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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 전 총리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윤석열 정부의 새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한덕수 신임 총리 지명자는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4월~2008년 2월까지 총리를 지낸 바 있다. 1970년 행정고시 8회에 합격한 이후 경제기획원, 상공부 등에서 잔뼈가 굵는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통상교섭본부장과 주OECD대사, 경제수석비서관을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대사를 지냈다.
한덕수 지명자가 정식 총리가 되면 그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5번째로 국무총리를 두 번 지내는 인물이 된다. 건국 이래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은 모두 48명이다. 이들 가운데 총리를 두 번 지낸 사람은 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 등 모두 네 명이다.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고 하는 총리 자리에 두 번이나 오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다른 정권 아래서 총리를 지냈다는 점이다.
장면 총리는 흔히 내각책임제 하였던 제2공화국의 총리로 기억하고 있지만,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제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1950년 11월~1952년 4월). 그는 주미대사로 있다가 국무총리로 일했으나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앞두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1960년 4‧19 혁명 후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면서 그해 8월 제8대 총리가 됐으나 이듬해 5‧16군사혁명으로 실각했다. 내각책임제 하에서 실권(實權)을 가졌던 유일한 총리이자,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 하에서 모두 총리를 지낸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백두진 전 국무총리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 제4대 총리(1952년 4월~1953년6월), 박정희 정권 아래서 제10대 총리(1970년 12월~1971년 6월)를 지냈다. 백 전 총리는 6‧25전쟁 중이던 1953년 2월 제1차 화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그를 총리로 임명해 주면서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기대를 표시했으나 1971년 4월 제7대 대선을 관리하는 과도내각에 그쳤다.
백두진 전 총리의 뒤를 이어 1971년 6월 제11대 국무총리로 임명된 사람이 김종필 전 총리이다. 그는 5‧16군사혁명의 기획자로 초대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의장 등을 지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로 정치적 부침(浮沈)을 자주 겪었다. 당시 헌법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는 1975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고,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에서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던 터라 그가 총리로 임명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드디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에게 총리 임명장을 주면서 “정치자금을 만지지 말라”“군부에 대해 관심을 두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1972년 유신 선포 때에도 총리였던 그는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통보를 받았다. 유신 이후에도 박 대통령의 견제를 많이 받았던 그는 1975년 12월 건강악화를 이유로 사임했다.
그로부터 22년여가 지난 1998년 3월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DJ정부의 총리(제31대)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DJP연대 때문에 대선에서 패했다고 생각한 한나라당의 몽니로 정식 총리 인준은 정권 출범 6개월 후인 그해 8월에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호랑이 같은 눈길 아래서 몸조심 해야 했던 첫 총리 임기 때와는 달리,DJP공동정부의 한 축이었던 이때는 각료, 공기업 사장‧감사, 지방선거 출마자 등을 결정하는 데 있어 거의 절반의 지분을 행사하는 실세(實勢)총리의 위상을 즐겼다. DJ(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 때문인지 2018년 6월 93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왕년의 민주화투사라는 문재인 정권 및 민주당 인사들이 ‘쿠데타 주역’이었던 그를 극진한 추도사와 함께 영결(永訣)했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총리와 노무현 정권의 첫 총리를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미 전남지사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던 그는 전두환 정권 아래서는 교통부‧농수산부‧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는 1988~1990년 관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1997년 3월~1998년 3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제30대 총리로 임명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후인 1998년 3월 그는 물러나면서 김대중 정권 첫 내각의 각료들을 제청했다. 헌법상 총리의 제청으로 각료들을 임명하게 되어 있는데, 김종필 총리가 정식으로 인준을 받지 못한 총리 서리(署理) 신분이어서 물러나는 총리인 그가 새 정부의 각료 제청권을 형식적으로 행사한 것이다. 그해 6월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서울시장선거에 출마, 4년간 서울시장을 지냈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자 그는 2003년 2월 제35대 총리로 취임, 2004년 5월까지 재임했다. 2004년 3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으나, 노 대통령이 복귀한 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후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기용했던 것은 실패였다고 공언했고, 이에 대해 고 전 총리가 반박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7년 제17대 대선 출마를 위해 움직이기도 했으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비판 등에 부딪혀 출마를 포기했다.
총리를 두 번 지낸 인물들 가운데 장면, 김종필 전 총리는 정치인인 반면, 백두진, 고건 전 총리와 한덕수 신임 총리 지명자는 관료 출신이다.
정식 총리를 지내지는 못했지만 총리 서리(署理)만 네 번 지낸 이가 있다. 이윤영이 그 사람이다. 북한 출신의 목사였던 그는 해방 후 조만식 선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이끌다가 월남(越南)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북한 대표’로 간주,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국회 다수당으로 김성수를 초대 총리로 밀고 있던 한국민주당의 반대로 총리 인준을 받지 못했다. 결국 초대 국무총리는 광복군 출신인 이범석 장군에게 돌아갔다. 이윤영은 이때 나흘 간 총리 서리를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후에도 그를 잊지 않고 1950년 4월, 1952년 4월, 1952년 10월에 총리로 지명했으나 번번이 인준을 받지 못해 사흘~2주 정도 총리 서리를 지내는 데 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