지도 애매모호하다. 당연히 원작 <1984>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 즉 간수의 총알이 머리통을 뚫는 순간 윈스턴이 눈물을 흘리며 빅브러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연극에서는 볼 수 없다. 윈스턴역을 맡은 이승헌이 이 연극에서 보여준 연기력이면, 그 장면을 참 잘 해냈을 것 같은데....이 연극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연극은 그렇게 그 세계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에 대해 불분명한 상태에서 막을 내린다.(내가 너무 생각을 많이 했나?)
그런데  그 비현실적인 설정이 내게는 오히려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해서였다. 겉으로 보기에 대한민국은 아무 일 없다. 강남역 사거리에는 여전히 청춘남녀들이 넘치고, 인천공항은 해외로 나가는 인파로 붐비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방송이 거짓말방송으로 정부를 전복(顚覆)시켰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세상은 무사태평해 보이지만 한편에서는 정권의 응원을 받는 홍위병들이 공영방송 이사진을 협박해 쫓아내고 있다. 법원 간부들이 물갈이 됐다. ‘적폐청산’의 와중에 누구는 감옥에 갔고, 누구는 언제 감옥에 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적폐청산’ 조사에 불려 다니던 국정원 직원은 자살했다. 하지만 TV는 교통사고로 죽은 탤런트 얘기의 1/10만큼도 그의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연예인들이 웃고 떠드는 방송국 한 켠에서는 연극 속 ‘2분 증오’ 시간과 같은 증오로 무장한 노조원들이 KBS 이사를 포위하고 린치했다. 
무사태평한 대한민국과 싸우는 대한민국,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현실이 아닌가? 우리 사회는 거짓의 지배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명동예술극장을 나섰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거리는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 11월1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연일 매진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서두르셔야 할 듯.

입력 : 2017.11.04

조회 : 737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