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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한국 프로야구 출범 40년 40장면] <6> 추억의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쌍방울 하면 떠오르는 투수 조규제 김현욱 김원형, 타자 김기태 박경완 이진영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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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프로야구 40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40장면을 소개한다. 이 장면들은 어쩌면 B컷일지 모른다. 전면에 놓이기에 뭔가 허전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기록될 장면들일 것이다. 결정적 장면은 수많은 스포츠신문과 주요 매체에서 다 다뤘거나 다룰 예정이니 불필요한 소음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 7권의 프로야구 관련 책들의 도움을 받아 기술한다.

《이것이 야구다-프로야구 30년을 뒤흔든 100인의 한마디/ 명장면 200선》(2011)
《그라운드 20년 마이크 30년 허구연의 야구》(2008)
《한국 프로야구 결정적 30장면》(2011)
《한국 프로야구 난투사》(2015)
《프로야구 투타의 전설》(2010)
《프로야구 크로니클》(2012)
《철학자 하일성의 야구 몰라요 인생 몰라요》(2013)
2000년 1월 프로야구 쌍방울 선수들이 퇴출 위기에도 불구하고 전주 야구장에서 맹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최근 쌍방울 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다. 검찰은 해외 도피 중인 전() 회장 등 쌍방울 임원 5명에 대해 여권 효력을 무효화 해달라고 외교부에 요청한 상태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대북 경협 사업을 도와주는 대가로 쌍방울 그룹으로부터 억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수사의 파장이 현 정치권으로 튈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추억 속의 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가 떠오른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한국 프로야구 8번째 창단 구단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지만 불과 10년 만에 야구사에서 쓸쓸히 사라졌다.

전주와 군산 등 전북지역에 연고를 두었던 쌍방울 구단은 1990년 창단해 이듬해 1군 무대에 오른 이후 9시즌 동안 1140경기를 치러 455655패와 30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016,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쌍방울 구단에 대한 법정퇴출을 선고했고, 이튿날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만다.

 

★ 쌍방울 레이더스 역대 성적

 

연도

정규리그 순위

최종 순위

경기수

승률

1991

6/8

6

126

52

3

71

0.425

1992

8/이하 8

8

이하 126

41

1

84

0.329

1993

7

7

 

43

5

78

0.361

1994

8

8

 

47

5

74

0.393

1995

8

8

 

45

3

78

0.369

1996

2

3

 

70

2

54

0.563

1997

3

3

 

71

2

53

0.571

1998

6

6

 

58

2

66

O.468

1999

매직리그 4/4

8

132

28

7

97

0.224

KBO 리그 통산

9시즌

1140

455

30

655

0.410

 

모기업인 쌍방울 그룹은 메리야스 업체인 ()쌍방울과 무주 리조트를 운영하는 쌍방울 개발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기업이자 전북지역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이었다. 모태는 창업자 이봉녕(李奉寧·작고) 명예회장이 1963년 설립한 쌍녕섬유공업이었다.

 

이 명예회장이 쌍방울을 국내 굴지의 내의 브랜드로 회사를 키웠으며 이후 여성복과 남성복, 아동복 등을 만드는 섬유 제조업으로, 그리고 1980년대 들어 건설과 레저 쪽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이후 쌍방울 그룹은 태령상호신용금고와 전북이동통신 등 금융업과 통신 판매업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1997IMF를 겪으며 회사가 출렁이는데 당시 언론에는 무주 리조트에 무리할 정도로 시설투자를 한 때문으로 보도했다.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대비하기 위해 19973800억 여원의 자금을 투입했는데 그 자금 중 상당분을 제2금융권에서 단기자금으로 끌어다 써 스스로 자금난에 몰렸던 것이다.

 

쌍방울의 자금난을 몰고 왔던 동계 유니버시아드는 전북이 1997124일부터 22일까지 무주와 전주에서 개최한 동계 체육대회를 말한다. 대한민국이 개최한 최초의 동계 종합 스포츠 경기 대회이자 최초의 유니버시아드 대회였다.

