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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장교들의 최초 증언 - HID 對北 작전 秘史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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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장교들의 최초 증언 - HID 對北 작전 秘史 
 

1·21 청와대 습격 보복作戰  

   
 공작원 6명이 DMZ의 북한군 GP 공격, 소련 군사고문단 1명 포함 23명 사살

사형수와 무기수 32명으로 「선갑도 부대」 창립, 서해 옹진군의 무인도서 훈련

 

● 6·25 때 毛澤東은 밀사 보내 유엔군 38선 돌파시 중공군 개입 경고했다.
● 일본의 「오무라 난민수용소」를 對北 침투 우회 루트로 이용했다.
● 1972년 7·4 南北공동성명 최초 막후 교섭자는 첩보부대 장교였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北派공작 장교 모임 「眞白會」

 
 2002년 3월15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는 20여 통의 LPG 화염이 치솟고 쇠파이와 투석이 난무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피 칠을 한 돼지와 닭도 내던져졌다. 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실체 인정과 北派(북파)공작 활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북파공작원(HID)들의 시위였다. 陰地(음지)에서 陽地(양지)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은 충격이었지만, 그들의 요구는 언젠가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였다.
 
  당시 기자는 북파공작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벌여온 對北(대북) 침투공작과 희생 사례를 수집하고 있었다. 20여 명의 북파공작원을 만나는 도중 북파공작 활동에 참여한 장교들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95년에 창립된 「眞白會(진백회)」라는 모임이었다. 육군첩보부대 출신으로 3년 이상 공작부서에서 근무한 장교 출신들의 모임이었다.
 
  육군첩보부대의 효시는 美 군정청 산하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다. 육군첩보부대는 1948년 국군 창군 후 육군본부 정보국內에 소속돼 있다가 1951년 3월에 독립했다. 1972년에는 「육군정보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0년에는 陸海空軍(육해공군) 정보부대가 통합돼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가 됐다.
 
  眞白會 회원 대부분은 육군첩보부대에서 근무를 시작해 육군정보사 시절 전역을 한 장교들이었다. 대부분이 北派공작과 對北 보복공격이 활발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공작활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기자는 당시 眞白會 회장인 金元漢(김원한·78·예비역 대령)씨를 만날 수 있었다. 충주사범학교 졸업 후 1953년에 갑종 61기로 임관한 金씨는 육군첩보부대, 정보사령부를 거치면서 공작과장·첩보과장·남산대장을 역임했다. 그 과정에서 對北 보복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1960년대 말에는 전방부대에서 특수공작원을 동원한 보복공격 지휘 등을 담당했다.
 
  그에게 對北 첩보공작과 관련한 증언을 요청했지만 『회장이라고 해서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다. 회의를 열어서 결정하고 결과를 알려 주겠다』고 했다. 결과는 『증언을 하지 않겠다』였다. 그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수행한 對北 첩보전을 우리 사회가 너무 흥미로만 보고 있고, 아직은 장교 출신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비밀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년여 동안 틈틈이 『모임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라도 증언해 달라』고 金씨를 설득했지만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金씨와의 만남이 끊긴 지 3년여가 되던 지난 4월 기자는 북파공작 장교 출신들이 또 다른 모임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임의 이름은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였다. 모임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총회가 열린 지난 4월26일 총회장소인 서울 용산구 소재 「용사의 집」을 찾아갔다.
 
  60代 이상으로 보이는 50여 명의 對北 첩보업무에 종사했던 전직 장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당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북파공작 등 특수임무수행자에 대한 보상에서 장교 출신을 제외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금전적인 보상보다 이들을 더 화나게 한 것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한 일 자체를 당국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4년간의 설득 끝에 證言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의 회장은 眞白會 회장이었던 金元漢씨였다. 金씨는 그 자리에서 기자에게 모임의 명예회장인 李春國(이춘국·78·예비역 대령)씨를 소개해 주었다. 李씨는 6·25전쟁 발발 후 육본 정보국 소속 특수요원으로 낙동강 전선 敵(적) 후방에서 유격대 활동을 벌이다 갑종 22기로 임관했다.
 
