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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출범 40주년 40장면] <12> 두 개의 태양 최동원 vs 선동열 ②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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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대결에서 11패로 호각세를 이룬 형세에서 누가 과연 승리를 거둘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고 두 사람의 마지막 대전은 이듬해인 1987516일 진행됐다.


# 1987년 5월 16일 네 번째 대결


롯데는 2회말에 김용철의 포볼과 김민호의 내야안타에 이은 정구선의 중전안타로 무사 만루의 기회를 얻은 뒤 김용운과 최계영의 내야 땅볼 때 2점을 선취하며 승기를 잡는다.


해태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실점을 하고 바로 다음 회인 3회초 김무종이 중전안타에 이은 희생번트로 2루에 안착했고 이어 서정환의 안타 때 홈을 밟아 2 1, 승부는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해태는 5회에 12, 3루의 기회를 잡지만 조재환의 내야땅볼 때 이순철이 홈으로 쇄도하다가 아웃되고 서정환의 고의사구로 만들어진 2사 만루의 기회에서 이건열이 파울플라이를 당하며 선동열의 짐을 덜어 주지 못했다. 이후 9회까지 양 팀 투수들의 눈부신 투구 앞에 타자들은 맥을 추지 못했고 결국 게임은 9회 초까지 가게 된다.


화면 캡처 2022-10-21 060101.jpg

조선일보 1987년 5월 17일 자 기사 <최동원 선동열 15회 대결 "무승부">다.


최후의 1이닝. 9회 초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선두타자 6번 한대화가 안타를 치고 출루하자 7번 김일권에게 번트 지시를 내렸다. 8번 타순의 포수 장채근마저 빼고 왼손 타자 김일환을 내세우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최동원은 그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

 

결국 김일환이 우익수를 넘기는 커다란 2루타를 때려 한대화를 홈으로 불러들이며 동점을 만들었다.

 

'과연 누가 먼저 내려올 것인가.'

 

이 둘의 승부는 끝이 나질 않았고 해태는 10회 초 1사 만루 때 한대화와 김일권이 각각 삼진과 플라이로 아웃되며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쳤으며 롯데는 11회말 2사 만루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서 경기는 1213전광판의 스코어보드에는 연신 0이 찍힌 채로 이어져 나갔다.

 

결국 2032개의 공을 던져 7피안타 6사사구 10탈삼진을 기록하며 2실점한 선동열, 그리고 209개의 공을 던지며 11피안타 7사사구 8탈삼진과 역시 2실점을 기록한 최동원.

경기 후 이들은 뜨거운 악수로 서로를 격려했고 5시간의 숨 막히는 혈투의 종지부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었다.


그해 5월 17일 자 조선일보 9면에 실린 기사 <최동원 선동열 15회 대결 "무승부"> 중 일부다.


<선동열과 최동원이 완투 대결한 부산 경기서는 연장 15회까지 벌이는 5시간 1분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2대 2로 비겼다.

 

선동열과 최동원은 올 시즌 두번째 대결에서 비겼으나 통산 2승 1무 1패로 여전히 선이 우위를 지켰다. >


이후 두 선수의 맞대결은 다신 성사되지 못했다.

 

두 개의 태양 이후

 

최동원은 1987년을 89승으로 마친 후 11승을 더 보태는데 무려 2년 반이 더 걸렸다. 최동원은 어느덧 전성기를 지나 지는 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1990712OB 베이스와의 경기에서 100승을 올렸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시작해 삼성에서 은퇴하는 통산 8시즌 동안 248경기에 등판해 1414.2이닝, 10326세이브 74, 1019탈삼진, 방어율 2.46을 기록했다.


불세출의 스타인 최동원이 롯데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생활을 못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1988년 선수회 파동 때 주동적인 구실을 했다는 이유로 8개 구단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는 시각이 드세다. 당시 괘씸죄를 적용받아 1989년 롯데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까지 되는 설움을 맛 봐야 했다. 부산이 낳은 최고의 스타인 그가 롯데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1990년 은퇴 후 광역의원 출마, 사업, 방송 등의 '외도'를 거쳐 2000년대 들어 야구계로 돌아와 한화이글스에서 투수코치와 2군 감독을 지냈고 2009년부터 2년간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을 맡았던 것을 끝으로 야구에서 발을 뺐다.


조선일보와의 2011년 5월 7일 자 인터뷰에서 최동원은 “이제 5회말 뛰었다. 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었다. 


< ―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을 꼽는다면.


"당연히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섯번 나가 41패를 거두고 극적으로 우승했을 때다. 경기 끝나고 숙소로 올라가는데 쌍코피가 터져 유니폼을 다 적셨다. 양쪽 콧구멍을 솜으로 막은 채 우승 축하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원래 다섯 차례 등판이 예정됐던 건가?


"당시 삼성은 열번 붙어 한번 겨우 이길 만큼 막강한 팀이었다. 김영덕 삼성감독이 '정규시즌에서 최동원은 우리와 붙어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강병철 롯데감독은 '1·3·5·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해 43패로 이기겠다'고 응수하셨다. 나도 놀라 강 감독께 '4차례 등판은 무리 아닙니꺼?'라고 했더니 감독님은 '동원아, 우야겠노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내 눈을 쳐다보셨다. 결국 나도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야구의 이닝으로 보자면 인생 몇 이닝을 뛰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이 중간쯤이라고 본다. 4회나 5회. 위기상황은 아니다. 책도 보고 야구에 대해서도 공부하며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2011년 9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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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과 선동열. 사진=조선DB


선동열은 1985년 해태 타이거즈로 데뷔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인 95년까지 11시즌 동안 367경기 14640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를 기록했다.


일본 주니치에서의 4시즌(1996~99) 성적은 총 162경기, 104, 98 세이브, 방어율 2.70이었다그리고 4년간 일본 주니치에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면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일본 팬들을 매료시켰다.

현역 은퇴 이후의 행보는 크게 달랐다. 선동열은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와 자신을 스타로 키워준 친정팀 기아 타이거즈에서 감독 생활을 마쳤고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활약하기도 했다.


2019년 선동열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내면서 "내 인생은 6회말...남은 3회도 한국야구에 바칠 것"이라고 했다. 야구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나 아직 3회가 남았다고 했었다. 우리 인생은 늘 9회말 역전승을 꿈꾼다. 그도 또다른 역전을 꿈꾸고 있을까.


아래는 조선일보 20191023일 자에 실린 기사 <내 인생은 6회말>이다.


<."흔히 '선동열'하면 평탄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전혀 아닙니다.

저도 힘들고 좌절했던 순간들이 많았고,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 털어놓으면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직구(直球)처럼 꾀부리지 않고 살았거든요.">

입력 :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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