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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문화

"그동안 사람들은 너무했다. 그에게 낙관처럼 붉게 남은 상처를 이제는 닦아줄 때가 됐다"

인간에 대한 배신, 아내와의 이혼, 왕따, 외로움, 허망함...그의 생에 점철된 것들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주장환  월간조선 뉴스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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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하기 몇 달 전의 마광수 교수.
“고독사(孤獨死)야. 광수는 외롭고 괴로워서 자살한 거야.”
 
고(故)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와 친구사이였던 서양화가 이목일 화백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말했다.
 
“죽기 하루 전날에도 통화했어요. 그날은 어쩐 일인지 광수가 전화를 두 번 걸어왔어요. 한 시간 넘게 통화했지 아마... 그날따라 신세한탄을 많이 하더군요. ‘그 누구도 전화 한 통화 걸어오는 놈이 없다’며 ‘모든 게 허망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광수야, 내가 전화 자주 하잖아’라고 했더니 ‘너 말고’라고 해요. 아무튼 그날 배신, 왕따, 이혼, 외로움, 허무함 등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광수는 평소 인간에 대한 ‘배신’과 아내와의 ‘이혼’에 대해 무척이나 괴로워했습니다.”
 
1985년에 결혼한 마광수 교수는 5년이라는 짧은 결혼생활을 접고 1990년 이혼한다. 슬하에 자녀도 없다. 마 교수는 이혼 전후로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즐거운 사라》 등을 냈고 이게 문제가 돼 1992년 음란물 시비로 구속되고 1995년 유죄 확정판결을 받으면서 대학에서 쫓겨난다.
 
이목일 화백은 “필화 사건으로 광수가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절친’이라 생각했던 친구가 도움은커녕 자신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배신감을 느겼다”고 전했다.
 
“광수는 친구의 배신, 그에 대한 원망이 무척 컸어요. 젊은 시절 그 친구가 군대 간다고 할 때 훈련소까지 따라갈 정도로 친한 친구였지요. 그 친구가 대학 교수 자리를 잡을 때도 광수가 도움을 준 걸로 알아요. 그런데 광수가 구속되면서 사회적으로 ‘외설 작가’ ‘미친 놈’이란 욕을 먹을 때 그 친구는 도와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문단(文壇)에서 광수를 배제시키고 교수사회에서 ‘왕따’ 당하게 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에게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목일 화백은 “광수는 외설 논란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면서 “세상의 따가운 눈총에 죽을 때까지 마음의 상처를 품고 살았다”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 화백은 “광수는 야한 글을 써서 상업적으로 돈을 벌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을 날리려는 ‘속물’도 아니었다”면서 “내가 본 광수는 의리가 깊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가득한 효자(孝子)였다”고 했다.
 
실제로 마광수 교수는 구순을 넘긴 모친(母親)이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 용산 자택에서 수발을 들었다. 모친은 2015년 세상을 떴다.
 
마 교수에게 필화 사건이 불행의 결정타였다면, 앞서 있었던 이혼은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목일 화백은 “광수는 아내와 헤어진 후 삶의 의욕을 크게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여성에 대한 ‘욕망’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혼·필화 사건 이후 마 교수가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된 상태였는데도 그의 주변에는 여성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이목일 화백은 “사실 작년에도 광수를 좋아하던 40대 여성이 있었지만 광수는 그녀를 만나주질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다”고 전했다. 마 교수와 여인은 결국 마 교수의 자택 골목길에서 잠시 인사만 하고 서로 헤어졌다고 한다.
 
마광수 교수 사망 이후 언론에 보도된 사진은 과거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마 교수의 실제 모습은 그의 나이에 비해 너무나 ‘연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2015년 무렵 언론 인터뷰 당시 그는 젊게 보이려고 사전 준비를 많이 했다. 1990년대 초반 필화사건을 겪고 난 후 최근 사망하기까지 25여 년 동안 지속됐던 배신과 분노, 후회, 절망이 그의 겉모습까지 ‘바짝’ 태워버린 것이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전해들은 지난 5일 서울 하늘은 하루 종일 잿빛으로 우울했다. 1951년생인 그는 우리나라 나이로 66세에 생을 마감했다. 100세 시대의 때 이른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마 교수가 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의 한 대목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하략)”
 
그는 성적욕망을 진솔하게 드러냈다. 그는 예쁜 여자들을 좋아했고 매니큐어 바른 손톱과 페디큐어 바른 발톱을 좋아했다. 그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여성의 긴 손톱 사진을 아파트 거실에 걸어놓고 감상하곤 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야하다. 교수로서 품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혼자 키득거리곤 했다.
 