  첩보부대 작전과장과 정보단장을 역임한 李씨는 1950년 7월 육군본부 정보국에 들어갔는데, 그해 10월 밀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다 체포된 毛澤東(모택동)의 밀사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1968년 1·21 사태 후 「선갑도 부대」, 「설악개발단」 등의 對北공작 특수 부대 창설을 기획하고 훈련 등의 실무를 지휘했다. 다대포 간첩사건 逆(역)공작 작전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1979년 8월에 전역한 후에는 「陸軍情報史(육군정보사) 40年史」, 「육군정보 교범」, 「국군정보 50년사」를 책임 편찬했다.
 
  金元漢씨는 李春國가 어떤 분인지 소개해 주었다.
 
  『李명예회장은 對北첩보와 관련한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비슷한 연배의 첩보부대 출신들도 있지만 그분들은 자기가 소속해 있던 한 부분만 잘 알지 李회장처럼 對北 첩보전 전체는 알지 못하죠. 李회장은 현장에서는 물론이고 첩보부대 본부에서 공작과 작전 전체를 기획한 분입니다. 책도 편찬하셨고요』
 
  李春國씨는 金元漢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金회장은 저를 첩보부대의 산 역사라고 하는데, 사실은 金회장만큼 對北 공작활동이나 첩보활동을 많이 알고 직접 체험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기자는 두 사람에게 對北 공작활동과 관련한 증언을 다시 요청했고,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지금까지 첩보부대 출신의 공작 장교들은 자신들의 지난 활동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2005년 10월 첩보부대장을 지낸 金東石(김동석·84)씨가 회고록 「金東石 이 사람!」을 통해 첩보부대 시절 자신의 공작활동을 소개하는 책을 내고, 일부 장교 출신들이 그 활동상에 대해 반박하는 등의 일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장교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가겠다」던 이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의 수석 부회장인 朴貞夫(박정부·67·예비역 중령)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휴전협정 위반, 공작활동의 노출 등 국익에 반하는 폭로들이 이미 추스를 수 없을 만큼 이어졌어요. 우리가 가슴에 품고 무덤까지 가져가려던 것들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시대가 된 거죠. 그것도 너무 왜곡돼서 말이죠. 최소한 우리 첩보부대에 대한 왜곡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로잡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명예회복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북파공작 등 특수임무수행자에 대한 보상에서 우리 공작장교들을 제외시켰다는 것은 우리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목숨을 걸고 敵지역 침투 공작에 참여한 사례가 무수히 많은데 왜 장교만 보상 대상에서 빠져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담보로 남북 분단 체제에서 최전선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음지에서 대한민국을 지켜 왔다는 긍지와 명예를 반드시 찾을 겁니다. 우리는 현직에서 떠났어도 애국심과 명예를 먹고사는 장교들입니다』  
  
  毛澤東의 밀사
  

  두 예비역 영관 장교들의 증언은, 月刊朝鮮 사무실 등에서 첩보부대 두 元老(원로)의 증언 후 朴貞夫씨가 다시 확인과 보충설명을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3명이 증언에 참여한 셈이다.
 
  이들은 증언을 통해 『6·25 전쟁 당시 중국 毛澤東이 9·28 서울수복 무렵 서울로 밀사를 보내 38선에서의 휴전 제의와 함께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경우 중공군의 개입을 경고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또한 『공군의 「실미도 부대」처럼 육군도 對北 특수공작부대인 「仙甲島(선갑도) 부대」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까지 운영했다』고 증언했다. 32명의 부대원들은 사형수와 무기수들로 사면을 조건으로 채용됐다고 한다.
 
  두 예비역 영관장교들의 증언에 의해 그동안 逆공작을 통한 간첩 검거 가능성이 제기돼 온 1983년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의 逆공작 주체가 당시 안기부와 정보사령부였음을 확인했다.
 
  다음은 一問一答(일문일답)을 통한 李春國씨의 증언이다.
 
  ―중공軍 개입을 정보보고를 통해 조기경보했다고 하는데, 그 정보는 어디서 얻은 겁니까.
 
  『제가 국방부 정보국에 있을 때였는데 毛澤東이 보낸 밀사가 체포된 후 우리 부대로 보내졌어요. 밀항을 통해 서울로 잠입하다가 체포된 거죠.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입니다』
  
2005년 1월11일 오후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북파공작원 전사자 위패 봉안식 행사. 영송원들이 전사자 74명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탑으로 봉송하고 있다.

