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까이, 잡지 이야기 <4>] 영혼을 힐링하는... 《한국힐링문학》 : 월간조선

반(半) 연간(年刊) 잡지인 《한국힐링문학》이 최신호를 펴냈다. 2021년 11월 창간호를 펴낸 뒤 6개월마다 문학잡지를 펴냈으니 이번이 4호째다.

창간호에서 이인선 한국힐링문학 회장은 “문학은 혼자 일생동안 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문학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힐링시킨다”고 썼다. 영혼을 힐링하는 작품을 읽으며 시와 시인의 위대함을 느껴 본다. 작은 잡지, 화려하지 않지만 만든 이의 정성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작가들의 진심이 전해진다. 한 편의 작품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 빈 종이와 씨름했을 테니 말이다.

빈 종이가 얼마나 큰 운동장이며 대지며 지구며 우주란 사실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한국힐링문학》4호에 실린 몇몇 시 작품을 소개한다.

잡지나무 하나

시 전문 잡지나무, 시인 하나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나무에 피운 시인이라는 잎사귀가

그 고운 열매가

겸허히 고개를 숙인다

바람은 이는 듯 마는 듯

50여 성상이 흘렀다

얼마나 많은 열망의 햇빛과 이슬과 바람,

곱디고운 꿈들이

이 나무를 다녀가고 다녀갔던가

그 둥지에, 가지에 그 오래인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 들려오는데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무릇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 말 말을 하지만

말을 아끼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늘 고운 백합 같은 미소로,

숨소리로 머물던

잡지나무 하나, 시인 하나가

가정을 지키고, 시와 시나무를 지키고 키운 세월이

오직 외길이어서 고맙다고

잘 살았노라고 건강하라고

안녕을 고한다

-노유섭 시인의 시 ‘잡지나무 하나 ― 김규화 시인 영결식장에서’ 전문

이 시는 월간 시문학사 발행인인 김규화 시인을 추모하는 시다. 김 시인은 지난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시인 문덕수(2020년 작고)의 아내였던 고인은 52년간 월간지인 시 전문지 《시문학》을 한 번의 궐호도 없이 발행해 왔다. 잡지만으로 경영이 보장될 리 없어 오랫동안 사재를 털어야만 했다. 김규화 시인이 떠나면서 《시문학》 잡지도 결국 2월호(통권 619호)를 끝으로 종간되고 말았다.

2023년 2월호_시문학.jpg

마지막 《시문학》 잡지가 된 2023년 2월호 표지(통권 619호)

《시문학》은 1971년 《현대문학》 자매지로 창간했다. 문덕수 시인이 편집인 겸 주간을 맡은 것은 1973년 7월호(통권 24호)부터다. 그리고 4년 뒤인 1977년 문 시인이 시문학사를 인수하면서 김규화 시인이 발행인을 맡아 왔다. 이후 많은 시 작품과 시인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다만, 시문학 잡지는 종간됐으나 해마다 연말에 시상해온 ‘문덕수문학상’과 ‘시문학상’은 이어갈 것이라고 한다.

노유섭 시인은 《시문학》 의 세월을 ‘50여 성상이 흘렀다’고 표현하며 ‘얼마나 많은 열망의 햇빛과 이슬과 바람/ 곱디고운 꿈들이/ 이 나무를 다녀가고 다녀갔던가’라고 노래했다. 또 ‘잡지나무 하나, 시인 하나가/ 가정을 지키고, 시와 시나무를 지키고 키운 세월이/ 오직 외길이어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사진=조선일보DB

류재창 시인의 ‘외줄에 걸린 바닷고기’와 박일소 시인의 ‘갈대 19 ― 사랑도 병이 되어’를 읽는다.

연분홍 해당화가 바다를 향해 피어있는

칠포리 마을

모래사장에 게르치(쥐놀래미) 열여덟 마리가

가지런히 줄에 꿰어져 있다

하늘은 쪽빛 이불을 덮어주고

바다는 철썩 철썩 자장가를 불러준다

목이 잘려 꼬랑지를 줄에 꿰어

따가운 햇볕을 쪼이고 있는, 바닷고기들

바다를 거침없이 헤엄치는 꿈을 말리고 있다

허기진 나의 밥상

한 점 비릿한 고행이 되기 위해

반야심경,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지나온 생을 묵독하고 있다

해파랑길 일주일 포행길에서도 깨닫지 못한

참 지혜의 언덕길, 분별심을

나는 게르치의 육바라밀(六波羅密) 보시에서 깨닫는다

-류재창 시인의 ‘외줄에 걸린 바닷고기’ 전문

그대는 말하네

사랑도 병이라고

그대가 보내준 선물인 줄 모르고

헛 약속

헛 맹세는 왜해 놓고

가을 깊도록

오지 못하는 걸까

하얗게 희어버린 머리칼

병 깊어 핼쑥해진 모습으로

님 떠난 가을 들녘에

오지 못하는 님

기다린들 무엇하나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해보지만

다정도 병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약속

-박일소 시인의 ‘갈대 19 ― 사랑도 병이 되어’

박일소 시인의 연작 시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약속과 맹세를 하고 떠난 그대를 기다리는 시다. 세월이 흘러 머리칼이 희어졌다. ‘오지 못하는 님/ 기다린들 무엇하나’라고 하지만 이내 마음은 기다림으로, 사랑으로 불타고 있음을 안다. ‘바람에 흩날리는 약속’일망정.

