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조선DB
이문길 시인은 1939년생이다. 긴 세월을 지나 그는 고요와 고독 속에 살고 있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내면이 빈 하늘과 마주할 시간이 많아졌다. 하늘이 내 마음 같았으리라. 때로 바람은 차가웠고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노년과 노년의 의미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마치 수도원의 아빠스(수도원장) 같다. 세상에 대한 인식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순례자의 여정을 끝낸 것 같다. 더 깊어질수록 더 단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흔히 보통의 우리네 삶은, 삶이라는 이 직분의 무거움을 자주 잊어 버리거나 일상의 자잘한 일들 때문에 자주 덮어 버리지만 삶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노년에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신호를 감지하게 만드는데 그게 삶의 비밀이다. 흰머리의 지혜다. 이문길 시인만이 아는 시의 비밀이다. 그 비밀은 마음의 순결이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비밀은 순결이다. 빈 하늘의 푸른 하늘과 같은 순결을 시인은 말로 그리고 있다. 순결에는 사랑이, 슬픔이, 어떤 두려움이 담겨 있다.
길 가다
돌아보는 길
아무도 없어
쓸쓸하다
새 떼 모여 우는
풀숲에 앉아
해 저무는
서쪽을 바라본다
누가
오려나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길
서쪽 길
-이문길의 시 ‘서쪽 길1’ 전문
서쪽 길 끝에서 보면
보인다
절며 가는 것들
먼저 와 쉬던 것들
어디 갔느지 안 보이고
짚고 가는 작대기 소리만 들린다
오는 사람 맞아줄
사람 없는 서쪽 길
해 저물면 보인다
길 가다 쉬고 있는
남은 사람들
-이문길의 시 ‘서쪽 길2’ 전문
정하돈 수녀가 번역하고 피델리스 루페르트(독일 수도원의 아빠스)가 쓴 《노년을 위한 마음 공부》(2016)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노년의 풍요의 기준은 흰머리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열성과 수고의 열매여야 한다.’
그의 시에는 흰머리와 같은 고집과 완고함,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열성과 수고로 다져진 깨달음이 느껴진다. 세속적 삶의 성취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토고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사 보니파스 티갈라(Boniface Tiguila)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노인들이 시인 아니면 얼간이, 철학자 아니면 바보, 또는 삶의 상황으로 인해 숙고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무감각한 사람들이라고 감히 확언한다.’
이문길 시인을 이 문장에 대입하면 그는 시인이며 철학자, 그리고 숙고하는 사람이다. 그의 시 전체에서 그런 느낌, 그런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몸이 편하면
잠이 온다
밤중에
깨어 있어 보면 안다
편한 잠자리가
어디인가를
거기서 기다리면
잠이 온다는 것을
-이문길 시인의 시 ‘잠1’ 전문
산불이 난 강원도 강릉시 저동
한 주민의 집이 불에 탄 뒤
축사에 남아 있던 소 두 마리를
구출했다고 했다 나는 TV에서
얼굴이 그을은 소 두 마리를 보았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불탄 그 집 축사 천장에 살던
거미나 썩은 짚 속에 살던 귀뚜라미나
뙤아리 벌레는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강원도에 산불이 날 때마다
사람들이 산에 살면서 산신님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산불 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산속에 무엇이 없어졌는지
가보고 싶었다
-이문길 시인의 시 ‘산불’ 전문
꽃들은
밤에 어떻게 자는가
불 켜놓고 보니
세상을 버린 것 같이
꽃잎을 오므리고 잔다
꽃 없는
꽃나무는 어떻게 자는가
보고 있다가 알았다
꿈꾸며 자고 있어
아무말도 못 한다는 것을
-이문길 시인의 시 ‘자는 꽃’ 전문
저승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
평생 걸렸다
저승이 있다고
헛소리하는 사람을
알게 된 것도
평생 걸렸다
-이문길 시인의 시 ‘저승3’ 전문
이문길 시인
노시인은 노년의 순결한 삶의 살고 순결의 노래를 부른다. 젊은 시절, 우리는 분노와 원한, 원망을 데우며 살았다. 그 미움의 감정은 “영혼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어서 야수보다 무서웠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그런 감정을 찾을 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객체화 되었다. 사나운 감정, 서운한 감정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의 영혼을 잠식하진 않으리라.
자고 나면 낫는 것
1.눈
2.팔다리
3.입
4.이
5.코
6.목
7.귀
:
:
10. 근심 걱정
자고 나도 안 낫는 것
1.허리
2.무릎
3.두통, 치통
4.앞다리, 뒷다리
5.치질
6.이
7.두통
:
:
10. 근심 걱정
-이문길 시인의 시 ‘자고 나면’ 전문
생명 없이도
살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나는 세상에 오자 걱정이 되었다
생명 있는 곳은
사는 것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고 싶지 않은 곳에 와서
살고 싶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싫었다
나는 사람이 있기 전에 있었던 곳
내 생명이 없었던 곳
그곳에 가서 살고 싶었다
나는 세상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 생명이
죽어서 갈 저승이 없다는 것을
나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가보고 싶었다
세상 생명이 없는 곳
거기 가보고 싶었다
거기 가서 혼자 살고 싶었다
-이문길의 시 ‘살 수 있는 길’ 전문
이문길 시인의 17번째 시집 《초가삼간 오막살이》 표지. 아무 무늬가 없다. 흰색 바탕이 전부다.
그의 귀한 시들을 계속 읽기를 희망한다. 그의 시를 통해 노년 문학이 우리 문단을 밝게 빛나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