 
  『중공軍 개입 경고했다』
 
  ―당시 정보국장은 누구였습니까.
 
  『장도영 장군이었죠. 맥아더 회고록에 보면 「중공군이 개입할 줄 몰랐다」고 돼있는데 저는 그게 궁금해요. 우리가 올린 첩보가 중간에서 차단된 건지 맥아더 사령관이 보고를 받고도 무시한 건지 지금도 궁금해요』
 
  ―밀사의 신분과 지위는 어땠습니까.
 
  『제가 감시 역할을 하면서 그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었어요. 중공군 문화부사단장인데 이름은 金平(김평)이었어요. 조선사람이었죠. 제가 이 사람이 진술한 것을 받아적은 후 일일보고 하고 그랬죠. 자기 스스로 「毛澤東의 지령을 받고 왔다」고 했어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제 기억으로는 40代 초반의 나이였는데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어요. 사람이 깡말랐는데 인상은 학자 타입이었죠. 옆에서 지켜본 그 사람은 인텔리였어요』
 
  ―어디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었습니까.
 
  『그때 우리가 있던 安家(안가)가, 서울 종로구의 옛날 화신백화점 자리 뒤에 천도교 회관이 있었는데, 그 건너편에 민씨 집이라고 있었어요. 지금도 흔적이 조금 남아 있던데요. 거기서 자고 하던 때가 1950년 10월입니다』
 
  ―한국으로 밀항한 목적이 뭐였답니까.
 
  『그 사람의 주장은 「중공군에 관한 것을 李承晩 대통령이나 맥아더 장군을 만나게 해주면 이야기하겠다」는 거예요. 나중에 목적을 이야기했는데 「유엔군이 더 이상 북진하지 말고 38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거였어요. 만약 돌파하면 중공군이 개입하겠다는 거였죠. 그 사실을 계통을 통해 다 보고했죠』
 
  ―그 이후 金平은 어떻게 됐습니까.
 
  『저도 그 이후로는 그 사람의 생사를 몰라요. 생사를 모르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죠』
 
  李씨는 당시 「중공군 개입」 경고 정보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됐는지 안 됐는지가 지금도 궁금하다고 거듭 말했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밀사」 金平이 서울에 와서 전한 毛澤東의 제안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외상 周恩來(주은래)는 1950년 10월1일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데 이어, 3일에는 베이징 주재 인도대사를 불러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온다면 중공도 개입할 것』이라는 말을 미국에 전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정말 중공군의 개입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웨인트로브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는 그의 저서 「맥아더의 전쟁」에서 6·25 전쟁에서 맥아더의 가장 탁월한 전략은 인천상륙작전이었던 반면, 가장 큰 실책은 중국의 참전을 예상치 못한 것을 들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15일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열린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했다.
 
  6·25 전쟁 참전자들의 회고록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가능을 높게 보고 있으면서도 개입을 방조함으로써, 차제에 중국 공산당까지 공격하기 위한 기회로 삼으려 했을지 모른다」는 분석에 힘을 주고 있다.
    
  특수임무공작부대 창설 기획자
  
  李春國씨는 1968년에 향토예비군 설치법이 시행되는 데에 첩보부대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태 후 그해 2월에 국무회의에서 「향토예비군설치법안」이 의결됐는데 야당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때 일본 東京에 나가 있는 우리 공작팀에서 북한 영화를 입수해서 보냈는데 그걸 국회에서 상영한 후 법안이 통과됐죠』
 
  ―무슨 영화였습니까.
 
  『「불패의 힘」이라고, 우리로 말하면 예비군에 해당하는 북한 노농적위대의 훈련상황을 보여 주는 내용이었죠. 與野 국회의원들이 그 섬뜩한 장면을 보고 우리도 예비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거죠. 국회에서 영화 상영 다음 날 법안이 통과됐어요』
 
  ―그때 북한으로부터 필름 입수공작을 벌인 분은 생존해 있습니까.
 
  『김상열이라는 분인데 당시 계급이 소령이었어요. 영어도 잘하고 일본어도 잘하는 사람인데, 작년에 캐나다로 이민 갔어요』
 
  1·21 사태는 양지에서는 향토예비군을 탄생시켰지만, 음지에서는 남북 간 전쟁에 버금가는 피의 보복戰(전)을 벌이게 했다.
 
