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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잼버리 최다 참가 영국, 영국은 6·25전쟁 당시 어떻게 싸웠나

[정전 70주년] 고마운 나라, 고마운 사람들②- 영연방국가(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참전사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정책주간지 K-공감 715호에 실린 영연방국가 참전 이야기.
8월 9일 경기 파주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추모비에 영국 스카우트 대원이 헌정한 스카프가 걸려있다. 6·25 당시 설마리 전투는 영국군 글로스터셔 대대가 사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날 오전 이곳을 방문한 영국 글로스터셔 지역에서 온 스카우트 대원이 참전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서 목에 착용하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비석에 올리고 참배한 후 자리를 떠났다. 사진=국가보훈부

전후 70년, 눈부신 번영을 이룬 대한민국의 밑거름에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로 달려온 22개국 (전투부대 파병 16개국, 의료지원 6개국) 젊은이들이 있었다. 1129일 간의 전쟁에서 유엔군은 4만 670명이 전사, 10만 4280명이 다쳤고 4116명은 실종, 5815명은 포로가 됐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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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가평 ‘영연방 참전 기념비’ 1951년 4월 22~25일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영연방 4개국이 중공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가평전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영국-두 번째로 많은 병력 파병, 두 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 큰 규모로 파병했다. 지상군 2개 여단과 해병 특공대, 함정 17척을 지원했다. 인명 피해도 미국 다음이었다. 유엔 파병 앞장선 영국은 영연방국가의 참전 이끌었고 가평전투 등지에서 중공군에 맞섰다.

 

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유엔본부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긴급 소집됐다. 안보리에서 미국은 한국에 유엔군 파병을 제의했고 영국은 가장 먼저 지지 의사를 밝혔다.


영국은 1950년 6월 28일 해군을 시작으로 두 달 뒤인 8월 28일에는 지상군 2개 대대를 파병했다. 8월 28일 부산항에 도착한 영국 지상군은 미군 1기병사단에 배속돼 낙동강방어선전투(1950년 8월 4일~9월 18일)에 투입됐다. 영국군이 미군에 배속된 이유는 참전 초기 병력이 2개 대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대(600~800명 규모)를 12~15개 모아놓은 사단(1만 명 규모)이 돼야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영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영연방 국가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도 파병을 결정했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탠 영국군은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이 성공하자 국군·미군과 함께 북진했다. 중국은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라는 명목으로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을 보냈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본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1951년 1월 4일(1·4후퇴)에는 오산~영월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영국군은 킬러작전·리퍼작전 등으로 반격해나갔다.


1951년 7월 28일 영국은 영연방 국가에서 파병된 부대를 통합 지휘하는 ‘영연방군 1사단’을 창설했다. 영국군 29여단, 캐나다군 25여단이 주축이 됐다. 여기에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군 포병부대와 영국·캐나다군 전차부대·공병부대가 배속됐다. 이는 한 개 사단 규모의 부대를 만들기 위해 여러 나라 부대가 참여한 특이한 사례다. 일반적으로 나라마다 군대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군대를 하나의 단위 부대로 모으는 것은 쉽지 않다.


영국 지상군은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시작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한반도 남북을 오르내리며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대표적으로 평양 부근에서 치른 정주·박천전투, 고양전투, 설마리전투, 가평전투, 후크고지전투 등이었다.


설마리전투(1951년 4월 22~25일, 경기 파주)에서는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셔 대대가 10배나 많은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로 29여단은 전 병력의 3분의 1을 잃었다. 4일간의 격전에서 622명 중 39명만 살아 돌아왔다. 526명은 포로가 돼 3년간 수용소에서 지냈는데 34명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설마리전투에서 영국군이 활약한 덕분에 유엔군은 서울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해마다 4월 22일이면 설마리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추모식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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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4일 경기도 가평에서 열린 가평전투 64주년 기념행사에서 캐나다 참전 용사 레지널드 피츠 씨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천막 기둥을 잡고 거수경례를 했다. 사진=뉴시스

 

캐나다-진내 사격하며 중공군과 맞서

육·해·공군 2만 6791명 파병

(516명 전사, 1212명 부상, 포로 32명)

 

영연방 국가의 일원이었던 캐나다는 인구 비례(1950년 당시 1370만 명)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다섯 번째로 전투 부대를 파병해 다섯 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봤다. 육·해·공군이 모두 참전했으며 파병 규모는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캐나다는 1950년 7월 5일 함정을 한국으로 출동시켰다. 태평양을 건너 같은 달 30일부터 미군의 통제 아래 해상 작전을 수행했다. 6·25전쟁 당시 캐나다는 군함 8척을 지원해 미군 병력수송선 엄호를 시작으로 해상봉쇄, 해안포격, 상륙작전 등을 지원했다.


캐나다 공군은 1950년 7월 26일부터 참전했다. 공중전 경험이 있는 전투기 조종사 22명을 미국 공군에 배속시켰고 수송기 6대를 지원했다. 당시 캐나다에는 지상군이 2만 300명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캐나다는 지상군을 한국에 파병하기 위해 부대를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캐나다 육군은 1950년 11월 25일 시애틀을 떠나 그 해 12월 18일 부산항에 도착해 영국군 27여단에 배속됐다. 1951년 7월 28일 영연방군 1사단이 창설된 후 휴전 때까지 주로 임진강 일대에서 싸웠다.