 

당시 국제적인 체육대회를 민자 유치 형식으로 지자체가 개최하기는 이 대회가 국내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쌍방울 관계자는 당초엔 스키장 등 기반사업만 맡을 예정이었으나 정부 보조금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모든 시설비를 떠안게 됐다공식으로 잡힌 투자비는 3808억원이나 실제 유니버시아드에 투입된 자금은 650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북지역 기업이라는 점에서 무리하게 동계 유니버이사드 대회 제반 시설을 떠안은 것이 회사를 그 지경, 부도까지 내몰게 한 원인이었다. 만약 IMF가 터지지 않았다면 쌍방울 레이더스는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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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14일 잠실 두산-쌍방울전에서 5회초 쌍방울 첫타자 이진영이 촤측 펜스를 맞히는 안타를 치고 2루까지 가려다 태그아웃되고 있다. 2018년 KT 위즈에서 은퇴한 이진영은 쌍방울의 프렌차이즈 스타다. 사진=조선일보DB


1989년 창단한 쌍방울 레이더스

 

1989년 창단한 쌍방울 레이더스는 구단이름을 전국 공모로 선정했다. 기존 구단이 라이온즈, 타이거즈, 베어스, 이글스 등 동물 이름을 따왔던 점을 감안해 특공대’, ‘돌격대의 뜻을 지낸 레이더스(Raiders)’를 이름으로 정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척이나 신선한 이름이었다. 당시 언론은 쌍방울 레이더스를 왕방울 돌격대라고 불렀다.

 

손윤, 배지헌이 쓴 《프로야구 크로니클》에는 199145일 열렸던 쌍방울의 역사적인 1군 첫 경기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작은 형님격인 제7구단 빙그레 이글스였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후 새롭게 가입한 처지는 같았지만 팀 전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빙그레는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1989년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고 1990년에도 정규시즌 3위로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11-0, 쌍방울의 완승이었다.

선발 등판한 신인 조규제가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6회까지 단 1안타로 봉쇄했으며 7회 마운드에 오른 박진석이 경기를 매조졌다. 타선도 홈런 2개를 포함해 장단 17안타로 독수리 마운드를 두들겼다.

 

첫 단추를 잘 낀 쌍방울은 기대 이상으로 선전을 펼친 끝에 52713(승률 0.425)를 기록하며 LG와 공동 6위에 올랐다. 1986년 신생팀 빙그레가 31176(승률 0.290)에 그친 것을 감안하면 이변이었다.


SQPZ6G2F5CKQJ57FIRYZR6ZG34.jpg 투수 조규제


쌍방울의 1군 연착륙 성공은 김인식 초대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의 뛰어난 지도력과 함께 팀 이름 그대로 투타에 쌍방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조규제와 김기태.

앞서 김인식 감독은 코끼리 김응용 해태 타이거즈 감독 아래에서 코치를 줄곧 맡아오다 쌍방울 초대 감독에 부임했었다.


개막전 호투를 펼친 조규제는 그해 9727세이브를 거두며 세이브왕과 신인왕을 차지했다. 타석에서는 김기태가 신인 최다홈런과 좌타자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동시에 경신하는 27홈런과 92타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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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방망위를 휘둘렀던 ‘왕방울 돌격대’의 심장 강타자 김기태. 사진=조선일보DB


그러나 1992년 주력 선수 부상과 군대 문제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최하위로 추락했고 93년 역시 시즌 7위에 머물렀다. 암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어린왕자김원형이 430OB를 맞아 단 한 개의 볼넷만을 허용하는 완벽 투구로 역대 7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1603_352.jpg 쌍방울 초대 감독 김인식

 

기자는 김인식 전 감독과 지난 2016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쌍방울 감독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해태 수석코치(1986~1989년)로 있을 때는 하는 일 하나 없이 계속 팀이 연승했어요. 사실 가르친 게 없어요. 근데 쌍방울 감독(1990~1992년)을 하면서 매일 져요.