류재창 시인은 바닷바람에 말리는 생선을 보면서 쓴 시다. ‘목이 잘려 꼬랑지를 줄에 꿰어/ 따가운 햇볕을 쪼이고 있는’ (반)건조 '바닷고기들이, 실은 몸이 아니라 ‘바다를 거침없이 헤엄치는 꿈을 말리고 있다’고 말한다.

밥상 위에 놓인 생선을 보며 ‘비릿한 고행’, ‘반야심경, 한 페이지’를 생각하며 ‘지나온 생을 묵독하고’ 있다. 이때 ‘지나온 생’이란 생선은 물론, 시적 화자,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이리라.

일러스트=조선DB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왜 일생을 큰 물고기를 잡으려 그렇게 헤맸을까

기껏해야 청새치 한 마리였을 뿐인데

그것도 각다귀패들에게 시달린 노인처럼 상어 떼에게 다 뜯어 먹히고

앙상한 뼈다귀만 남긴 채 무얼 할까

또 다른 이들은 왜 일생을 코끼리 한 마리 찾기에 혈안이 되어 헤맸을까

다리와 코를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그렇게 조각모음을 해서 무얼 할까

필사의 노력으로 커다란 참치 한 마리 잡으려는 어부의 몸부림 옆엔

대형 트롤어선이 수백 마리의 참치를 끌어 올리는데

지금도 그 어부는 참치 한 마리 때문에 바다를 헤매고

동료들은 참치 한 마리 잡은 그를 진정한 사나이라고 엄지 척을 해준다

청새치와 참치 한 마리, 코끼리는 뭐가 다른가

늙고 불편한 육신으로도 엄지 척의 사나이는 다시 한번 힘을 내본다

오늘도 열심히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대들

어이 당신 진짜 사나이야 행운을 한 번 잡아봐

-예시원 시인의 ‘청새치와 코끼리 다리’

양평역 1번 출구에서 기다릴게요

멧새 부리가 삼킨, 봄맞이꽃 여린 눈매로

쉿, 화살나무 코끝에 매달려

연둣빛 홑잎햇살 한 줌

코를 발름발름, 설레며 깨어나요

코로나 블루를 겨우 건너왔는데,

코로나 레드가 가벽을 치고 막아선다고

울상을 짓는, 당신

오늘은 객기부려, 용문행 중앙선타고 달려보시죠

후회는 바람벽에 갈겨쓴 덧없는, 달력

한참을 자다 쉬다 깨면, 양평역

물소리길, 통통한 바람의 향기

3일, 8일, 양평장날

장날은 추억을 음모하기에 안성맞춤이지요

수수부꾸미 나눠 먹고

꽁보리밥 한 그릇 추가,

밥알이 팝콘처럼 입안에서 톡톡 터져요

등골계곡, 초록색 색도화지에 그린

고광나무 꽃향기는 덤이지요

두루미, 고니, 물오리 떼

서로 은근히 눈빛 교환할 때

철 지난, 산수유꽃 인연들

흑천강 물살에 부글부글, 왁자지껄 흘러가네요

오늘은

물오른 봄, 양평 장날인걸요

-이선 시인의 ‘양평역 1번 출구’ 전문

예시원 시인의 ‘청새치와 코끼리 다리’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기껏해야 청새치 한 마리, 상어 떼에게 다 뜯어 먹힌 앙상한 뼈다귀뿐이지만, 어부의 생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엄지 척의 사나이라고 누가 말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성공과 실패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참치 한 마리 때문에 바다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바다를 헤매는 것이다. 남이 뭐라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자만이 ‘행운’을 잡을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행운’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행운’이 아닐까.

이선 시인은 노래하는 시를 쓴다. 그의 시를 읽으면 머릿속에 풍경화가 그려진다. 시어가 매우 감각적이다. 독자의 오감(五感)을 열리게 한다. 시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독자는 시 속의 주인공이 되어 시인의 음성에 따라 걷는다. 어느 새 양평역의 ‘물소리길, 통통한 바람의 향기’에 취한 자신을 발견한다. ‘고광나무 꽃향기’는 어떤 맛일까, ‘두루미, 고니, 물오리 떼’, ‘왁자지껄 흘러가는’ 흑천강 물살에 빠지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