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투 펀치’라는 말이 있다.

잽으로 선방을 때리고 스트레이트를 뻗는 복싱 기술 말고 야구 용어로도 쓰인다.

믿을 맨(믿을 만한 투수) 투수 2명을 묶어 원투 펀치라고 한다. 1선발과 2선발을 묶어 부르기 보다 우열을 나누기 힘든, 1선발과 1선발 못지않은 2선발을 합쳐 부른다.

역대 최강 원투 펀치로 1985년의 삼성의 김일융-김시진(50승), 1983년 삼미의 장명부-임호균(42승), 1984년 롯데의 최동원-임호균(37승), 1990년 해태의 선동열-이강철(38승), 1998년 현대의 정민태-정명원(31승), 2007년 두산의 리오스-랜들(34승), 2008년 SK의 김광현-채병용(26승), 2010년 김광현-카도쿠라 켄(31승), 2016년 두산의 더스틴 니퍼트-마이클 보우덴(40승), 2017년 기아의 양현종-헥터 노에시(40승), 2018년 두산의 조쉬 린드블럼-세스 후랭코프(33승) 등을 꼽을 수 있다.

사진=KBO. 김일융과 김시진(왼쪽부터)

그 중에서도 단연 톱은 김일융-김시진이다. 두 사람은 1985년 시즌에서 각각 25승씩 50승을 합작했고 그해 삼성은 77승 1무 32패로 전후기 시리즈를 모두 쓸어 담아 통합 우승했다. 승률이 7할 6리로 그해 한국시리즈를 지워버렸다. 지금도 그 승률은 깨지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 1985년 9월 18일 자 <라이온즈 "천하통일" 축배> 기사다.

안정된 컨트롤을 바탕으로 칼날 같은 직구와 슬러이더를 뿌리던 김시진은 1985년 후기리그 초반만 하더라도 다승, 승률, 방어율 등에서 독주했었다. 그러나 혹사로 인해 흔들렸지만 25승 달성에는 무리가 없었다. 내심 시즌 MVP까지 기대했지만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에 만족해야 했다.

삼성과 롯데에서 뛴 김시진 선수의 투수 기록

김시진은 1985년 269⅔이닝을 던지며 25승(김일융과 공동 1위)을 거뒀다.

평균자책점 2.00. 선동열(1.70), 최동원(1.92)에 이어 3위였다. 세이브도 10개(구원 5위)나 올렸다. 삼진을 201개 잡아 최동원(161개)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투구의 양과 질에서 단연 최고였다. 그의 투구에는 다른 투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다음은 KBO가 올해 선정한 <레전드 40인> 관련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마운드에 서면 전 삼진이나 볼넷을 의식하지 않았어요. 타자를 잡고, 실점을 억제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전 그때 다른 투수들과 달리 하이 패스트볼을 많이 던졌어요. 그래야 떨어지는 변화구가 잘 먹히니까. 높은 공을 건드리는 타자들은 대부분 뜬공으로 아웃됐죠.”

삼성 김일융의 투수 기록

김일융은 당시 34세 나이에다 어깨와 손가락에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역투, 호투했었다. 1985년 시즌에서 226이닝을 던지며 방어율 2.79(9위), 25승(1위) 6패. 탈삼진 107개(4위)였다.

훗날 두산에서 감독까지 했던 재일교포 포수 송일수는 삼성 유니폼을 입고 당시 최고의 포수였던 이만수의 백업이자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 뒤었다.

그러나 1985년 시즌 MVP는 해태 1루수 김성한에게 돌아갔다. 그해 MVP 후보로 삼성서만 김시진 김일융 이만수 등으로 표가 분산되면서 어부지리 수상에 가까웠다. ‘억세게’ 운이 좋았다. 김성한은 홈런(22개)-장타율(0.575) 2관왕을 차지했고, 그해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해 이만수는 홈런 공동 1위[22개], 타점 1위[87타점], 승리타점 1위[13타점], 포수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였으니 김성한에 절대 밀리지 않았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그해 MVP는 김시진에게 돌아갔어야 마땅했다.)

배정섭이 쓴 《프로야구 투타의 전설》에 따르면, 2년간 삼성의 왼쪽 날개 역할을 했던 김일융은 1986년 13승에 그쳤다. 지난 2년간의 무리한 투구, 당뇨병과 향수병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김시진 역시 1986년 16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데뷔 이래 승수가 가장 적었다.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해태 선동열에게 돌아갔다. 선동열은 24승 6패, ERA(평균자책점) 0.99로 리그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은 승률에서 뒤진 해태에 패하며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조선일보 1986년 12월 8일 자 기사에서 김일융은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86년말 하락세이던 김일융은 돌연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삼성 팬들은 탄식하며 아쉬워했다.

