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신간] 디아스포라의 시인 이명애의 《계곡의 찬 기운 뼛속으로 스며들 때》 : 월간조선

1965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탈북민 이명애 씨가 두 번째 시집 《계곡의 찬 기운 뼛속으로 스며들 때》(곰곰나루 刊)를 펴냈다.

첫 시집 《연장전》을 발표했을 때 시인은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데 있다. 시를 읽으면 그림을 보듯 눈앞에 그 상황이 그려지기를 원한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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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명애

그녀는 2005년 8월 탈북을 감행했다. ‘길 없는 산을 넘고 넘어’ 자신의 운명을 앞에서 견인한 것이다. 그렇게 ‘사명 끝난 사회주의’와 결별하고 자유를 향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2006년 8월 대한민국으로 입국했고 꼭 10년 뒤 2016년 대학에서 문학(방송문예창작학과)을 전공했다. 2017년 12월 ‘K-스토리’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계곡의 찬 기운 뼛속으로 스며들 때》는 이산(離散)의 아픔과 경계인으로서의 서사를 담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비극이 가득 배어 있다. 북한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생(生)을 건네준 시원(始原)의 공간이자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비극적 한(恨)의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이 부딪히며 시의 지평을 넓힌다.

문란한 사회질서 바로잡으라는

꼭대기 방침이 하달된다.

앉아서 굶어 죽을 순 없어

살길 찾아 떠난 사람들

관할지로 돌려보내기 위한

대규모 교환 작전이 펼쳐진다

각 시군별로

타지에서 온 사람들 잡아 싣고

도내 종합운동장에 집결한다

모두 대가리 뒤로 손 올려!

이 쌍간나야, 똑바루 앉지 못해?

임시로 동원된 호송원들

발길질해대는 꼴

쑥대에 올라간 민충이 같다

데려온 사람들 넘겨주고

데려갈 사람들 버스에 싣고

밤새 달려

꽃제비 구호소에 가두고

담당 보안원에 연락했으나

감감 무소식이다

주인 없는 낡은 집

장맛비 한 번에 다 허물어지고

그나마 온전한 집은

이미 빚값에 넘어가 버리고

종잇장에 머무는 이들 몸뚱이

냄비 숟가락 옷가지 몇 개 들어 있는

배낭 하나가 전부인 사람들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란 말인가!

- 시 ‘이탈자’ 전문

시 ‘이탈자’는 살길 찾아 떠난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임시 호송원의 눈으로 쓴 시다. 호송원의 눈에 비친 탈북민은 그저 ‘냄비 숟가락 옷가지 몇 개 들어 있는/ 배낭 하나가 전부인 사람들’에 불과하다. 잡아서 다시 돌려 보내도 그저 막막하고 고통스런 현실과 마주할 뿐이다. 시인은 호소한다.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란 말인가!’라고.

시 ‘강제집결소’를 읽기 전에 집결소라는 공간을 이해해야 한다. 북한의 집결소는 여행지 이탈자, 여행기일 경과자, 부랑아, 사건 계류자, 강제송환 탈북자 등을 각자의 거주지로 이송하기 전에 강제로 잡아 두는 공간을 말한다.

이 곳으로 잡혀온 시인이 보안원에게 사는 곳과 이름을 대니 ‘개천’이라 부른다. 실제 시인은 평남 개천중고교를 졸업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성(姓)씨도. 부모가 지어준 고운 이름도 필요 없다. 그저 ‘개천’이면 충분하다. 인격이나 개성은 이곳 집결소에선 통하지 않는다.

사는 곳과 이름을 대니

그때부터 나는 개천으로 불렸다

계곡 옆에 자리한 오두막

꾸덕꾸덕한 강냉이밥

쉰내 풀풀 나는

억센 산나물국에 말아 먹고

무쇠 가마 두 개 놓인 부엌

양쪽으로 방이 있고

남자 여자 갈라져 들어간다

딸가닥, 자물쇠 잠기는 소리

비닐로 막은 작은 뙤창

어렴풋이 비쳐 드는 하늘빛

윗옷을 이불 삼아 눕는다

가마니때기를 뚫고 올라오는 습기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

겨우 눈감았다 떴는데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

기상! 기상!