  ―1·21 사태 후 영화로 유명해진 「실미도 부대」 같은 對北 특수임무공작 부대들이 탄생하게 되는 거죠.
 
  『「실미도」 부대는 공군이 했고, 우리 육군은 「선갑도」 부대에서 對北 특수임무공작원을 교육시켰어요』
 
  선갑도는 서해에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승봉리다. 현재 무인도이며, 선갑산의 높이는 352m다. 6·`25 전쟁 때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駐韓(주한)연락처 8240부대가 주둔했었다.
 
  ―창설 시기는 역시 對北 특수공작단인 「설악개발단」과 비슷하겠네요.
 
  『그렇죠. 1968년에 창설됐어요. 창설 준비를 기획하고 있을 때 저는 월남에 파견 나가 있었는데, 부대장이 귀국하라고 해서 돌아왔어요. 부대장한테 귀국 신고한 직후부터 특수공작부대 창설을 제가 실무적으로 지휘했어요. 전략목표·전술목표·훈련계획 등을 정하고 현장 지도도 했죠. 선갑도 부대가 803대, 중앙물색조를 훈련시키는 809대, 설악개발단 909대가 그때 창설됐죠』
    
  仙甲島 부대원은 사형수·무기수 출신
  
1968년 1·21사태 때 유일하게 체포된 김신조씨. 이 사건 후 육해공군에 對北 보복공격을 위한 특수부대가 설치됐고, 향토예비군법이 시행되었다.

  ―영화 「실미도」에서 보면 죄수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하던데 선갑도 부대도 그랬습니까.
 
  『오히려 실미도 부대는 민간인들을 선발했고, 우리 선갑도 부대가 무기수와 사형수들을 선발했죠. 32명이었어요. 실미도 부대는 우리와 게임이 안 되죠』
 
  ―어떤 代價(대가)를 주고 선발한 겁니까.
 
  『사형수나 무기수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면시켜 주는 조건이었죠』
 
  ―仙甲島 부대원 중 생존자들 증언에 따르면 사면 외에 현금 3000만원을 주기로 했다는데요.
 
  『그 당시 기준으로 3000만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그 부대를 만들 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습니다』
 
  ―훈련 도중 상부 지시에 의해 같은 부대 동료가 동료를 목졸라 죽이는 일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던데요.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선갑도 부대가 창설된 후인 1970년 초 양구부대장으로 갔는데, 제가 본부에 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생존 부대원들이 실미도 사건이 요란하게 떠벌려진 이후 혹시 우리도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저는 제가 양구로 간 이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실제 對北 침투작전을 했습니까.
 
  『1969년에 백령도까지 2회 출정했었는데 중앙정보부 승인이 안 떨어져서 돌아왔어요. 명령은 중앙정보부장이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이철희씨가 했죠. 그분도 첩보부대 출신입니다. 그분이 의지가 없었어요. 「그만두라」고 했어요. 잘못하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까』  
  
  선갑도 부대원들 모두 사면조치
 
  ―부대원들은 모두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전부 해고했습니다. 1971년 8월에 있었던 실미도 부대원들의 난동사건도 부대 해체에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약속한 보상은 해주었습니까.
 
  『1인당 당시 150만원을 지급했고 사면도 해주었습니다. 당시 150만원은 생활기반을 잡을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어요』
 
  ―당시 선갑도 대원이었던 생존자들은 「제대로 보상을 못 받았고 사면도 엉터리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돈을 줘가지고 사면증을 만들어서 우리 보안장교가 선갑도 부대원의 고향까지 데려가서 경찰서에 인계했어요. 당분간 보안조치해 달라고 부탁한 거죠』
 
  ―범죄 사실이 완전히 사면조치됐다는 말씀이네요.
 
  『네, 그래요. 완전히 사면했어요. 사면하는 데 법조항이 없다고 해서 제가 관계 법률을 전부 뒤져서 해당조항을 찾아냈어요. 그때는 장관급의 승인이 있으면 사면이 된다는 예외 조항이 있더라고요』
 
  1968년 1월21일 발생한 청와대 피습 미수 사건에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동원됐다. 당시 31명 중 김신조씨 1명이 생포됐고, 확인된 시신은 27구였다. 3명이 사라진 것이다.
 
