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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인천상륙작전 戰勝 67주년 특집

노르망디/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면엔, 디에프/장사 상륙작전 커다란 희생 있었다

맥아더 장군 “장사 상륙작전이 인천 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親筆로 평가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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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땅은 증명한다〈4〉 디에프 상륙작전과 장사 상륙작전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 이서현 
 
디에프에서부터 아름다운 노르망디 해변이 시작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지기 2년 전 이곳에서 디에프 상륙작전이 펼쳐졌으나 영연방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현대 전사(戰史)에서 전쟁의 분수령이 된 상륙작전이 두 번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미국·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6·25의 승패를 단숨에 뒤바꾼 인천 상륙작전이 그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년 6월 6일, 인천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이면에는 디에프 상륙작전과 장사(長沙) 상륙작전이라는 커다란 희생이 있었다.
 
 
  노르망디 2년 전 참담한 실패로 끝난 디에프 상륙작전
  “디에프에서 숨진 한 명이 노르망디에서 열 명 살려”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최북단에 있는 도시 디에프에서 1942년 8월 19일 영연방(英聯邦)군이 상륙했다. ‘주빌리(Jubilee)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1942년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해 모스크바를 겨냥하고 있었고 영국은 독일 유보트에 의해 그해 5월과 6월에만 150만t의 화물선 피해를 입었다. 북아프리카 영국군은 이집트로 후퇴했고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했다. 영연방의 일원 호주의 다윈이 폭격당했고 인도마저 위험했다.
 
  1942년 3월, 영국 연합작전사령관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은 침공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장소로 디에프가 선택됐다. 디에프 상륙작전의 D데이는 1942년 7월 4~8일 사이로 정해졌으며 작전명은 루터(Operation Rutter)였다. 7월 7일 루터작전은 악천후와 독일 공군기의 공격으로 폐기될 뻔했다.
 
  마운트배튼 제독은 끈질기게 처칠 수상을 설득했다. 결국 처칠은 작전명을 주빌리(Jubilee)라고 바꾸고 상륙작전을 허가했다. 디에프는 독일 육군 제302고수방어사단 예하의 2500여 명으로 구성된 제571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잘 훈련되었으며 실전경험도 풍부했고 무장까지도 충분했다.
 
디에프에 있는 ‘주빌리 상륙작전’ 기념관이다.
  1942년 8월 19일 1005명의 영국 코만도, 50명의 미 육군 레인저, 캐나다 2사단의 장교와 사병 4963명을 포함한 상륙병력을 분산하여 실은 영국 함대가 사우스 햄프턴 항을 출발해 디에프 기습공격에 나섰다. 237척의 배와 상륙정, 6척의 구축함을 포함한 함대가 해안으로 접근했다.
 
  하늘에서는 영국·캐나다·자유폴란드·자유프랑스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작전에 가세했다. 상륙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1500명의 독일군 중 311명이 전사하고 280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에 캐나다 제2사단에서만 총 6086명 중 1027명이 전사했고 2340명이 포로가 됐다. 거의 전멸한 것이다.
 
  영국 코만도에서는 275명이 전사했고 미군 레인저에서도 3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영국 해군에서는 구축함 1척과 상륙정 33척을 손실했으며 550명이 전사했다. 영국 공군은 수퍼마린 스핏파이어 64대, 호커 허리케인 20대, 보스턴 폭격기 6대, P-51 머스탱 10대 등 총 110대를 잃었다.
 
  연합군은 참패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제공권 장악, 항공지원, 지원폭격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상륙부대와 후방 지휘부의 연락, 상륙 시 전차의 돌파 등의 대책을 강구했다. 그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훗날 “디에프에서 죽은 한 명이 노르망디에서 열 명을 살렸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장사(長沙) 영웅’의 넋 어린 곳,
  거친 파도 속 잠자던 영덕에는 이제 원전(原電)의 꿈이”

 
장사 해변에 있는 장사 상륙작전 기념탑이다.
  맥아더 장군의 유엔군이 인천을 향해 다가가던 그날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 772명을 실은 문산호가 접근하고 있었다. 14일 부산항을 떠난 문산호가 장사리에 도착했을 때 마침 ‘케지아’가 접근하고 있었다. 파고(波高)가 3~4m에 달했고 설상가상으로 닻이 끊어져 문산호는 뭍을 앞두고 좌초했다.
 
  육지에 가까운 바다 한가운데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문산호는 적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772명의 학도병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장사리 해변에 상륙해 며칠간 인민군과 접전을 벌였다. 장사 상륙작전의 원래 계획은 사흘 정도 인민군의 주의를 분산시킨 후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9월 16일부터 인민군 제5사단의 정예부대인 2개 연대 규모의 부대가 T-34/85 전차 4대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상륙부대는 9월 19일까지 절대 열세 속에서도 간신히 상륙지점으로 되돌아와 해군이 지원한 LST 조치원호를 타고 귀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0여명이 적의 포로가 됐다.
 
  이 작전으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인민군은 장사 해변에 국군 2개 연대가 나타난 것으로 오판해 낙동강 전선에서 정예부대를 빼내기에 이르렀다. 맥아더 장군은 친필로 “장사 상륙작전이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장사 해변에 정박된 문산호는 당시 상륙작전에 쓰였던 배다.
바다에 가라앉은 문산호는 1997년 인양돼 수리를 끝낸 뒤 지금의 자리에 놓였다.
  장사 상륙작전은 어린 장병들의 피를 대가로 요구했다. 장병 대부분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이었으며 훈련기간은 2주에 불과했다. 부대의 유일한 지원장비는 LST 1척이었는데 상륙할 때 미 해군의 구축함 한 척이 함포 엄호사격을 해 주지 않았다면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보급 상태도 열악했다. 3일간만 전투를 진행한다고 딱 3일 동안 쓸 전투물자만 지급했다. 때문에 인민군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자 상륙 부대원들은 식량과 탄약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이런 조건에서 예정했던 기간 이상을 버틴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군 전문가들은 평하고 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1950년 10월 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그때까지는 군번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장사 해변에서 좌초된 문산호는 1997년 3월 인양된 후 복원돼 장사 해변에 놓여졌고 지난해 기념공원이 설립돼 호국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기자가 장사 해수욕장에 갔을 때 때마침 태풍의 영향으로 거친 파도와 강한 바람이 모래밭을 때리고 있었다. 66년 전 학도병들이 상륙작전을 펼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영덕 땅에 이제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된다고 한다. 조국을 지키려 흘린 피가 이제 에너지 기지로 바뀌는 것이다.⊙
 

입력 :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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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 ‘세상읽기’

gsmoon@chosun.com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선임기자를 역임했다. 현재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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