그는 조선일보 1986년 12월 8일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내리막길에 있던 내 야구 인생이 한국 프로야구 덕분에 일본에서 나를 다시 원할 정도로 되살아났다. 아들 교육 등 가정문제 때문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일융은 일본에 복귀해 1987년 11승을 거두며 부활찬가를 울렸다. 그해 일본 프로야구 컴백상을 수상했다. 이후 1992년 일본 야쿠르트에서 은퇴할 때까지 6년간 일본 무대에서 36승을 거두며 한일 통산 170승 143패(일본 116승 123패 + 한국 54승 20패)를 완성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의 86년 시즌이 주춤했던 이유가 다소 의심스럽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쉬어가는' 해였을까. 공교롭게도 김시진 마저 부진했는데 혹사에 의한 부진이었을까.

일본으로 돌아온 후 인터뷰에서 김일융은 "일본에서는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교로 타자를 잡을 수 있는 요령을 배웠다"고 밝혔다. 한국에서의 3년의 시간은 자신의 투구 기술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된 기간이었던 것이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김일융은 현란한 변화구 위주로 국내 타자들을 농락했다고 전한다.

커브 하나를 던져도 느린 커브, 더 느린 커브, 아주 느린 커브로 세분화시키는 완급조절과 포크볼을 장착하며 최고 투수의 반열에 올랐다. 훗날 두산 투수 유희관의 투구를 <느림의 미학>이라고 불렀지만, KBO 리그에서 느림의 원조는 바로 김일융, 일본명 니우라 히사오였다.

젊은 시절의 김일융. 오른쪽 사진은 삼성 시절의 모습이다.

일본 시절, 패스트 볼을 던지는 투수였지만 삼성에서 뛴 3시즌(1984~86년) 동안 기술 투수, 기교파 투수로 거듭났다. 커브와 체인지업을 열심히 연마한 것이다. 그러나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팀 동료들에게 연장자에 대한 호칭인 ‘형’으로 불리지 못했다. 시종 외부인 취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한국어를 전혀 할 수 없었던 점, 일본인으로 귀화한 점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이런 일도 있었다. 삼성 시절, 김시진과 함께 혹사에 가까운 투구를 던졌지만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오해였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실린 글을 번역하면 이렇다.

< 한국에서 선수로 뛸 때 당뇨병이 발병해 인슐린 주사를 매일 맞아야 했다. 하지만 당뇨병 투병사실을 드러낼 수 없어서 호텔 화장실 등 일절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주사를 맞았다. 그러나 어느덧 주사기를 들고 있는 것이 들통이 났고, 심지어 병의 영향으로 말랐던 적도 있어 '김일융이 각성제를 맞고 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2013년 일본 방송 프로그램에서 현재도 당뇨병과 격투를 벌이는 모습이 방영됐다.

좋아하는 음식이 밥과 사이다였다고 했다. 사이다를 옆에 두고 밥을 먹다가 팀원들이 밥에 사이다를 뿌려 먹느냐고 농담하던 이야기가 사족으로 붙어 다녔다. 사이다를 밥에 뿌려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단 음식을 좋아했고 이런 식습관이 당뇨병을 가져왔다.>

김일융은 41세에 당시로선 일본에서 가장 오래 뛴 선수로 은퇴했다. 일본과 한국의 5개 팀에서 24년간 뛰었다. 그가 한 일본 언론에서 한 말이다.

“막다른 골목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가면 항상 다른 길이 있지만, 가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후회할 것입니다.” (それが行き止まりでも、行ったら必ず違う道がある。でも、行かなかったら、それも分からない。あとで後悔するだけですからね)

반면, 김일융이 떠난 1987년 김시진은 절치부심, 2년 만에 20승 이상을 거두며 23승으로 다승왕에 오른다. 그리고 최초 한국 프로통산 100승으로 장식하며 입단 동기이자 아마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최동원을 11승 차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1988년 11승으로 부진한 뒤 당시 선수협의 여파 등으로 롯데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안타깝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가지 더. 김시진에게 아쉬움이 있다면 시즌 내내 잘 던지다가 포스터 시즌에서 약한 면모를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팬들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핑계를 대면 안 되지만, 한국시리즈에 가면 늘 팔이 아팠어요. 그래도 어쩝니까? 던져야죠.”

사진=KBO. 1985년 한국 프로야구 올스타전 MVP를 탔을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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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선일보 1968년 9월 19일자 7면 기사 <손이 크다...日 거인팀의 유망주 김일융 군>다. 그는 한국에 오기 훨씬 전부터 일본 프로야구 유망주로 국내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대성의 소질을 갖춘 투수로 재일동포의 우상이었다.