  사실은 이때 사라진 3명 중 2명이 당시 생포돼 북파공작에 길 안내인 역할을 맡았다는 소문이 최근까지 있었다. 李春國씨와 金元漢씨는 『당시 현장에서 사라진 사람이 3명인 것은 맞지만 그중 2명이 우리 공작원들이 북파될 때 길안내를 맡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침투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중 김신조씨 외에 남한에 생존해 있었거나 현재 있는 사람이 정말 없다는 말씀입니까.
 
  『김신조씨 외에 현장에서 사라진 세 사람이 더 있었던 것은 맞아요. 그중 한 명은 평양으로 귀환해 인민군 고위간부가 됐어요. 일부 언론에 보도가 됐잖아요. 2000년 9월 金正日 특사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를 수행해 송이버섯을 전달하고 간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총국장 박재경이고, 나머지 두 명은 도주 도중 사망했어요』
 
  ―그 두 명의 시신은 확인했습니까.
 
  『그들을 추적하다가 연대장 한 명이 적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들은 유격전에 이런 게 있어요. 세 사람이 함께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아요. 항상 삼각개념으로 움직여요. 서로 위험하면 도움을 주고 하면서. 북한산 뒤로 해서 송추로 해서 도망갔죠. 우리 대간첩작전 부대가 포위를 했는데 그 상황에서 연대장이 총을 맞은 거죠.
 
  그 당시 참모총장이 김계원씨였는데, 「잡으면 뭐할 거냐」면서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105mm 무반동총 등을 퍼부었어요. 그때 두 명이 죽고 한 명은 넘어간 거죠. 사살된 2명의 시신이 확인됐을 겁니다. 그때는 우리가 對北 침투공작을 담당하는 공작과장 첩보과장할 때인데, 1·21사태 때 생존자를 길 안내자로 쓴 적이 없어요』
 
  1960년대 말 1·21 사태와 울진삼척지구 간첩침투사건, 휴전선 일대에서 벌어진 상호 간의 보복공격 등으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전환점이 된 것이 1972년 7월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오기 전까지 남북한은 1971년 11월부터 1972년 3월까지 대한적십자사의 鄭洪鎭(정홍진)씨와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이 각각 실무자로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벌였다.
  
1983년 12월16일 부산 다대포 간첩침투사건에서 체포된 이상규씨와 전충남씨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하고 있는 김신조씨(맨 오른쪽). 다대포 사건은 그동안 逆공작에 의한 간첩체포사건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7·4 남북공동 성명의 최초 비선
 
  이 접촉을 바탕으로 1972년 5월에는 李厚洛(이후락) 당시 중앙정보 부장의 평양 방문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이 이루어짐으로써 7·4 남북공동성명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남북 비밀접촉을 먼저 제안한 쪽은 어디일까. 첩보부대 출신 영관 장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북한 金日成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鄭洪鎭·김덕현 비밀접촉 이전에 양측 공작 장교들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李春國씨의 증언이다.
 
  『우리는 문산·전곡·운천·양구·속초 등 전방지대에 6개 공작대를 두고 있어요. 이 6개 공작대에서 한 달에 보통 1건 내지 2건 침투공작을 펼치죠. 몰래 適地에 들어가서 잠복하다가 순찰대·통신소·중계소 같은 데에서 죽이고 두들겨 부수고 했으니 전쟁 아닙니까. 그쪽은 하도 당해서 창피하니까 함부로 對南방송도 못 했어요. 그런 공작이 있은 후에는 판문점 유엔감시단에서 전화가 와요. 「그런 일 있느냐, 없느냐」고 물어오는 거죠. 그 전화를 제가 받는데 「그거 그 사람들 상투적으로 하는 주장인데 그걸 믿으면 어떡합니까」 하면 나중에는 서너 번 하다가 아예 전화도 안 해요』
 
  金元漢씨의 이어지는 증언이다.
 