“그래서 뭐 저들은 안하고 사나?“
  
예쁜 여자를 좋아했던 마 교수.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여성관이 있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여성을 그는 ‘아름다운 여자’라고 했다. 
 
기자는 몇 년 전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어디 마음을 둘 데가 없다. 다 귀찮다"고 했다. 일종의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보였다. 하지만 신경쇠약 부분은 예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으나 우울증보다는 세상에 대한 원망, 자신에 대한 비관 등이 겹쳐진 울화병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원래 몸이 약한데다 술과 담배를 즐겨하니 몸도 많이 상했다. 특히 그는 줄담배를 했다. 2015년 무렵 그의 집을 간 적이 있다.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집에 배여 있던 담배냄새가 기자의 코를 찔렀다. 그가 잠자던 방, 글을 쓰던 작은 서재, 술을 밥처럼 먹던 거실 그리고 심지어 화장실에까지 놓여있던 재떨이가 지금도 생생하다.
 
우울증이나 삶에 대한 의욕 상실로 자살한 작가는 많다. 대표적인 작가가 헤밍웨이다. 1961년 그는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버지니아 울프도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잉글랜드 요크셔지방을 흐르는 강에 뛰어 들었다. 작가 정진희 씨는 《우즈강가에서 울프를 만나다》란 수필집에서 “그녀가 지팡이를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강물을 바라본다. 멀리 교회 종탑이 꿈처럼 아득하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 속으로 그녀가 들어가고 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우울한 파멸형’ 작가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 역시 애인과 동반자살했다. 일본의 한 하천에서 두 사람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일본 문단은 한동안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마광수 교수의 죽음은 그저 그런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영혼을 통해 연장하려는 독특한 마광수식(式) 세레머니다. 그는 자신의 글로 사람들을 '희하만천(喜賀萬千)'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어떤 분별심도 이기심도 없다. 그는 순수하며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봤다.
 
《즐거운 사라》가 외설 논란을 빚어 이듬해 구속되었을 즈음 마 교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범죄야 두말할 것도 없이 죄이지만 성 자체는 죄가 아니다. 성 자체가 마치 부도덕하고 무슨 대단한 죄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너무 싫다.”
 
마 교수의 인기를 업고 섹스 연극이 대학로에서 한창 유행할 때 "속상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 사람들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뭐..." 하고 말았다. 그의 사회에 대한 배려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마 교수가 논란의 중심에 선 1990년대는 아직도 문단의 엄숙주의와 배타주의가 만연할 때였다. 작가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형이상학적 담론을 입에 올려야 했다. 파벌주의가 문단을 형해화했다. 자신의 뿌리가 아니면 인정해주지 않는 배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성(性)은 질병이었다. 성을 입에 올리는 순간, 사회는 준엄한 잣대를 들이대며 채찍을 들었다. 위선은 사회곳곳 심층에 은둔해 있다가 표층으로 불쑥 치솟아 뒤통수를 세게 갈겼다.
 
‘마광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타났다. 그는 실팍한 몸뚱어리로 사회의 위선을 걷어차 버렸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즐거운 사라》같은 작품은 절규에 맺힌 자화상이었다.
 
마 교수는 “상상의 섹스에는 지나치게 단호하고 현실의 섹스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운 이중적 위선이 우리 사회에 범람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마광쉬즘’은 도덕과 법 그리고 사회적 외투로 무장한 통념을 깨려는 즐거운 반란이다. 그에게 있어 섹스는 도덕적 틀을 깨는 질료다. “일탈을 통한 관능적 배설이 인간을 폭력에서 구원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나친 면이 없지 않으나 충분히 소화 가능하다.
 
마 교수의 자살은 오르가슴의 극치를 정점으로, 연이어 닥치는 허무감과도 닮은 듯하다. 벚꽃의 비감을 닮은 아름다움, 그러나 그렇게 아쉽고 쓸쓸하게 지는 꽃이었거늘 사람들은 그동안 그에게 너무했다. 그에게 낙관처럼 붉게 남은 상처를 이제는 닦아줄 때가 됐다.
 
글=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주장환 월간조선 뉴스룸 객원기자

입력 :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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