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감동과 만나다 - 김규환, 이하재, 박종숙, 이창희 시인의 시집 읽기 : 월간조선

김규환 시인의 첫 시집 《흔적들》(인문학사)을 읽었다.

서시이자 표제작인 ‘흔적들’을 곱씹어 읽었다.

읽고 나서 자꾸 자꾸 음미하게 되었다. 기자도 ‘푸세식 측간’에서 살았고, 50대 이상 세대들에겐 익숙한 공간이다.

측간의 냄새는 시인에게 ‘향기’로 기억되어 있다. 그 향기가 때로 "눈물로 가슴을 치"게 한다.

김규환 시인의 첫 시집 《흔적들》(인문학사)

김규환 시인은 전남 강진 도암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젊은 시절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했으며, 대학 사진아카데미에서 사진을 배운 후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작년 월간시인 신인상에 당선되며 시단에 나왔다.

어머니는 푸세식 측간을 그냥 두자고 한다

온 식구가 쏟아놓은 흔적들을 지우기가 서러워서

아버지 향기가 묻혀있고

객지로 떠난 자식들이 쏟아 놓은

흔적들이 영영 날아가 버릴까

흔적들이 땅속 깊이 묻혀 버린 날

숨어버린 향기를 바라보며

눈물로 가슴을 친다

남은 자국을 모아 속 깊이 주워 담는다

수세식 변기통이 들어섰지만

들어가지 않고 헐어버린 측간 옆에

소매동이 하나 갖다 놓고 일을 본다

굴곡진 흔적이라도 드러내 놓으려나

언젠가 소매동이도 보이지 않고

덩그러니 받침돌에

어머니 가슴 시린 자국만 진하게 묻어있다

-김규환 시인의 시 ‘흔적들’ 전문

저물은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 하나가 아버지 얼굴이다

그리움은 더욱 그렇다

얼마나 멀리 떠내려 왔는지

별이 밥풀처럼 하얗게 말라 떨어져도

기다려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차려진 밥상은 윗목에 그대로다

그 시절 지나갔어도

그리움은 되풀이되고

마음속 깊으 상처 툭 치며 지나간다

-김규환 시인의 시 ‘그리움’

이하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눈물로 피운 꽃을 사랑하랴》(인문학사)

이하재 시인(본명은 이재하)의 두 번째 시집 《눈물로 피운 꽃을 사랑하랴》(인문학사)를 읽는다. 표제작은 읽을수록 맛이 나는 작품이다. 시인의 삶도 시처럼 결이 고울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청자, 백자, 진주, 분재, 메달, 들꽃의 아름다움에 ‘눈물’이 담겨 있음을 시인은 말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그저 얻어지는 것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그 이상의 눈물이 담겨 있는 게 인생이다. ‘고아서 서러운’게 인생이다.

청자가 고결한 것은

천도를 웃도는 고열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대로 말랐기 때문이야

백자가 우아한 것은

도공의 땀으로 얼룩진 가마 속에서

극한의 시간을 눈물로 참아냈기 때문이야

진주가 눈부신 것은

쓰라린 상처를 악물고 견디며

조개가 흘린 눈물이 굳었기 때문이야

분재가 애틋한 것은

철사에 꽁꽁 묶인 채 몸부림치며

나무가 흘린 눈물이 배어있기 때문이야

메달이 빛나는 것은

선수가 밤낮없이 땀을 흘리며

눈물로 일구어낸 결과이기 때문이야

들꽃이 아름다운 것은

거친 세상에서 바람에 젖은

꽃잎 속에 눈물을 감추었기 때문이야

어이하랴

저 고와서 서러운 것들을

어이 눈물로 피운 꽃을 사랑하랴

-이하재 시인의 시 ‘눈물로 피운 꽃을 사랑하랴’ 전문

바람에 몸을 맡기고 떠돌던 민들레 홀씨

조금 열린 차창을 비집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내쫓으려고 손을 저어도 나가지 않고 맴돌다가

나의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나는 매정스럽게 홀씨를 잡았고

날개를 짓이겨 아스팔트 위에 버렸다

빗물에 씻겨가다 갈라진 아스팔트 틈새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넓고 넓은 세상 많고 많은 차 중에서

하필이면 좁은 차창을 비집고 나에게 왔을까

바람에 운명을 맡기고 떠돌던 나의 영혼은

초가집의 낮은 문틈을 헤집고 들어갔을까

달은 기울고 문풍지 슬피 울던 밤에

나는 한 여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겠지

여인은 다정스럽게 나를 품어주고

날개를 달아 세상 밖으로 내보냈던 거야

파도에 쓸려가다 외로운 섬 낯선 거리에서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했네

넓고 넓은 세상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두메산골 개울 건너 당신께로 갔었을까

-이하재 시인의 시 ‘운명’

이하재 시인은 1955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려서 얻은 서러운 병으로 청춘을 방황한 적이 있다. 택시 운전을 하며 밥벌이를 하였다. 2017년 독학 학위제로 국문학사가 되고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가에 편입해 공부했다. 2018년 《시사문단》과 《월간시》로 등단했으며 이듬해 《한국산문》으로 수필가가 되었다. 첫 시집 《허공에 그린 얼굴》은 2022년 나왔다.

박종숙 시인의 첫 시집 《조각조각 붉게 타다》(작가마을)

2011년에 등단한 박종숙 시인의 첫 시집 《조각조각 붉게 타다》(작가마을)를 읽는다. 시인이 걸어온 삶의 순례를 아름다운 언어로 빚었다. 시 속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수채화처럼 묽고 투명해서 아름답다. 시인이 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인의 시작(詩作)론은 ‘부재와 결핍의 풍요로움, 혹은 기억의 시학’(황치복 문학평론가)이다.

문득

구름 사이를 손짓하는 그림자

낡은 대문 앞에 선다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하고

고물 자전거가 주인처럼 서 있다

질퍽이는 길 위에서 그늘을 삼키며

감출 수 없어 터지던 빗방울

거북등 같은 부스럼을 만지작거린다

울음이 된 기억을 가두고

아픈 다리를 끌며

먼 길 배웅해 주시던 어머니

고맙다는 말 삼킨 목젖에

구름꽃이 핀다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박종숙 시인의 시 ‘구름꽃’ 전문

박종숙 시인은 2004년 《문학예술》을 통해 수필로 등단했고 2011년 시전문지 《심상》에서 시로 재등단했다. 부산시인협회, 부산남구문인회 이사, 국제펜클럽, 부산문인협회, 부산여류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은 “시란 내 안에 있는 구름을 터뜨리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창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어제 나는 죽었다》(작가마을)

중견 시인 이창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어제 나는 죽었다》(작가마을)를 읽었다. 시집의 부제가 ‘생사 간을 가로지르는 운명의 언어’여서 더 눈길이 갔다. ‘고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라는 부제로 적힌 시 ‘죽음이 사는 집’을 거듭 거듭 읽어 보았다. 이 글을 쓰는 기자야말로 이어령 선생을 마지막 인터뷰했었다. 마지막 연, ‘씨앗은 내일을 못 봐요/ 흙에 묻혀서 껍질을 깨고/ (중략)/ 새봄을 찬미하는 새 소리/ 보게 되는 거지요’가 긴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