  『우리의 보복공격이 격렬하니까 金日成이가 「우리 이렇게 싸울 것 아니지 않느냐, 우리 서로 만나서 의논하자」고 한 거예요. 그랬던 것인데 서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라인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요새는 많지만 그때는 라인이 없으니까. 그 라인이 우리 첩보부대 2중공작 라인이었다는 거죠. 더블류 라인이죠. 왔다 갔다 주선한 사람이 남북 모두 거물급 인물이었죠』
 
  ―구체적으로 누구였습니까.
 
  『원래 국군 장교였다가 전쟁 후 북쪽에 잔류한 사람이 있어요. 국군 장교였다가 인민군 고위 장교가 된 사람이에요. 그 정도로만 이야기하죠』
    
  장교 참여 보복공작으로 23명 사살
  
1972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金日成. 이 남북 접촉의 최초 비선은 첩보부대 2중공작 라인이었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침투공작이 1980년대에도 있었죠.
 
  『1980년대까지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조종관으로서 공작조를 이끌고 여러 번 북방한계선을 넘었다는 金元漢씨가 자신이 직접 지휘한 보복공격 사례를 한 가지 소개했다. 이 공격으로 소련군 군사고문관을 비롯 인민군 23명이 사망했다.
 
  金씨는 그 사례를 소개하는 이유를 『당국이 북한공작원 보상 대상자에서 장교 출신들을 제외했는데, 장교 직분의 공작원들이 일반 공작원들과 똑같이 훈련하고 침투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은 金元漢씨의 증언이다. 金씨는 보복공격을 감행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68년 초에 첩부부대장이 남산대·인천대·전곡대·우리 운천대 4개 부대를 합쳐서 보복공작을 하라고 했어요. 제가 공작과장할 때였죠. 현역 소위 4명, 중위와 대위 각 1명씩 6명을 선발하고 4개 부대를 통합해서 계획을 세웠어요. 6사단하고 3사단의 경계선 지역(철원)이었는데, 일반 부대들은 우리가 들어오는 걸 싫어해요. 우리가 보복하고 나오면 걔들도 보복이 들어오니까. 지형 정찰 이런 것을 수십 번 했어요. 실제 북쪽 지역으로 들어가는 침투 훈련도 했고요. 들어가서 공격하는 날은 1968년 11월16일로 정해졌어요. 지금도 저는 그 날짜를 안 잊어버려요.
 
  그날 아침 10시였어요. 우리 쪽 GP에서 장교 공작원 6명과 공작원 6명이 잠복해 있는 상대편 목표 지역을 보니까 안개가 끼었는데, 목표지역 敵 GP로 지프와 호송차가 들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그 순간 크레모아가 터지고 두 시간 동안 기관단총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격전이 벌어졌어요. 지프 안에는 소련軍 군사고문관이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참 초조했어요. 그때는 포병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비상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낮 12시쯤 넘으니까 한 사람씩 돌아오는 거였어요. 하나 둘 나오는데 한 사람만 안 나왔어. 보니까 제가 데리고 있던 김일동 소위가 파편을 맞았어요. 제가 「너 피난다」 하니까 그때부터 절룩거리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몰랐던 거죠. 정신상태가 대단한 거예요.
 
  그날 제가 들어갔던 우리 측 GP에 조종관인 정인배 소령하고 키퍼를 머물게 했어요. 혹시 밤에 저쪽 GP에서 보복공격이 나올지 모르니까 그렇게 했죠. 아니나 달라요. 그날 밤에 걔들이 습격을 왔어요. 정인배 소령이 들어오는 걸 그냥 막 갈겨 버렸죠』
    
  요도號 납치사건 당시 인민군 역할
  
  ―빠져나오지 못한 한 명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중에 빠져나왔어요. 저는 지금도 그 공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요. 하나도 희생 없는 게 얼마나 좋던지』
 
  이날의 공로로 이들 팀에는 충무무공훈장 5개 등 훈장이 12개가 수여됐다고 한다.
 
  ―지프에 타고 있던 사람이 소련軍 군사고문관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다음해에 그쪽 GP장이 귀순했어요. 유 무슨 소위였는데 신문 과정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우리는 한 명의 피해자도 없는데 그쪽은 23명이 죽었다는 거예요. 공격 당시 큰 성공이라는 것은 직감했지만 그 정도 전과를 올릴 줄은 몰랐죠. 혹시 귀순한 GP장의 이름이 필요하면 확인해 줄 수 있어요』
 
  金元漢씨는 요도號 사건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요도號 사건은 1970년 3월31일 일본 赤軍派(적군파) 9명이 東京(도쿄)發(발) 후쿠오카(福岡)行(행) 항공기 요도號와 승객·승무원 129명을 납치해 북한으로 가려다 기장의 기지로 김포공항에 착륙한 사건이다.
 