희미한 동쪽 하늘

계곡의 찬 기운 뼛속으로 스며든다

앞에는 반장으로 지목된 제대군인

뒤에는 집결소 젊은 보안원

호미 하나씩 든 사람들

산 중턱 밭머리로 몰고간다

- 시 ‘강제집결소’ 전문

자유북한운동연합 관계자들이 2022년 6월 5일 밤 경기도 포천에서 코로나로 고통 받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마스크 20,000장, 타이레놀 15,000알, 비타민C 30,000알을 20개의 대형애드벌룬으로 보내고 있다. 사진 제공=자유북한운동연합

목숨을 건 탈북 과정에서 미제의 앞잡이로만 알았던 선교사가 아무런 대가 없이 탈북민을 환대하는 모습은 시인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시인의 “머릿속에 또렷이 저장된/ ‘승냥이’라는 제목의/ 인민학교 교과서의 그림”과 아들의 열세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전날부터 부산을 피우”며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숭아’를 구해온 사람의 이미지는 어떻게 합일될 수 있을까.

시집 해설을 쓴 시인 휘민은 “상냥한 웃음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 그래도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느끼는 혼란이 짐작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승냥이의 얼굴에/ 천사의 미소가 포개진다”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시인의 기억 속에서 재생된 현재의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을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의 작품 속에서 체화된 시간은 매번 그 시간을 형상화하는 장면들과 이야기 속에서 구체화된다.

중국에서 한국인 선교사를 처음 만났을 때

문득 떠오르는 그림 하나

사과나무에 묶여 있는

축 늘어진 아이

이마에 ‘도적’이라 씌어 있다

왼손엔 청강수 깡통

오른손엔 붓을 들고 이빨

흉물스럽게 웃는 미국인 선교사

그 옆엔 사냥개가 버티고 앉았다

내 머릿속에 또렷이 저장된 도 못

‘승냥이’라는 제목의

인민학교 교과서의 이 그림

떨어진 사과 하나 주었다가

셰퍼드 공격받고 도둑으로 몰린 소년

원수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대라

선교사의 이 말에는

우리 민족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려는

미제의 침략 의도가 숨어 있다

선교사는 미제의 앞잡이다

병원을 차려놓고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는 척

피를 뽑고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미제는 우리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다

상냥한 웃음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우리를 안기부에 넘기는 건 아닐까?

선교사가 아들에게 묻는다

제일 맛있는 음식이 뭐야?

복숭아요.

복숭아보다 더 맛있는 거.

복숭아가 제일 맛있어요.

아드님이 복숭아를 엄청 좋아하네.

난생처음 먹어봤으니

그 맛을 잊을 수 없나봐요.

열세 번째 생일을 맞는 아들

전날부터 부산을 피우던 선교사

복숭아가 막물이라 겨우 구했다고 한다

케이크, 복숭아, 바나나, 포도, 빵, 과자…

잔뜩 올린 생일상

아들은 예쁜 뿔 모자를 쓰고

볼펜심 같은 촛불이 춤추는 모습

마냥 바라보고

선교사가 생일 축하 노래 불러준다

숨어지내는 작은 공간에

폭죽이 팡팡 터지고

화들짝 놀라 아들을 부둥켜안는데

조막만 한 카메라 들고

셔터를 눌러대는 선교사

함박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승냥이의 얼굴에

천사의 미소가 포개진다

- 시 ‘선교사’ 전문

지난 2월 1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전국탈북민북송반대국민연합 관계자들 중국정부 탈북민 강제북송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시집 전체가 냉혹한 체험으로 가득하다. 읽은 내내 서사의 힘이 느껴진다. 어설픈 희망이나 모호한 그리움으로 그럴듯하게 꾸미지 않았다. 냉혹하나마 정면으로 무언가를 돌파해가려는 자신만만한 서사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기억 속 황폐한 체험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시정신이 놀랍다. 향후 그의 시가 어디로 확장될지 자못 흥미롭다.

여권을 발급받는 일이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하에서 살아가기 위한 자기 확인 절차라면, 통장을 만드는 일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다. 직장을 갖게 된 화자는 이제 “불룩하면 웃고/ 납작하면 울어야 했던/ 나의 빨간 돈주머니” 대신 “매달 들어 올 월급”으로 “차곡차곡 쌓여 갈 나의 미래”와 “삶을 스스로 설계해”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