캐나다군은 중공군 대공세에 맞서 백병전을 치러가며 대한민국을 지켰다. 대표적으로 가평전투(1951년 4월 23~25일)가 있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겠다는 목표로 서부 전선인 경기 파주부터 동부 전선인 강원 양양·고성까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모든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폈다.

 

중공군은 강원 화천~가평 축선을 돌파하기 위해 화천 일대에 주둔한 국군 6사단을 공격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린 6사단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가평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때 국군을 돕기 위해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영연방군 27여단이 전선에 투입됐다.

 

격전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24일, 가평 북면 이곡리 677고지에선 캐나다 군대가 중공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캐나다군은 중공군이 참호로 밀고 들어오자 인근 영연방군 소속인 뉴질랜드 포병부대 “아군 진지로 사격해달라”며 ‘진내 사격’을 요청했다. 진내 사격은 적군에게 포위돼 후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항복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최후 수단이다. 뉴질랜드 포병부대는 당황했지만 캐나다 진지를 향해 포격을 가했고 결국 677고지를 지켰다.


가평에서 벌인 3일간의 격전에서 유엔군은 결국 승리했다. 영연방군 27여단은 가평전투에서 47명(호주 32명, 캐나다 10명, 뉴질랜드 5명)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됐으며 99명이 다쳤다. 중공군은 약 1000명이 사살됐다. 4배나 많은 중공군과 싸워 이긴 유엔군은 가평전투를 계기로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을 38선까지 격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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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최연소 전사자인 호주 출신 제임스 도은트 이병은 1951년 10월 25일 한국에 와 열흘 뒤인 11월 6일 경기 연천에서 전사했다. 사진=국가보훈부

 


호주-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인명 피해

육·해군 1만 7164명 파병

(339명 전사, 1216명 부상, 포로 977명)

 

호주는 세 번째로 파병을 결정했다.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지상군 2개 보병대대, 함정 4척, 전투비행대대·수송기 편대를 지원했다. 인명 피해도 네 번째였다. 이는 호주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입은 가장 많은 사상자 기록이다.


호주는 1950년 6월 30일 호주 해군 구축함 2척을, 다음 날인 7월 1일에는 호주 공군 77전투비행대대를 미군에 배속시켜 싸웠다.


호주 지상군은 1950년 9월 17일 선발대가, 같은 달 27일 지상군 960명이 부산에 도착했다. 곧바로 대구로 이동해 영국군 28여단에 배속돼 북진 작전에 참여했다. 1950년 10월 10일 개성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고 일주일 뒤인 사리원전투(1950년 10월 17일)에서는 패주하는 북한군 약 2000명을 생포했다.


호주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상륙을 앞두고 영국 항공모함을 엄호하고 북한군이 장악한 해안을 포격했다. 중공군 참전으로 유엔군이 후퇴할 때는 피란민과 유엔군 부상병을 태워 남쪽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호주 공군도 맹활약했다.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는 북한군 집결지에 공중 폭격을 가했다. 1950년 7월 1일 첫 출격 이후 3년 동안 총 1만 8872회 출격해 공산군의 항공기를 격추하고 전차, 차량 등을 파괴했다.


호주에서 온 제임스 도은트 이병은 유엔군 최연소 전사자다. 17세였던 1951년 10월 25일 한국 땅을 밟았고 열흘 뒤인 11월 6일 경기 연천에서 전사했다. 도은트 이병이 안장된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은트 수로(Daunt Waterway, 폭 0.7m, 길이 110m)’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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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4일 가평전투 68주년을 맞아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을 찾은 6·25전쟁 영연방 4개국 참전용사들이 추모식에 참석,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질랜드-K-포스의 든든한 포격으로 중공군 격퇴

육·해군 3794명 파병

(23명 전사, 79명 부상)

 

뉴질랜드는 유엔이 한국에 군사 지원을 결의한 지 30시간 만에 참전을 결정했다. 1950년 7월 3일 군함 두 척을 한국으로 보냈다. 유엔은 전황이 나빠지자 유엔 회원국에 지상군 파병도 요청했다. 이에 뉴질랜드는 포병 부대를 새로 만들었다. 이 부대는 ‘케이 포스(K-force, 한국 부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6000명이 지원해 이 중 1000명을 선발했다. 뉴질랜드 포병은 1950년 12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해 영연방군 27여단에 배속돼 싸웠다.


영연방군이 치른 가평전투에서도 뉴질랜드 포병은 맹활약했다. 뉴질랜드군은 사흘간 치른 전투에서 포탄 약 1만 발을 사용했다. 당시 포병들은 밤잠도 못 자고 포신이 달아올라 페인트가 벗겨질 정도로 포를 쐈다.


뉴질랜드군은 영연방군 1사단이 창설된 후 치른 코만도작전에도 참가했다. 엿새 동안 치른 전투에서 포탄 7만 2000발을 쐈다. 이는 뉴질랜드 포병이 참전한 이래 하나의 작전에서 가장 많은 포탄을 쏜 것으로 기록됐다. 뉴질랜드 포병의 포격은 유엔군이 꼭 필요로 할 때 진가를 발휘했다.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영연방군이 치른 전투로는 대표적으로 자일리전투, 코만도작전, 홍천전투, 고왕산전투, 후크고지전투, 마량산전투, 나부리전투 등이 있다.

입력 : 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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