  3일간 한국 軍警(군경)과 대치 끝에 적군파 9명은 인질로 잡고 있던 승객들을 풀어 주고 대신 일본 정무차관을 인질로 삼아 평양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범인들에게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인민공화국기를 걸고 원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들, 다발총을 든 인민군들을 동원했다.
 
  이 가짜 인민군 30여 명을 김포공항으로 이끌고 간 사람이 金元漢씨였다. 첩보부대 첩보과장 시절이었는데 본부에 인원이 없어서 속초첩보부대원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金씨는 인민군 상좌 계급을 달고 가짜 인민군을 인솔해 갔다고 한다.
 
  평양으로 향하던 요도號를 김포공항으로 유인한 공작 주체가 당시 중앙정보부인지 국방부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요도號를 김포공항으로 유인한 것도 일종의 공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공작 주체는 어느 기관이었습니까.
 
  『공작은 중앙정보부와 첩보부대의 협조로 이루어졌습니다. 中情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죠. 우리 부대원들이 김포공항에 가서 대기하고 있던 곳이 中情이 세관업무를 하는 곳으로 위장해 사용하고 있던 100호실이었어요. 당시 첩보부대는 대부분의 업무를 中情의 지시를 받아서 하는 상태였습니다』  
  
  정보사령관이 다대포 간첩 逆공작 자문 요청
 
  ―가짜 인민군들의 현장 투입은 왜 안 했습니까.
 
  『청와대에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고 철수했어요. 만약 비행기가 억류돼 있는 곳으로 투입됐다면 총격전이 벌어졌을 겁니다』
 
  月刊朝鮮 2002년 5월호에 기자가 쓴 북파공작원들의 비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북파공작원들이 투입된 對간첩작전은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에서는 전충남·이상규 등 두 명의 무장간첩이 생포되었다. 두 사람을 직접 생포한 사람은 李起建(이기건)씨와 金奉夏(김봉하)씨였다.
 
  이들은 당시 계급이 각각 병장과 상병으로 알려졌고, 육군 7376부대 소속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언론에는 두 사람의 기자회견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회견에서 두 사람은 『총을 쏘며 뛰어나가 총 개머리판으로 이들을 때리고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고 말했다.
 
  사실은 다르다. 이들은 북파공작원들로 당시에 이들의 손에 있던 것은 총이 아닌 박달나무 몽둥이 한 자루씩이었다. 金奉夏씨는 『당시 개머리판 얘기는 기자회견 전에 만들어진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었다』면서 『우리 북파공작 요원들이 단장을 포함해서 36명이 당시 작전에 참여했고, 나는 계급이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다』고 말했다.
 
  다대포 사건은 그동안 1960년대에 귀순한 간첩을 이용한 逆공작에 의한 「작품」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金씨의 증언은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부터 체포작전훈련 후 현장에 투입됐다』고 金씨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李春國씨는 증언을 통해 1983년 다대포 간첩사건은 국가안전기획부와 정보사령부가 합작한 逆공작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차장이 朴世直(박세직)씨였는데, 당시 정보사령관이었던 李相珪(이상규)씨와 두 사람이 육사 동기예요. 이상규 사령관이 안기부로부터 전향한 간첩을 이용한 逆공작 제안을 받고 저한테 자문을 해왔어요. 저는 하라고 그랬어요. 최초에 구상할 때 저도 참여한 셈이죠. 공작원만 침투시키는 게 마음이 안 놓이니까 장교 하사관들도 투입했어요. 이 사령관은 머리가 약간 없는데 가발까지 쓰고 현지 정찰을 했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逆공작이에요』
 
  對北공작에는 직접침투 외에 우회해서 침투하는 방법이 있다. 주로 제3국을 통한 우회침투에 첩보부대가 동원되었었다고 한다. 지금은 노출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에 대한 우회침투로로 활용되던 곳이 일본 오무라(大村) 수용소였다고 한다.
    
