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저녁 8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신재민(34)의 귀국 독주회가 열렸다. 독주회 타이틀은 ‘꿈’.
7년간 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했으니 ‘꿈’을 이뤘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새로운 ‘꿈’을 도전한다는 말일까.
유년시절, 신재민은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을 들으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었다. 그러고 보니 이날 독주회의 레퍼토리 중 하나가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었다. <어린이 정경>에는 여러 곡이 담겨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낭만파 피아노곡으로 널리 알려진 <트로이메라이(Traumnerei)>다. 트로이메라이는 독일어로 환상, 공상, 꿈을 의미한다.
어릴 때 <트로이메라이>를 들으며 연주가를 꿈꾸던 이가 이제 꿈을 현실로 이루려고 돌아왔다는 뜻이 아닐까.
[프로그램]
1.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Keyboard Sonata in C Major, K.95 건반소나타 C장조, K95
Keyboard Sonata in G Major, K.432 건반 소나타 G장조, K432
2. 로베르트 슈만, 어린이 정경, 작품번호 15 (Robert Schumann Kinderszenen, Op.15)
Ⅰ. Von fremden Ländern und Menschen 미지의 나라들
Ⅱ. Kuriose Geschichte 이상한 이야기
Ⅲ. Hasche-Mann 술래잡기
Ⅳ. Bittendes Kind 조르는 어린이
Ⅴ. Glückes genug 만족
Ⅵ. Wichtige Begebenheit 큰 사건
Ⅶ. Träumerei 트로이메라이
Ⅷ. Am Kamin 난로가에서
Ⅸ. Ritter vom Steckenpferd 목마의 기사
Ⅹ. Fast zu Ernst 약이 올라서
ⅩI. Fürchtenmachen 거짓말
ⅩII. Kind im Einschlummern 잠든 어린이
ⅩIII. Der Dichter spricht 시인의 이야기
3. 프레데리크 쇼팽, 발라드 1번 g 단조, 작품번호 23 (Frédéric Chopin Ballade No. 1 in g minor, Op.23)
4.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왼손을 위한 전주곡과 야상곡, 작품번호 9 (Aleksandr Scriabin Prelude and Nocturne for the left hand, Op.9)
5.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b♭ 단조, 작품번호 36 (Sergei Rachmaninoff Piano Sonata No. 2 in b♭ minor, Op.36 [Amalgamation by Djong Victorin Yu of original and revised versions - World Premiere])
1시간 40분 동안 연주가 이어졌다. 꿈을 찾기 위해 뛰어다녔던 7년의 시간들이 모두 건반 위에 소환되었다. 젊음을 쏟아 부었던 열 손가락 마디마디가 건반을 울렸고, 그 울음에 관객이 호응했다. 박수가 오래 이어졌다.
신재민은 스카를라티 곡으로 가볍게 시작해, 슈만으로 달콤하게 만든 뒤 쇼팽의 발라드 1번으로 한껏 흥을 고조시켰다. 스크리아빈의 왼손 연주로 2부를 부드럽게 열더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에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7년이라는 시간을, 꿈을 위해 뛰어갔던 세월을 열 손가락으로 모조리 쏟아냈다.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제2번’은 피아노 세계의 에베레스트산 같은 존재”(지휘자 유종)라고 한다. 연주를 들을수록 점점 소름이 끼쳤다. 쉬어가는 대목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단거리 선수처럼 레이스를 펼쳤다. 연주의 대목 대목이 연극의 클라이맥스처럼 절정으로 이어졌다. 귀가 얼얼했고 시종 심장이 쿵쾅거렸다. 미칠 것 같았다. 듣는 사람이 이 정도인데 연주자는 오죽했을까. 보통 체력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곡처럼 느껴졌다.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정성을 들였을까.