그땐 7회 이후에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젖은 유니폼으로 불 꺼진 숙소에 돌아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요. 숙소에 들어가는 시간이 밤 11시쯤 될까요? 저도 모르게 시합 생각에 빠져드는 겁니다. ‘왜 졌지? 왜 이리 안 풀리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제 씻고 자야지’ 하는데 시계를 보면 새벽 4시야.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기는 감독도 외롭고 혼자 술 먹는데, 지는 감독은 오죽하겠어요?”

 

―그땐 술 많이 드셨어요?

 

“몸 다치기 전에는 술 좀 하는 편이었어요. 술 담배 끊은 지 11년 됐어요.”


김인식 감독이 떠난 뒤에도 쌍방울은 1994년과 95년에도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그나마 94년 김기태가 25홈런을 기록하며 왼손 타자로는 최초로 홈런왕에 올랐고 95년에는 OB에서 이적한 김광림이 타율 1(0.337)를 차지했다.


01241996050250201431.jpg투수 김현욱

 

쌍방울의 反轉과 구단 解體

 

쌍방울이 반등한 것은 1995년 시즌 이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다. 혹독한 훈련으로 팀 전력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당시 훈련에 대해 이런 증언이 있다. 《프로야구 크로니클》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상상도 못할 훈련이 계속됐다. 타자들은 손바닥이 찢어져 스윙할 수 없는데도 (김성근) 감독님 앞에서 다시 수천 번씩 배트를 휘둘렀다. 내야뿐만 아니라 외야 펑고도 하루 1000개 이상씩 받았다. 오죽 힘들었으면 휴식일에도 어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무리하게 놀아도 다음날 몸이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01241996042542501111.jpg 쌍방울 시절의 김성근 감독


1996년 정규시즌 2(최종순위 3)로 마감하면서 창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비록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쌍방울의 환골탈태는 프로야구를 더 뜨겁게 달궜다. 관중들도 늘어다 총 관중 수가 265918명에 달했다. 97년 시즌 3위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쌍방울 돌풍은 거기까지였다. 98년 시즌 6위로 추락했고 99년에는 승률 2할대를 기록했다. 쌍방울 매직의 상징이던 김성근 감독도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고 MLB 감독이온들 불가피했으리라. 구단 팬들은 깡수주로 경기를 지켜봤으며 쓰린 속을 움켜쥐며 미칠 지경이었모기업이 IMF로 위기를 겪으며 쌍방울은 구단 운영을 위해 선수들을 모두 내다팔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현욱과 김기태라는 투타의 쌍방울의 간판스타를 삼성 라이온즈에 내주고 말았다.

 

당시 돌격대의 왕방울김기태는 26홈런에 2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며 타격왕(0.344)에 올랐었다. 그리고 97시즌 불펜으로만 뛰면서도 다승(20), 평균자책점(1.88), 승률(0.909)에서 1위를 차지한 3관왕 투수 김현욱이었다.

 

리그를 대표하던 투수, 타자를 받게 된 삼성은 현금 20억원을 쌍방울에 건넸다. 당시 KBO는 김기태와 김현욱의 트레이드를 조건부 승인하며 쌍방울이 1999시즌 66경기에서 승률 3할을 채우지 못할 경우 이사회를 소집해 조치를 취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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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전에도 쌍방울은 포수 박경완과 투수 조규제를 15억원에 내다 팔았다’. 이들은 신생팀 현대 유니콘스의 주역으로 1998년 첫 우승을 이끌며 프로야구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김은식이 쓴 《한국 프로야구 결정적 30장면》에는 1999년 시즌 쌍방울을 ’철한 동네북이었고 승수 쌓기의 제물에 불과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선수단과 프런트의 급여가 밀렸고 1군에 앞서 2군이 먼저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1999년 시즌에서 132 경기 28977무승부로 승률 0.224KBO가 약속한 3할 승률을 맞추지 못했다. 결국 한 차례도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한 채 20001월 해체되고 말았다.