  전방을 통한 위장 귀순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오무라 수용소는 한국인 밀항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공작원이 밀항을 통해 일본에 가면 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된다.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이다. 오무라 수용소에서는 수용자가 北으로 갈지 南으로 갈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점을 이용해 北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金元漢씨의 一問一答식 증언이다.
 
  ―실제 오무라 수용소를 통해서 북한에 많은 침투를 했습니까.
 
  『공작 차원에서 간 사람은 있어요』
 
  ―그렇게 해서 성과는 나옵니까.
 
  『오랜 시간이 걸려서 하는 일이라 기대에는 못 미쳐요. 우리나라 전선에서 위장 귀순시키는 것 있잖아요? 그것도 잘 성과를 못 봤어요. 북쪽에 연고가 있는 사람을 보내 위장 귀순시키는데, 걔들은 귀순한 사람을 3년간 교육을 해요. 그렇게 의심이 많으니까 성과를 내기가 어려웠죠』
 
  일본을 통한 침투 이야기가 나오자 李春國씨가 1973년 대구에서 정보단장으로 있던 시절 자신이 직접 추진하다가 중단한 공작사례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6·25 전쟁 때 인민군 중좌로 포병대대장을 하던 김일신(가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고 인민군이 후퇴를 시작하자, 이 사람은 후퇴를 하지 않고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돌아갔다.
 
  김일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동안 부산 등지를 다니면서 장사를 하다가 고향이 수복이 돼서 돌아왔다고 둘러 댔다. 그런데 인민군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당원증, 장교신분증, 권총을 자기 집 지붕 밑에다 숨겨 놓았다.
 
  김일신은 훗날 면서기로 취직해서 경리를 담당하다가 나중에는 면장까지 됐다. 면장이 된 후 새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갔다. 김일신이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지붕을 고치다가 6·25 때 前 주인이 숨겨 둔 당원증·장교신분증·권총을 발견해 신고했다.
 
  중앙정보부 대구지부에서 조사를 했는데 지역 주민들의 탄원서가 들어왔다. 「새마을사업에 공로가 많고 과거에 인민군을 했어도 사실상 귀순한 거나 다름없으니 석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A급 요시찰인으로서 사면을 받았다. 대신 더 이상 公職(공직)에는 못 나가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있던 李씨의 후배가 김일신을 활용한 공작을 해보라고 권했다. 김일신을 만나서 지금 북한에 알 만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다. 20여 년 이상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북한 소식을 모르는 그에게 사진과 함께 북한 인물 자료를 보여 주었다.
 
  함경도에 있는 7군단장 이을설 등을 기억해 냈다. 李씨는 그에게 『모든 신분을 책임질 테니까 공작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하겠다』고 답했다.
 
  李씨는 『일본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도저히 못 살겠다, 다시 장군님께 충성을 다하겠다」고 한 후 아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서 다시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안착이 되면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장기 공작이었다.
 
  김일신은 일본으로 가서 인민군 7군단장 이을설 등과 연락이 돼서 북한으로부터 들어오라는 답변까지 받았다.
 
  ―그분은 지금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에요.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면 이런 얘기 못 하죠. 공작이 얼마나 장기간 진행되는 일도 있는가를 이야기해 주려는 거죠. 막 보내려는 순간에 중앙정보부에서 중단하라고 해서 못 했어요』
 
  ―왜요.
 
  『외교문제도 있고, 그런 것 안 해도 정보수집이 가능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해서 안 했어요』 
    
  짐처럼 짊어지고 가야 할 이야기들
 
  ―첩보부대에서는 對北공작만 합니까.
 
  『아니에요. 결과적으로 對北첩보 수집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요원들이 中東(중동) 같은 데도 나가고 그랬었어요. 우리와 수교하기 전 태권도 사범으로도 내보내고, 신분을 완전히 세탁해서 이슬람교인을 만들어서 내보내기도 했죠』
 
  ―구체적으로 그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그건 안 돼요. 여기까지만 합시다』
 
  이 첩보부대 예비역 영관장교들에게는 아직도 가슴에 묻어둔 채 짐처럼 짊어지고 가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월간조선 2007년 6월호) 

입력 : 2007.06.19

조회 : 7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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