손이 크다=日 巨人팀의 유망주(有望株) 김일융(金日融)군

대성(大成)의 소질 갖춰

다저스 쿠팩스의 손과 비슷

내년 목표(目標)‥‥3단계 훈련(訓練)

불세출의 명 투수 「가네다(金田正一) 선수의 2세」 라고까지 일컬어진 재일교포 김일융(金日融·17·일본명 신포수부[新浦壽夫]) 군은 지난 12일부터 자이언츠팀의 팜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요미우리구단(読売球団)에선 그의 천부적인 자질을 살리기 위해 3단계의 특별한 영재교육프로그램을 짜고, 기초훈련에 기도(木戶)코치, 투구 기본연습에 기다가와(北川)코치, 1군 선수로서의 최종훈련에 후지다(藤田) 피칭코치를 담당시켜, 내년도의 전력으로서 기대를 걸고 있다. 구단 측에서 이렇게까지 아끼는 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야구평론가 고니시(小西得郎)씨는 그의 손을 보고 『미국 다저스팀의 명투수였던 쿠팩스와 꼭 같다』고 놀라와 하면서 내일의 명 투수로 서슴지 않고 점을 찍었었다. 왼손이 가네다(金田正一) 투수보다 불과 0·5㎝ 짧은 21·5㎝, 중지는 9·8㎝, 식지는 8㎝. 옛날부터 손이 큰 투수가 대성하는 법이어서, 김군이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그의 나이로 봐 앞으로 그의 손은 가네다(金田) 선수보다 더 커질 것 같고 훤칠한 키에 스무드한 좌완의 투구폼이 18년 전 가네다(金田) 선수의 데뷔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인 것이다.

【동경(東京)서 신동호 특파원(申東澔特派員)=연착(延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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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스포츠 커뮤니케이션스》와의 2020년 10월 23일 자 인터뷰에서 김일융(작은 사진 속 오른쪽)은 삼성 시절의 회고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포털 사이트 번역기의 도움을 빌려 전한다. 김일융은 현재까지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니노미야 : 한국 프로야구의 출범은 82년이니까, 김일융이 이적한 것은 3년째(1984년). 막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시기인데, 당시에는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김일융 : 설비 면의 지연은 현저했습니다. 불펜이 창고이거나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어떤 구장에서는 선수용 사물함도 없었고 좁은 통로에서 선수복을 갈아입은 적도 있습니다(쓴웃음).

- 말을 포함해서 생활은 어땠습니까?

김일융 : 재일교포라고는 하지만, 일본어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도 그때까지 한 번밖에 안 가봤어요. 당연히 생활은 힘들었지만 일본어를 아는 선수가 있어서 통역을 대신해 주어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다.

- 일본 야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김일융 : 어쨌든 한국은 파워 중시입니다. 던지는 것도, 치는 것도 파워가 중요해요. 슬라이딩도 스파이크의 날을 향해 점점 파고듭니다. 자신의 강인함을 어필하는 듯한 플레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당연히 난투도 다반사죠. 미국화된 야구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지 심판도 메이저리그 같은 좀 넓은 스트라이크 존이어서 투수로서는 고마웠습니다.

- 저는 80년대 한국에 자주 취재하러 갔는데 관객들도 과격했죠. 소주병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라운드에 던져 넣고 있었습니다. 지역별 감정의 충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김일융 : 그런 것도 있는데, 반대로 한국의 배짱이 있는 강한 팀을 상대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 욕설에 가까운 야유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어땠습니까.

김일융 : 말을 모르니까요. 우스갯소리가 들려도 모른 척하고 있었어요(쓴웃음). 다만 대량실점 등 틀림없는 경기라면 선수 전원이 한국식 정좌를 하고 팬들에게 사과해야 해요.

- 팬들에게 사과합니까! 게다가 정좌라니….

김일융 : 사과하면 조용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다만 저는 그것만은 용서해 달라며 중간에 면제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에서도 10연패를 당하면 날달걀을 맞은 시기가 있었으니까요. 메이저 스포츠화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삼성에서의 1년차는 16승, 이듬해는 25승, 3년간 54승 20패라는 훌륭한 성적이었습니다.에이스로서 맹활약을 한 것입니다만, 팔꿈치 상태는 개선 된 것입니까.

김일융 : 네, 팔꿈치는 물론 어깨도 많이 회복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스타일을 조금 바꿔 변화구를 중심으로 기교파를 목표로 한 것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은 많은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 등 해외로 나가지만 김일융 씨는 한국에서 야구를 한 선구적 존재입니다. ‘고향에 들어가면 고향을 따르라’는 말도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 활약하기 위한 요령은 무엇일까요?

김일융 : 저는 반대로 고향을 따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아끼는 것은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한국에 있던 3년 동안 매일 경기 3~4시간 전부터 달리기하고 복근 등 근육을 단련시키는 기초연습을 반복했습니다.

- 한국에서는 그런 워밍업을 하지 않나요?

김일융 : 당시에는 그런 광경은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지 5~6년이 지났을 때 당시 팀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김일융이 하던 일의 중요성을 최근에야 알았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