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TA(Traffic Accident·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온 청소년 환자가 있었어요. 엑스레이를 찍으려고 했더니 거부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임신을 해서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지난 6일 의료윤리연구회(회장 문지호) 월례 학술 대회에서 강연자로 나선 김아진 인하대병원 입원의학과 교수가 자신의 경험담을 꺼냈다.

김 교수는 당시 환자에게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환자는 ‘오빠에게만 얘기하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이에 김 교수는 환자의 뜻에 따라주기로 했다.

응급실에서 의사는 청소년 환자의 결정을 유효하게 보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미성년자의 치료 거부 의사도 반영될 수 없다. 다만 청소년 환자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우 사적이고 비밀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경우다. 임신이나 피임, 약물, 정신건강과 같은 매우 사적인 의료적 비밀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년에 가까운 연령인지, 합리적 판단 능력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지도 고려한다.

김 교수는 이날 ‘응급실 환자의 자기 결정권과 의사의 진료 결정권’을 주제로 강의했다. 의사로선 환자가 치료를 거부할 때 난감할 수밖에 없다. 환자 개인의 자기 결정권과 생명을 살릴 의사의 의무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에 김 교수는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의료 행위를 하는 사례들을 제시했다.

먼저 심폐소생술이다. 심정지 상황일 땐 환자의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즉시 시행하지 않으면 환자가 사망하거나 심각한 장애를 입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일 때도 환자의 동의를 유보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환자의 판단 능력이 불완전할 때, 의사는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극단 선택을 시도하는 환자의 경우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극단 선택은 병증(病症·병의 증상)으로 본다. 따라서 환자의 결정 능력이 온전하지 않다고 본다. 정신과 치료 이후 극단 선택을 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생존에 대한 안심 의식이 생긴다. 우울감은 통증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환자의 의사 능력이 불완전하다고 볼 근거가 된다.

김 교수는 “극단 선택을 한 환자의 경우, 인체에 치명적인 손상이 발생한 상태로 응급실에 오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 환자가 오면, 일단 환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치료부터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의사 결정 능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부분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나 결과, 그다음에 어떻게 될 건지 추론하고, 이것이 나한테 득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 선택을 시도하는 사람에겐 이러한 능력이 없다고 보고 있고요.”

환자가 자의(自意)로 퇴원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환자의 결정권과 의사의 의무가 충돌한다. 피를 토하면서도 괜찮다고 병원을 나가려는 환자도 있다.

2020년 중앙대병원은 <응급실에서 이루어지는 자의 퇴원에 관하여>라는 연구 논문을 내고 입원 환자 4만3545명 가운데 자의 퇴원을 결정한 환자 1718명을 분석했다. 의무(醫務) 기록에 남지 않은 사례(1094건)를 제외하면, 환자가 자의 퇴원을 결정하는 이유는 ‘타 병원에서 진료를 이어가기 위해서(109건)’가 가장 많았다.

환자의 재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자의 퇴원하려는 경우가 71건으로 뒤를 이었다. 환자가 스스로 괜찮다고 여겨서 퇴원하겠다는 경우는 그보다 적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환자가 비용 문제로 치료를 망설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환자) 본인은 비용 문제가 아니라고 해요. 비용 문제를 구체적으로 얘기하지도 않고요. 이게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비용 문제로 퇴원하려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이런 경우에 저희는 ‘비용은 나중에 해결하셔도 됩니다’라고 아무리 말씀을 드리는 데도 환자는 ‘아니다, 나는 가겠다. 비용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어서 가는 거다’라고 해요. 저는 이런 경우에 환자의 자기 결정을 좀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김 교수는 환자가 음주 상태이거나, 정신과적 문제가 있거나, 비용 문제가 있을 경우 환자의 자의 퇴원을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강연에 의료윤리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명진 대한의사협회 법제윤리위원이 참석했다. 이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자율성에 대해, 우리(의사들)에겐 어떠한 경계가 있습니다. 그 경계를 지켜야 하는데, 이를 넘어가게 되면 결국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약자들입니다. 약자들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진료를 거부하고 나가시겠다고 하는 분들이 겪게 될 위험한 상황이 예측되는데, 환자의 결정만 따르다 보면 도리어 환자의 피해가 커질 수 있습니다.”

한편 2010년 출범한 의료윤리연구회는 매월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 4층 회의실에서 학술 대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의사들은 직업 윤리와 의료 윤리를 공부하고 있다.

글=김광주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