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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송영무 국방장관 사과'를 계기로 본 역사 속 장군/장관과 통치권자 측근참모의 대결

미국,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갈등에서 대개 안보보좌관이 승리...오자서, 악비 등은 임금 측근의 참소로 목숨 잃어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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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무 국방장관은 19일 국회 법사위에서 문정인 특보 등과 관련된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의 발언을 비판하고, 통일부의 800만 달러 대북인도지원 시기가 늦추어질 것이라고 말했던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919일 청와대로부터 엄중 주의를 받았다. 청와대의 초치가 나온 후 송 장관은 국회 법사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국회 국방위에서 과한 표현을 사용한 것을 국민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사과한다"고 말했다. 예비역 해군대장인 70만 국군의 수장이 대통령 특보 및 청와대 안보실에 완패를 당한 셈이다.

군부의 수장(首長) 혹은 각료(閣僚)와 최고통치권자의 측근 사이의 의견 충돌이나 알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어왔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문고리를 잡고 있는 통치권자의 측근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무장관을 무력화시킨 닉슨-키신저 콤비 

최고통치자의 측근/참모와 각료의 갈등은 미국에서도 볼 수 있다대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간에 갈등이 많았다.

닉슨 대통령 시절 윌리엄 로저스(1969~1973) 국무장관은 완전한 허세(虛勢)였다닉슨이 국무부를 불신했기 때문이다닉슨은 백악관이 직접 외교정책을 장악하기 위해 외교 문외한인 로저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닉슨은 대신 불세출의 전략가 헨리 키신저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외교와 안보정책을 맡겼다 (이런 구조는 청와대 안보실에서 외교-안보-통일정책을 장악하고.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에게 힘이 실리지 않고 있는 지금 상황과 흡사하다).1971년 닉슨의 깜짝 방중(訪中), 베트남전을 종식시킨 1973년 파리강화조약 등은 모두 키신저의 작품이었다로저스는 완전히 바지저고리였다견디다 못한 로저스는 1973년 사임했다닉슨은 키신저에게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임하도록 했다.

대장 출신 국무장관들도 안보보좌관 못 이겨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는 맥아더 원수의 참모를 시작으로, 닉슨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이후 나토군 사령관을 역임한 관록을 자랑하는 예비역 육군대장이었다하지만 그는 레이건의 오랜 측근인 리처드 알렌 국가안보보좌관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 등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렸다결국 헤이스는 1년여 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지 W.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콘돌리사 라이스 대통령안보보좌관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갈등을 빚었다파월은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으로 걸프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었다콘돌리사 라이스는 조지 H.부시(‘아버지 부시’) 시절 국가안보회의에 근무하면서 냉전의 종식을 관리했고스탠포드대 부총장을 지낸 전략가였다.

9·11테러 등을 겪으면서 파월은 동맹국 및 유엔과의 협조를 중시했다반면에 실세’ 부통령이던 딕 체니와 콘돌리사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은 미국의 단독행동을 선호했다이들의 뒤에는 네오콘이 있었다결국 그는 부시 2기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사임했다그의 후임은 콘돌리사 라이스였다.

오자서와 몽염의 죽음 

중국 역사에서는 황제 측근의 참소로 명장들이 희생되는 사례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나라의 오자서의 경우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부차를 도와 초나라와 월나라를 깨뜨린 명장이었다.

복수를 꾀하던 월나라 왕 구천과 그의 모신(謀臣) 범려는 먼저 오나라의 태재(太宰. 국무총리) 백비를 구워삶았다. 백비는 수시로 오자서를 모함했다. 오나라 왕 부차는 아첨을 일삼는 백비의 참소에 넘어가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다. B.C 485년 오자서는 자신이 죽으면 오나라가 월나라에 멸망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눈알을 도려내서 동문(東門) 위에 걸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9년 후 오나라는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진시황은 죽으면서 장남 부소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환관 조고는 승상 이사를 설득해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 어린 아들 호해를 황제로 만들었다.