피아노 난곡(難曲)으로 알려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악보. 온갖 고난도의 기교와 열정을 다 짜내야 하는 무지막지한 곡이지만, 무엇보다 첫 마디부터 쾅 하고 터져 나오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쉽게 연주자가 도전하기 어려운 곡이다. 이 악보는 유종 지휘자가 병합한 악보는 아니다.
게다가 이 곡은 세계 초연(初演)이었다. 이 곡은 신재민의 스승인 지휘자 유종(兪淙) 선생이 합성 편집한 것이다.
피아니스트 신재민의 말이다.
“제 음악적 역량과 테크닉의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정말 힘들게 공부했던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입니다. 저에게 오랜 시간 음악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지휘자 유종 선생님께서 이 소나타의 초판과 개정판을 병합하여 만드신 새로운 버전으로 오늘 세계 초연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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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은 누구?
신재민은 1988년에 울산에서 태어나 4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 최고의 피아니스트 강충모의 문하에 들어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사 졸업 후, 곧바로 독일로 향하여 세계적인 명교수 파비오 비디니 (Fabio Bidini) 교수를 만나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콜번 스쿨(The Colburn School)에서 Artist Diploma를 취득하였으며, 한스 아이슬러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현재는 울산대학교에 출강하여 후학을 양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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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객원지휘자 유종 선생
다음은 지휘자 유종의 말이다. 유종은 세계적인 악단인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 쥴리니, 스베틀라노프, 살로넨 등과 함께 햇수로 6년간(1993~1998년)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0장의 클래식 음반이 해외 출시했었다. 울산시향, 포항시향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다. 그의 말이다.
“작곡가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1913년에 ‘소나타 제2번’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1931년에 개정판을 출판했는데, 원작은 너무 방대하고 개작은 너무 짧았다고 합니다. 피아니스트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4~1989)가 이 둘 사이의 합의점을 찾을 수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를 찾았고, 라흐마니노프는 선뜻 ‘합성작’을 만들어 보라고 승낙을 했습니다.
호로비츠는 수십 년에 걸쳐 합성을 시도해봤습니다. 결국 연주는 여러 번 했으나, 출판할 수 있는 완성판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의 교향곡 제3번을 합성 편집한 적이 있는데, 브루크너가 여섯 번을 개작했던 방대한 곡을 적절하게 편집해 하나의 정체성이 있는 교향곡을 만들었죠. 이후 아르메니아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세계 초연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라흐마니노프의 같은 제목이나 상당히 다른 두개의 판(坂, 버전)을 편집했습니다. 음악이든 문학이든 자주 일어나지 않는 합성판을 만든 것입니다.
편곡이 아닙니다. 모든 음은 작곡가가 쓴 것만 가지고 합성을 한 것이죠. 작곡가가 개정판을 만들 때 합성도 가능하게 곡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이음새를 느낄 수 없는 일종의 ‘개작’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수술자국이 없는 대수술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음악 역사에 처음이라, 어떠한 작업을 했는가를 일일이 기재하고 설명했는데, 그 부록이 원래 악보보다 페이지 수가 더 많습니다.”
피아니스트 신재민이 연주 후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지휘자 유종에 따르면, 이날 세계 초연한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 합성 편집본은 1년여에 걸친 땀과 노력이 담긴 창조물이다. 편곡이 아니다. 모든 음과 표현은 라흐마니노프가 사용한 것만을 그의 의대대로 사용했다.
다만 구성은 ‘소나타’라는 제목과 원 의향에 어울리는 일관된 구조를 유지하면서 두 버전에 표현된 작곡가의 의도를 최대한 병합하는 데 기반을 두었다.
유종은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악보의 오타를 완벽히 제거하려 노력했고, 음표 하나하나의 위치와 스타일 또한 작곡가가 만족할 인쇄방식에 맞추려고 했다.
기자는 피아니스트 신재민의 연주를 들으며 7년간 간절히 꾸었던 꿈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아울러 푸른 피아니스트의 또다른 꿈을 떠올려 보았다. 또한 세계 초연을 가능케 한 지휘자 유종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