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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集 신간] 이구락 시인의 《낮은 위쪽, 물같이》

‘나는 가을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갔다’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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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시집 《낮은 위쪽, 물갈이》를 펴낸 이구락 시인.

만추(晩秋), 초겨울에 좋은 시집과 만났다.

 

이구락 시인의 4번째 시집 낮은 위쪽, 물같이을 읽었다. 크기가 손바닥 만한 시집인데 그 깊이는 몸 뒤척이는 강물소리’(<절벽> ), ‘깊고 푸른 길’(<깊고 푸른 길> ) 같다.

역설적이다. 이렇게 고갱이 시어로 가득한 단단한 시집이 저렇게 작을 수 있을까.


잠자리 한 마리 옹벽 아래까지 내려온 마삭줄기에 앉아 눈뜨고 졸면서도 웬만한 바람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내 시도 저랬으면 좋겠다

-<북창 아래 앉아> 에서

 

웬만한 바람에도 꼼짝하지 않는 잠자리를 보며 시인은 내 시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충분히 단단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 단단함은 사유의 깊이 때문이다. 세상은 가벼움으로 들떠 미처 돌아가고 있지만 시인은 결기로 무장하고 마치 북방의 장수(將帥)처럼 시를 썼다.

 

화면 캡처 2021-12-11 091951.jpg

문청시절의 이구락 시인

 

기자는 문득 상상해 본다. 그가 정신의 황홀감에 취해 시어를 다듬었을 수많은 시간과 밤들을. 그 고통의 시간을. 시인만이 느낄 수 있는 문장의 철필을. ‘날카롭게 벼린 독한 정신’(<박경리 토지문화관> ). ‘비어서 쓸쓸한 마음 하나’(<빈 마음 하나> ). 오래 지켜봤을 ‘마음이 저무는 쪽’(<가을금호강> ).


나는 가을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갔다

까닭 없이 몸이 아파 왔다

열이 내리면 횃불 같기도 하고 사랑 같기도 한

가을앓이, 행간 사이로

부질없는 송신의 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그해 가을> 중에서

 

 

자정이 넘으면 나의 더듬이는

숨죽은 먼지까지도 감지한다

먼 곳에서 잠든 그대 숨결도 수신한다

자정이 넘으면 나의 더듬이는 또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작은 노래 하나 내보낸다

-<빈 마음 하나> 중에서

 

 

시인은 국어교사로 평생을 지냈다. ‘분필을 내려놓고 마지막 인사를 받았을모습을 떠올리니 문득 뭉클해진다. 그와 만났던 수많은 제자들 역시 같은 상념에 빠졌으리라. 시인은 교장이 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고/ 공장장이 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고/ 국회의원이 되지 않은 게 정말 정말 다행’(<마지막 수업> )이라고 했는데, 감히 기자가 안 되신 것도 다행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기자는 잘 해도 욕이고 못하면 당연히 욕이다. 진창 속을 뒹구는 직업이니까. 그는 국어교사이자 시인으로 세상을 꼿꼿하게 바라보고 당당하게 살았으리라.

 

분필을 내려놓고 마지막 인사를 받았다

맑은 눈망울들이 환하게 꽃으로 피어 손을 흔들었다

교실을 나서며 끝까지 평교사였다는 게 한없이 즐거웠다

-<마지막 수업> 중에서

 

시집 낮은 위쪽, 물같이는 여행길에서 쓴 여정(旅情)의 시들로 가득하다. 자연을 시인의 칼 같은 내면과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 정신은 오랜 세월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자신만의 본성일 테지만 그 본성의 한켠에는 어떤 외로움이 숨어 있다. 그를 외롭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허공의 무덤>은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정신의 승리는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발 아래 두는 것이다.

 

내가 노래하자마자 몰운대 소나무는 죽어 버렸다

가혹하다

(그 푸른 정신을 내 어찌 다 감당하라고?)

죽은 몰운대 소나무 보기 위해

구름 뚫고 와 구름에 머리 박고 있는 몰운대 오른다

(중략)

마침내 바람에 씻겨 육탈이 완성되는 날

몰운대 소나무의 황홀한 풍장 모시며

나도 오래 머뭇거리는 구름 속에서, 뭉친 근육도

질긴 힘줄도 놓아 버리고 풍장되리라

그때쯤이면, 왜 죽어서도 몰운대 소나무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는지 알게 되리라

일생을 지켜 온 정신의 중심이 하얗게 가루 되어 날리면

아침마다 온 산의 푸른 솔잎들 빗질하고 싶다

몰운대 솔숲 지저귀는 새소리 들으며

허공의 무덤 속에서 오래 잠들고 싶다

-<허공의 무덤> 중에서

 

이상하게 이구락의 시에서 시인 이성복, 조정권, 송재학 등의 냄새가 느껴진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낫다? 한 가지 더. 시집 전체가 따스한 사유의 깊이가 느껴지며 생명과 자연의 풍경소리로 은은하지만, 시인은 아직 써야 할 게 많은 것 같다<가을일기>, <내려다보면>에서보듯 그의 시마(詩魔)는 이제 막 붉게 타오르고 있다.

 

햇살은 낮은 목소리로, 바람은 따뜻한 걸음으로 하오의 언덕 넘어왔다 먼 데 사람 생각나는 초가을, 잘 익어 가는 잡목숲 속 조그만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 키큰상수리나무사이생각에잠긴새털구름바라보고파이프를두번이나청소하고앉은채바지단추열고오줌도한번길게누고오래숨멈추고싸리나무가들국화에게수작거는소리엿듣기도하고가까이서들리는새소리에화들짝정신들기도하고성냥개비끝다듬어아무도모르게그리운이름아카시아잎뒷면에가만히써두기도하고 - 이윽고 새소리 그치고 날빛 흐려 저문 산 마주 보며 내려왔다 내려오며 두 번을 돌멩이에 걸려 휘청거렸고, 다섯 번을 뒤돌아보았다 마을로 가는 굽은 길 끝엔 흐린 별빛 두어 점 풀잎 위에 앉아 있었다

-<가을 일기> 전문


깨어진 기왓장 사이 비에 젖어 해진 종이비행기, 끈 떨어진 슬리퍼 한 짝, 대문 슬래브 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초겨울 해바라기 하는 장독, 녹슨 티비 안테나와 여기 저기 말라붙은 흰 비둘기똥, 빨랫줄에 새마을체육대회 찍힌 똥빛 수건 한 장과 심심하게 매달린 색색의 빨래집게, 햇빛 없는 삼각형 마당 귀퉁이 허약한 석류나무와 누추한 장미 두 송이, 우리슈퍼마켓 백합미용실 동해식육식당의 간판 간간이 보이는 구겨진 골목길과 그 끝의 소문장여관 야한 옆모습

 

, 내려다보면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낡은 안테나 선 타고 다니며 그들의 안방과 장롱 속 참담한 그리움 은밀히 다스리고 싶다 더욱 섬세한 전선줄 타고 다니며 부엌과 마루 밑에 웅크린 당당한 식욕도 타이르고 싶다 넝마처럼 뒹굴어 다니는 그들의 무지갯빛 희망과 더 많은 절망들에 골고루 물뿌리개를 들이대고 싶다 내려다보면 세상은 보이지 않고 세상의 가장 정갈한 윗부분만 보이니, 아 나는 또 내려다보고 다시 내려다본다

-<내려다보면> 전문

입력 : 202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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