화면 캡처 2022-09-30 062133.jpg


조선일보 19991223일자 스포츠면 기사 <‘쌍방울 사태’ 이번 주가 고비>를 보면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번 주가 지나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의 운명이 풍전등화다. 레이더스의 박효수 사장은 22이번 주까지 인수기업을 물색해 보고 안 되면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매각을 위탁하겠다고 말했다.

쌍방울 김종철 법정 관리인이 지난달 중순 박용오 KBO 총재에게 연내 매각의사를 밝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으나 쌍방울 측이 매각 대금으로 200억 원 이상을 고집해 국내외 기업이 모두 인수의사를 철회한 상태.

쌍방울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KBO도 당장 내년 경지방식조차 결정하지 못할 정도로 지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설령 KBO가 나선다고 해도 해결될 전망이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새 연고지를확보해야 하고 가입금 등 난제가 쌓여 있다. 드래프트도 기존 7개 구단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하다. KBO 박용오 총재의 능력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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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는 뛴다.' 2000년 1월 쌍방울 선수들이 퇴출설에도 불구, 전주야구장에서 동계훈련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맨 왼쪽이 신인 이진영 선수다. 사진=조선일보DB


쌍방울의 흔적들


현재 SSG 랜더스의 김원형 감독은 현역 시절 쌍방울 레이더스의 에이스로 유명했다김원형(쌍방울 1991~1999, SK 와이번스 2000~2011)은 한국 프로야구 통산 134승으로 다승 전체 9위다. (1위는 송진우, 2위는 정민철, 3위는 양현종) 그러나 다패 2위(144패)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쌍방울 레이더스의 전력이 좋지 않아서다. 어쩌면 첫 출발이 쌍방울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으리라.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쌍방울이 해체된 후 인천을 연고로 하는 SK 와이번스로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되었고 한국시리즈 우승도 맛보았다.


★ 쌍방울의 주요 기록(나무위키 인용)


5년 연속 구단 피홈런 1: 1991 ~ 1995

한 시즌 최다패 기록: 97(287)

역대 최소관중 기록: 54(1999107vs 현대, 전주구장)

홈경기 최다 연승기록: 17연승 (1996814~ 1997413)

한 시즌 최다 완봉승(영봉승 포함): 199619

한 시즌 최다 구원승: 199744

 

2011년 기준, 쌍방울 출신 선수는 김원형, 박경완, 오상민, 이진영 이렇게 4명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해 오상민 선수가 불미스런 일로 퇴출되면서 선수생활을 접었고 SK의 김원형도 코치로 전향했다.

 

20131022일 박경완이 은퇴를 선언하고 201445일 한화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마지막 쌍방울 선수는 이진영이 되었다.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19991차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이진영은 쌍방울의 마지막 신인 선수로 기억된다.

이후 SK 와이번스 선수로 줄곧 뛰었고 2008년 시즌 후에는 자유계약선수(FA) 신분으로 LG 트윈스에 이적했다. 선수의 마지막은 KT 위즈에서였다. 그는 2017년 6월 22일 ‘이영미 인(人)터뷰’의 에서 이런 회고담을 들려준 일이 있다.

 

날 프로에 데뷔시켜준 팀인데 (쌍방울 입단) 1년 만에 사라져서 아쉬웠다. 당시 모기업이 부도나서 야구단을 운영할 수 없는 상태였고 내가 입단할 때 간판 선수들이 대부분 트레이드가 됐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기회로 작용했다. 선배들의 빈자리를 신인인 내가 채운 것이다. 그때 팀을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님을 만나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던 부분도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본다. 이후 강병철, 조범현 감독님 모두 연습량 많기로 유명하신 분들인데 당시엔 훈련 받기가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훈련량 덕분에 지금까지 야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입력 :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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