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이라기엔 너무 예쁘다. 주황색 유리 온실이며 잘 정돈된 앞마당, 카페를 연상케 하는 외관의 체험 공간이 눈길을 먼저 붙든다. 참나무 껍질로 만든 천연 퇴비에서 기분 좋은 나무 향이 바람에 실려 오고, 밭에선 형형색색 색다른 토마토가 익어가는 곳. 땅의 소중함을 알리며 고품질 토마토를 생산하는 농장 ‘그래도팜’을 찾았다.

디자이너에서 농부로, 유기농법에 매료된 인생 2막

“2050년이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절반으로 줄어들 거란 연구 결과가 있어요. 오랜 세월 혹사당한 땅이 점점 죽어가는 거죠. 농사에 앞서 삶의 터전이자 생명의 근원인 흙을 살리는 게 농부의 역할 아닐까요?”

대뜸 흙 이야기다. 귀농 이야기를 들으러 왔는데 뜬금없이, 그런데 듣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도팜(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서강로 159-26)’의 친환경 농업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땅의 중요성을 짚어보는 게 필수다.

영월서 나고 자란 원승현(40) ‘그래도팜’ 대표는 대학 입학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지난 2015년 고향으로 귀농했다. 홍익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류 디자이너를 꿈꾸던 그가 돌연 마음을 돌려 농부가 된 까닭은 뭘까.

서울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했던 원 대표는 다양한 브랜드가 품은 스토리를 찾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디자인과 컨설팅을 제공하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6개월의 안식 휴가를 얻어 고향집을 찾은 그는 재능을 살려 부모님의 토마토 농장을 브랜딩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단순히 브랜드 마케팅을 통해 소득을 높여보자는 생각이었지만 3일간 부모님을 인터뷰하면서 큰 울림을 경험했다. 오랜 세월 친환경 유기농법을 이어온 부모님의 고집 속엔 우리나라 농업이 간과했던 중요한 가치가 숨어있었다. 울림은 관심으로 이어졌고 원 대표를 아예 고향에 눌러앉게 만든 힘이 됐다.

토양의 소중함 알려가는 색다른 토마토 농장

“화학비료 쓰고 쉽게 농사지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부모님은 40여 년간 유기농법을 고수하셨어요. 남들이 미련하다 놀리고 손가락질해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생명의 근본인 토양을 살리고 함께 살아가는 길이었으니까요,”

부모님이 지켜온 친환경 농업의 가치와 땅을 대하는 태도는 원 대표가 알리고 이어가야할 삶의 지표가 됐다. 생명력 있는 좋은 땅에서 자란 토마토는 풍미가 달랐다. 경쟁력 면에서도 자신감이 생겼다. 특별한 토마토 농장 ‘그래도팜’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래도팜이란 이름엔 부모님이 온갖 유혹과 괄시에도 유기농법을 고집하며 입버릇처럼 되뇌던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담았다. 

잘게 부순 참나무 껍질을 발효해 만드는 천연 퇴비는 그래도팜 유기농법의 핵심이다. 윤 대표는 “농촌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퇴비 악취는 재료가 썩어서 나는 냄새”라며 “제대로 발효된 퇴비는 그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래도팜 한편에 있는 퇴비 발효장에서는 커피 향 비슷한 나무 냄새만 솔솔 풍긴다.

원 대표가 키워낸 토마토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해외에서 다양한 품종을 들여와 좋은 우리 땅에서 키우며 지역성을 입혔다. 현재 그래도팜에서 생산되는 토마토는 미국 메인주가 원산지인 ‘발렌시아(Valencia)’를 비롯해 소의 심장을 닮았다는, 이탈리아 알벤가의 ‘꾸오레 디 부에(Cuore Di Bue)’ 등 14종에 달한다.

재배하는 작물과 땅에 대한 공부가 귀농 기본 조건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향이며 맛도 다채롭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토마토, 그래도팜에서만 맛볼 수 있는 토마토가 원 대표의 강력한 무기다. 그는 “지역마다 특산물을 홍보하지만 사실 어느 지역에서 먹어봐도 비슷한 맛인 게 현실”이라며 “땅도 좋지 않고 똑같은 품종을 너무 규격화해 키우다보니 향도 옅고 특징 없는 작물만 생산되고 있다”고 했다. 

‘나만의 무기’를 만들라는 건 원 대표가 예비 귀농인에게 땅의 중요성과 함께 힘줘 강조하는 점이다. 그는 “스페인에 몬세라토란 품종의 토마토가 있는데 독일 사람들이 이걸 먹으러 스페인까지 간다”며 “고기집 중에도 유난히 고기 맛이 좋은 곳이 있듯 나만의 기술력을 갖추고 더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사먹을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재배하는 작물에 대한 집요한 공부는 필수다. 원 대표는 “농촌진흥청 박사님들이 아니라 작물을 재배하는 생산자가 전문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자적 무기를 가졌다고 처음부터 잘된 건 아니다. 낯선 품종의 토마토를 알리려 백방으로 발로 뛰었다. 요리사들을, 소비자들을 직접 찾아가 만났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특유의 맛과 향이 입소문을 탔다. 유명 레스토랑과 납품 계약을 텄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통기업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약 1320㎡(400여 평) 밭에서 4월부터 9월까지, 봄 여름철 한 작기만 길러 수확하는데 반년 만에 남들 2년 생산한 것만큼 벌었다는 게 원 대표의 설명이다. 그래도팜 이전에는 매출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토마토 판매로만 연간 4억5000여 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법 전수, 체험 프로그램 운영도

농장 한복판 ‘토마로우(Tomarrow)’라 이름 붙인 공간은 언뜻 카페 같지만 다양한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곳이다. 토마로우는 토마토에 지속가능한 내일을 의미하는 ‘투모로(Tomorrow)'를 합성해 만든 그래도팜의 서비스 브랜드. 체험 프로그램은 농장 투어와 함께 14종의 토마토를 맛보고 토마토를 이용해 피자를 만드는 등의 활동으로 구성됐다. 참가 신청은 그래도팜 홈페이지(tomarrow.com)에서 할 수 있다.

한편에는 작은 도서관도 꾸렸다. 식재료, 미각, 농업, 토양, 농업 등 8가지 주제별 관련 도서를 볼 수 있다. 토마로우는 친환경 유기농법을 실천할 후배 농업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도 쓰인다. 토마토 밭 입구에는 ‘토양 전시관’도 마련해놨다. 생명의 원천인 흙의 가치와 유기농법의 중요성을 알리는 공간이다.

원 대표는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어지간한 각오로는 귀농할 생각도 하지 마라”고 조언한다. 그만큼 철저한 공부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수익성을 따져 특별한 작물을 택하기 보다는 일반 작물에 공을 들일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는 “흔히 특수 작물을 재배하면 돈을 더 벌거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시장이 너무 작다”며 “마늘이든 파든 흔한 작물이라도 나만의 기술력을 갖고 재배한다면 분명한 차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자체의 지원 정책을 잘 살피고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원 대표는 “영월군은 다른 지자체에 비해 귀농인, 특히 청년 귀농인에 대한 지원 정책이 잘 마련돼 있는 편”이라며 “군수도 (청년 귀농에)관심이 많고 청년사업단이 꾸려져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수익만 생각해 처음부터 무리한 재배 면적에서 농사를 시작하지 말라는 것도 원 대표의 조언이다. 그는 “능숙한 농부가 혼자 재배할 수 있는 면적이 500평가량”이라며 “초보자가 처음부터 2000평씩 시작하면 그게 곧 망하는 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