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병석 시인과 시집 《양들에 관한 기록》
자연과 여행을 사랑하는 모더니즘 시인 천병석(千倂錫·60)은 작년 9월 《양들에 관한 기록》(모악 刊)이라는 첫 시집을 펴냈다. 전체 126쪽에 불과하지만 그 질량을 따질 수 없을 만큼 묵직하다.
기자는 오랫동안 이 시집을 가방에 들고 다녔는데 가방이 무거웠던 이유를 알겠다. 한걸음 한걸음씩 시의 매혹에 빠져들었다. 시들이 마치 로드 무비에서 만나는 풍광처럼 자연의 노래로 가득한데 시상(詩像)이 맑고 투명하여서 현대판 진경산수화를 시로 대신 읽는 듯했다. 혹은 태고적 시인의 노래처럼 시원(始原)의 신화론적 이미지가 팽창하는 듯했다.
마른 흙은 물이 되어 끓어오르고
진흙은 꽃이나 물푸레나무가 되기도 하였다
끓어오른 물방울 몇은
다시 딱정벌레가 되어 창문 너머 달아나기도 했다
한밤중 창문을 깨고 날아든 돌멩이는
손닿지 않은 공중에서 마른 흙처럼 부서진다
-천병석의 ‘혜성이 모두 친절하진 않다1’ 중 일부
‘혜성이 모두 친절하진 않다1’에서 드러난 천 시인의 상상력은 우리 시단에서 아주 귀하다.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용기와 미(美)의 인식은 시인이 살아온 생을 더듬어 봐야 윤곽이 잡힐 테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 화려한 은하계가 자리잡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 은하계에 모여 사는 백성과 신하들에게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전한다.
운문댐이라 부르는 외로운 물의 천국 나의 집에선
어쩌다 들르는 작고 외로운 새
어쩌다 안부 묻고 가는 적요한 바람
먼 거리에 일렁이는 억새풀 하나
그 누구든 반갑지 않은 이 없어라
-천병석의 ‘운문댐, 겨울풍경’ 중 일부
굳이 경북 청도에 가지 않아도 ‘운문댐, 겨울풍경’을 읽으면 적요한 댐의 겨울이 그려지는 듯 하다.
철학자 들뢰즈는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고 했는데 천병석 시인에 있어서 그 말은 잠시 유보되어야 한다. ‘타락한 세상’에 그처럼 담백한 자연을 그릴 수 있는 시인은 소수일지 모른다. 시인의 묵시론적 예언자적인 시어가 자연, 여정(旅情)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잎을 벗어던진 저 상수리나무는
시가 되려는 것일까?
시가 되고 난 후의 작별일까?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떠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집은 저 홀로 먼저
빗장을 내린다
미리 어두운 그 얼굴은 시가 되려는 걸까?
쓰다 만 시처럼 쓸쓸한 어떤 꿈일까?
(…)
첩첩 산중에 있어 바다가 그리운 날은
온통 풀어헤쳐 달려드는 저 시린 파도에
순서도 체면도 팽개치고 몸마저 내던져
몸서리치게 적시고 싶다.
그리울 때는
바다가 전해오는 소식들, 온몸 던져 그리울 땐
아득한 고개 너머
지나가는 바람조차 철썩, 철썩
상수리나무 꼭대기까지 파도가 몰려와
산간 누옥 귀틀집 한 채를 한 척의 배로 삼아
넘실넘실 고개 넘어 산봉우리까지 뒤로 하고
끝없이, 끝없이 넘어 간다
-천병석의 ‘산골 시인의 겨울 여행’ 중 일부
(실제로 산골에서 자랐는지 모르나) ‘산골 시인’은 자연 속에서 시를 길어 올린다. 잎이 진 상수리나무를 향해 ‘시가 되려는 것일까?/ 시가 되고 난 후의 작별일까?’라고 반문한다. 이런 진지하고 미학적인 물음에는 애초에 정답이 없지만 ‘천 개의 깨진 유리 조각’처럼 다양한 자연의 상(像)에서 시어가 폭발한다.
