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1962년 출간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중에서

수많은 책을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인 고(故) 이어령 선생. 그 책들의 서문만을 따로 모은 《이어령의 머리말 모음: 책 한 권에 담긴 뜻》(국학자료원 간)이 출간됐다.

일찍이 《문학사상》의 권두언을 모아낸 《말》(문학세계사, 1982)이 보여준 것처럼, 이어령의 서문은 하나하나가 그리고, 그 전체가 한 편의 아포리즘이다.

‘뿌리의 언어’, ‘불꽃의 언어’, ‘젊음의 언어’, ‘바람의 언어’, ‘바다의 언어’, ‘생명의 언어’, ‘영혼의 언어’라는 장 제목은 아주 인상적이자 직관적이다. 그 각각에 수록된 서문이 어떠한 성격인지를 알려준다. 개별 서문도 특유의 화술로 인해 전혀 어렵지 않으며 차라리 술술 읽힌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제2부 ‘불꽃의 언어’에 포함된 책은 5권이다. 불꽃같은 시절을 보낸 20~30대 시절에 펴낸 책들의 서문을 골랐다.

선생의 첫 평론집인《저항의 문학》(경지사, 1959), 1956년부터 60년까지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여러 글을 추려낸 책인 《지성의 오솔길》(동양출판사, 1960), 《경향신문》에 연재(1963.3.25.~1963.5.25.)된 에세이를 묶은 《오늘을 사는 세대》(신태양사, 1963), 앞서 간행된 《저항의 문학》을 수정, 증보한 《통금시대의 문학》(삼중당, 1966), 신문 연재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 《아들이여 이 산하를》(범서출판사, 1973) 등이다.

지금 읽어 봐도 문장들이 칼처럼 날카롭게 번뜩인다.

“레지스탕스나 유격대의 무기는 보잘것없다. 정규군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장을 하고 전투를 한다. 《저항의 문학》에 발표된 글들은 정상적인 논리나 전통적인 수사학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전략으로 상대를 공략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읽어보면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낯이 뜨거운 글들도 많다. 평화로운 시대에 유격대원의 남루한 사진을 보는 느낌과 같을 것이다.”(《저항의 문학》 서문 중에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 언제나 슬픈 생각이 든다. 축 늘어진 어깨, 이지러진 뒤통수와 주름진 목덜미…… 어딘지 비극적으로만 보여진다.

그러나 사람을 정면으로 쳐다보면 언제나 증오와 불안이 앞선다. 많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입술, 배신의 칼날을 품은 눈동자, 그리고 불완전한 나선형의 귀…… 사람을 정면에서 보면 무엇인가 도전의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사람의 뒷모습에는 과거가 있고 그 정면에 현재가 있다. 감상적인 과거와 불안한 현재가…….” (《오늘을 사는 세대》 서문 중에서)

“당신을 알 것이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또 나는 알 것이다. 지금 당신이 내게로 올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우리는 말할 것이다. ‘밤입니다. 지금은 통행이 금지된 시각. 녹슨 철조망처럼 어둠이 낙하하는 시각. 길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감시할 겁니다’ 라고. 술집들의 창문이 닫히는 것을 볼 것이다. 오 분 전의 아슬한 시간 위에서 초조하게 서두르는 그 얼굴들을 볼 것이다.”  (《통금시대의 문학》 서문 중에서)

서문 모음집의 해설을 쓴 홍래성 교수(서울시립대 의사소통교실 객원교수)에 따르면 초창기의 이어령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단어란 바로 ‘저항’이다. 여기서 저항은 좁게 보면 문단 내 기득권층을 향한 비판을 의미한다. 이어령은 신진 문인들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의 기성들을 공격했다. 한편으로 저항은 6.25 전쟁 이후의 엄혹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을 의미한다. 이어령은 실존주의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하는 작업, 서구 신세대의 풍경을 탐사하는 작업, 한국의 현재 세대를 분석하고 한국의 미래 세대에게 조언하는 작업 등을 통해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했다.

생전 이어령 선생이 직접 이 서문집을 구상했다고 한다. 장을 나누고, 장마다 제목을 붙이고, 장별로 포함될 서문을 골랐다. 평생의 애착이 담긴 책의 서문으로 이해된다. 홍래성 교수는 “선생께서는 자신이 쓴 저서가 방대한 만큼 단권이 아닌 시리즈로 서문 모음집을 기획하시면서 차후에도 후속 작이 차질 없이 발간되기를 기대하셨다”고 말했다.

다음은 홍 교수의 회고다.

“내가 이어령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19년 7월 12일 선생님의 서재에서였다. 그 당시 나는 선생님을 대상으로 삼은 박사학위논문이 심사를 통과하여 막 인쇄를 마친 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자신감에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무턱대고 영인문학관을 찾아가 부끄럽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놓아두고 왔다. 특별한 기대나 의도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선생님이 책장을 한번 넘겨나 보셨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며칠 후 영인문학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몇 부 더 가져다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혹시 뵐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들뜬 마음을 품고서 나는 영인문학관으로 곧장 달려갔다. 운이 좋게도 선생님의 일정은 때마침 비어있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의 서재에 비로소 첫발을 들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입 모아 말하는 선생님의 박학다식함을 여기서 구태여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분야를 가리지 않고 펼쳐지는 선생님의 지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사실만 언급해두면 충분할 것이다. 그보다 나는 선생님의 ‘따듯함'에 대해 이야기를 해두고 싶다. 그것은 내가 선생님을 글로만 접했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선생님을 실제로 여러 차례 뵙고 난 다음에야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

선생님은 정말로 따듯한 분이셨다. 선생님은 자신의 설명을 따라오지 못하는 둔한 나를 앞에 두고서도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시는 법이 없었다. 답답함이 왜 없으셨겠는가마는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예시나 비유를 들어가면서 같은 말을 계속해서 풀어주셨다. 또한, 선생님은 늘 무언가를 나에게 베풀고자 하셨다. 선생님의 서재에서 나올 때는 과자나 커피, 심지어 명절 선물 세트까지가 내 손에 들려져 있었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기저귀를 비롯한 여러 유아용품을 보내주신 적도 있다. 이 밖에도 세세한 기억이 참 많다. 나는 선생님이 보여주신 따듯함을 평생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