당시 부소는 장군 몽염과 함께 만리장성 공사장에 나가 있었다. 몽염은 3대에 걸쳐 조정을 섬겨온 명문의 후예로 진시황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었다. 조고는 과거 죄를 지어 몽염의 형 몽의에게 처벌을 받을 뻔한 적이 있어 몽염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외국 출신인 승상 이사도 진나라의 명문인 몽염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조고는 부소와 몽염에게 진시황의 명령이라면서 자결을 명했다. 착한 부소는 순순히 명에 따랐지만, 몽염은 재심을 요구했다. 결국 몽염은 수도 함양으로 연행되어 투옥되었다가 자결했다.

악비 vs.진회

금나라(여진)의 침략에 맞섰던 송나라의 명장 악비는 고종의 측근 진회의 참소를 받아 목숨을 잃었다.

1140년 악비는 금나라 침략군을 격파하고 북진, 옛 수도인 개봉에서 25km 떨어진 주선진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금과 강화조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던 재상 진회가 악비의 덜미를 잡았다. 진회는 고종 황제를 움직여 악비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악비는 이런 기회는 다시 없다면서 계속 싸우려 했다. 하지만 금나라와 서둘러 강화를 맺고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던 고종은 진회 편이었다. 고종은 하루에 12번이나 소환령을 내려 악비에게 군사를 거두라고 명령했다. 악비는 결국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좌절한 악비는 관직을 내놓고 은거했다. 하지만 진회는 모반죄를 덮어씌워 악비를 체포했다. 악비와 함께 당대의 명장(名將)으로 이름을 떨치던 한세충이 진회를 만나 악비가 모반을 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따졌다. 진회는 이렇게 답했다.

없지는 않은 것 같다(莫須有).”

한세충은 그런 말로 어찌 천하의 인심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탄식했다. ‘막수유라는 말은 이후 중국에서는 모함억울한 사건을 뜻하는 대명사가 됐다. 결국 악비는 아들과 감옥에서 비밀리에 처형됐다. 민간에는 악비 부자가 살껍질을 벗기는 혹형을 받고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141년이었다. 이듬해 남송과 금 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환관들에게 당한 원숭환

1626년 영원성에서 누르하치를 격퇴했던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은 의종 황제 측근의 환관들에게 당했다.

162910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내몽골로 우회해서 북경을 공략했다. 후금군은 북경 주변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영원성과 산해관을 지키던 원숭환은 수도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와 사투 끝에 후금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황제와 조정, 백성들은 후금군이 수도 주변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원숭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후금의 홍타이지는 포로가 됐던 환관 양춘과 왕성덕을 통해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고 정보를 흘렸다.

원숭환은 황제에게 야전에서 고생한 휘하 장병들을 북경성 안으로 들어가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것이 황제의 의심을 부채질했다. 황제는 원숭환과 측근 장수들만 성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것도 성문을 열면 적군이 그 틈을 탈 수 있다는 이유로 성벽에서 커다란 바구니를 내려 보냈다. 당대 최고의 야전군 사령관이 바구니에 몸을 담고 수도에 들어가는 볼썽 사나운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성에 들어간 원숭환은 바로 체포됐다. 당시 명나라는 유교탈레반이라고 할 수 있는 동림당(東林黨)과 환관 및 고위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엄당(奄黨)의 당쟁이 극심했다. 의종 즉위 후 동림당에 정국 주도권을 빼앗긴 엄당은 원숭환 사건을 계기로 동림당에 반격을 꾀했다. 원숭환이 동림당의 거두 전용석의 문인이라는 것이 빌미가 됐다. 엄당 계열의 재상 온체인은 다섯 차례나 원숭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들에게 국가안보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원숭환은 16309월 책형(磔刑)에 처해졌다. 기둥에 묶어 놓고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낸 후 두개골을 부숴 죽이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1년 전 자기들이 후금군에게 포위되어 고난을 겪은 것이 원숭환이 적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백성들은 원숭환에게 달려들어 그의 살점을 뜯어 먹었다. 14년 후 명나라는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게 멸망됐다. 이어 청나라군대가 북경에 입성, 중국인들은 이후 270여년 간 만주족의 노예가 됐다.


입력 : 20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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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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