떨어지는 꽃들의 찰나를 보고 싶다.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싶다
폭포 위로 가고 싶다
소멸한 시간들이 다른 시간대로
뛰어내리기 위하여 줄지어 선 그 끝
끝에 피는 꽃은 어떤 꿈일까
떠나는 길 위로 내리치는 번개
존재의 호통 소리를 듣고 싶다
멈춰버린 시간의 궤도 위에 하얗게 작별하는 폐(肺)
멀리 나간 바다 너머로 침몰하며 손짓하는 검푸른 침대
멈춰버린 맷돌
따스하고 부드러운 죽음의 혀를 밟고 바다를 건너고 싶다.
노 저어 오는 무덤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싶다
푸르고 새하얀 눈물과 아주 이별할 때까지
바람의 눈물 집을 터뜨리고 싶다
눈물보다 고요히 천지를 적시며 오는
찔레꽃 피어오를 때
-천병석의 ‘꽃들, 폭포에 피다’ 중 일부
시 ‘꽃들, 폭포에 피다’는 시인의 역량이 농축된 스케일이 큰, 쩨쩨하지 않은 시다. 절제된 미니멀리즘 사조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을 기세다. ‘소멸한 시간들이 다른 시간대로 뛰어내리기 위하여 줄지어 선 그 끝’에 바로 시인이, 그의 시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만이 노래할 수 있는 시적 대상이 ‘그 끝’에 있다. 누가 감히 번개를 향해 ‘존재의 호통 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람의 눈물 집을 터뜨리고 싶다’는 시인의 선언!을 들으며 놀라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천 시인의 이런 노래를 듣고 독자도 같은 꿈을 꿀 수 있다. 소시민의 궁상맞고 위축된 얼굴, 쪼들린 지갑을 가슴 속에 구겨 넣고 잠시라도 딴 세상 사람처럼 노래할 수 있다. 그처럼 ‘떨어지는 폭포를 멈추라’고 외칠 수 있다. 아니, 한 번 외쳐보자.
그러나 목소리가 굵고 크지만 천 시인은 작은 꽃 한 송이, 찔레꽃 한 잎, 뱃전의 한 점 눈을 지극한 눈으로 응시할 줄 안다. 그가 용기 있게 포착한 찰나의 한순간이 지구 전체의 비밀, 우리 삶의 숙명, 생의 꼭짓점[頂點]을 담고 있는지 모른다.
더러는, 나, 너, 우리
가장자리로 밀려나온 찔레꽃 한 잎일 때도 있어라
뱃전에 스미어 사라지는 한 점 눈일 때도 있어라
떠도는 빈 병 안으로
요행히 흘러든 꽃잎인지도 몰라라!
출렁출렁, 소리에, 눈, 멀어
바다로 바다로 나아가는 새하얀 꽃잎인지도 몰라라!
-천병석의 ‘꽃들, 폭포에 피다’ 중 일부
바다가 무엇이냐 묻지 마라
늘 언제나 그대 앞에 놓여 일렁이는
몇 잔 술에 붉어지는 고요 같아도
수억만 장의 발효되어 누운 꽃잎이거나 콩잎이거나
속 알 길 없이 누운 몇 만길 누선(淚腺) 아래 음습한 폭약이거나
-천병석의 ‘바다, 나무, 바람의 친화’ 중 일부
누군가
방아쇠를 당기다말고
망각이나 권태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거나
이미
발사를 마치고 떠나버린
한 자루의 권총처럼
혹은
세상을 한 바퀴 휘돌아
다시, 거기, 돌아온 악기처럼
사막은
고요하고
별은
거기
활처럼 빛나며
-천병석의 ‘사막은 고요하고 별은 빛나며’ 전문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천병석 시인은 계명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대학 시절인 1983년 《시와 해방》 1집에 시 ‘LPG 충전소’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학시절 교내 문학동아리 ‘노천문학’에도 관여해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고, 이동엽·장정일·노태맹 등 빼어난 시인들과 교유 관계가 깊었다(시인 박상봉)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시력(詩歷)이 40여년에 이른다. “그만큼 이 시집의 스펙트럼이 넓고도 웅숭깊다”(시인 이원규)고 할 수 있다.
일찌감치 그는 언어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한국어와 수메르어, 영어의 친연성을 논한 《한국어 충격》(2014) 을 출간한 적이 있고, 한국어와 영어의 기원에 관한 《영어, 한국어 언어 전쟁 Vol. 1》(2019)를 펴냈다. 유튜브에 ‘기절초풍 영어단어 암기법’을 게재한 일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