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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북핵 위협] 현대판 십승지(十勝地)는 과연 어디일까

문갑식의 주유천하 - 격암 남사고와 십승지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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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임진왜란 이후 십승지(十勝地)라는 말이 유행했다. 십승지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조선 민초(民草)들이 찾던 이상향(理想鄕)을 지칭한다.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질병의 침입에도 끄떡없으며 자연재해에서도 무탈한 복지(福地)가 바로 십승지다. 십승지라는 말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정감록(鄭鑑錄)》이다. 《정감록》에 등장한 여러 십승지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이가 있다. 격암 남사고 선생이다. 남사고 선생은 인류 최대의 예언가라는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와 생존 기간이 비슷하다. 남사고 선생이 말한 십승지는 과연 어디일까. 관련 기사(《월간조선》 2016년 10월호)를 통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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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풍기·봉화·예천은 십승지 중의 으뜸
⊙ 전북 덕유산·남원·부안 일대는 예로부터 기가 센 곳으로 유명
⊙ 강원도 영월 가재골과 김삿갓 마을은 요즘 접근하기 힘든 오지
울진은 지금도 오지에 속한다. 구주령이라는 고개에서 본 일출.
강원도 영월에서 김삿갓 면을 향해 달리면 경상북도 봉화(奉化)와 충청북도 단양(丹陽)이 지척이다. 동강과 서강이 갈라지기 전 남한강 자락에 ‘가재골’이란 마을이 있다.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보면 남한강 쪽인데 우뚝 선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거주하는 가구 수는 15호 남짓, 강원도의 향토사학자들은 이곳이 격암(格巖)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말한 십승지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가재골은 워낙 물이 맑아 가재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가재골 못지않게 김삿갓면 역시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奧地)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다. 과거 시험장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준열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평생을 방랑했던 시인은 이곳에서 컸다. 그의 어머니가 몰락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찾고 찾았던 곳이어서 그런지 요즘도 세상과 담을 쌓은 곳이다.
 
 
  김삿갓 마을 접근하려다 끝내 포기
 
십승지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강원도 영월의 가재골이다. 왼쪽으로 보이는 산 뒤로 15호가량의 주민이 살고 있다.
  김삿갓은 전라남도 화순에서 종명(終命)했다. 그의 무덤 터가 화순에 남아 있는데 몇 년 뒤 그의 아들이 아비의 유골을 이곳으로 옮겨 묻었다. 김삿갓 무덤 뒤 오솔길 너머에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을 보기 위해 한참 차를 끌고 가다 포기했다. 타이어가 터질 것 같은 길 때문이었다.
 
  십승지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이 땅의 민초(民草)들이 찾던 이상향(理想鄕)을 말한다.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질병의 침입에도 끄떡없으며 자연재해에서도 무탈한 복지(福地)가 바로 십승지다. 십승지라는 말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정감록(鄭鑑錄)》이다. 이 정감록이라는 예언서는 정체불명의 책이다.
 
  저자도, 집필연도도 알 수 없으며 무엇이 정본(正本)이며 이본(異本)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흔히 《정감록》의 저자로는 도선(道詵)국사 혹은 중국 촉(蜀)나라의 도인 정감(鄭鑑), 조선초 정도전(鄭道傳)이 꼽히지만 확증이 없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중국 촉의 도인 정감이 완산백의 둘째아들 이심(李沁), 셋째아들 이연(李淵)과 함께 조선 산하를 둘러본 뒤 조선의 국운과 미래를 예언하고 문답을 나눈 것을 기록한 것이 《정감록》이라고 한다. 이때의 조선은 고조선을 말하는 듯하다.
 
  《정감록》은 감결, 삼한산림비기, 화악노정기, 구궁변수법, 동국역대본궁음양결, 무학비결, 도선비결, 남사고비결, 징비기, 토정가장비결, 경주이선생가장결, 삼도봉시, 옥룡자기 등이 망라된 것이다.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첫째, 도선비결이나 옥룡자기는 도선국사를 말함이요, 둘째 무학비결은 무학대사를 지칭하는 것이요, 셋째 삼도봉은 정도전의 호 삼봉에서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넷째 남사고비결은 격암 남사고를 말하고, 다섯째 토정은 이지함을 말한다는 것이다.
 
 
  《정감록》은 임진왜란 이후 완성된 책
 
풍기읍의 전경이다. 바로 오른쪽으로는 중앙고속도로가 건설됐다.
  전문가들은 《정감록》이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완성됐다고 본다. 《정감록》에 등장하는 지명(地名)이 조선 중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역성혁명을 예언한 《정감록》은 세조·성종 때 분서목(焚書目), 즉 불태운 책 명단에 나와야 하는데 《정감록》은 등재돼 있지 않다.
 
  이 수수께끼 같은 책 《정감록》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앞으로 들어설 왕조에 대한 예언뿐 아니라 사람들이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기근이나 괴질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십승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같이 북쪽엔 없고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씨를 구하려면 양백지간(兩白之間)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를 말하는 듯하다. 《정감록》에 수록된 ‘도선비기’에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도 등장한다. “정축년에 평안도와 함경도는 오랑캐의 땅이 되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남사고
 
충청북도 속리산 인근의 십승지 마을에는 사진처럼 쌀가마니 형상을 한 산들이 많다.
  그러면서 “곡식 종자를 구하려면 삼풍지간(三豊之間)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풍기·무풍·연풍이라고 생각지만 《정감록》엔 두리뭉실한 표현이 많다. 《정감록》에 등장한 여러 십승지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이가 있다. 격암 남사고 선생이다. 남사고 선생은 인류 최대의 예언가라는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와 생몰연대가 매우 비슷하다. 남사고 선생이 말한 십승지는 어디일까.
 
  첫째, 경북 영주 풍기의 소백산 아래 금계촌이다.
  둘째, 경북 봉화 화산 소령의 소라국 옛터로 태백산 아래 춘양면에 있다.
  셋째, 경북 예천 금당동 북쪽 금당실마을이다.
  넷째, 경남 합천 가야산 아래 만수동 주위 이백리다.
  다섯째, 충북 보은 속리산 중항 근처다.
  여섯째, 충남 공주시 유구·마곡 두 물길 사이 백리다.
  일곱째, 전남 남원 운봉 두류산(지리산) 아래 동점촌 백리안이다.
  여덟째, 전북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근처다.
  아홉째, 전북 부안 호암 아래 변산의 동쪽이다.
  열째,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다.
 
  이것을 보면 경북이 세 곳, 전북이 두 곳, 경남·충북·충남·전남·강원도가 각각 한 곳이며 각각 태백산·소백산·속리산·지리산·변산·태화산이라는 명산을 끼고 있다. 놀랍게도 남사고 선생이 꼽은 십승지는 지금도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를 봤으니 이번에는 남원 운봉(雲峰)으로 가 본다. 남원 운봉은 해발 500여m 되는 고지에 있다. 지리산 자락이 끝나는 곳인데 동서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드넓은 분지가 펼쳐져 있다. 이 마을에서는 최근 ‘십승지 면장회의’가 열렸다.
 
  남원과 가까운 전북 무주 덕유산 근처와 부안 호암은 예로부터 풍수가 예사롭지 않다는 말이 많았던 곳이다. 특히나 부안 호암은 조용헌씨 같은 동양학자들이 ‘기(氣)가 세고 도(道)를 닦기에 제격인 곳’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충남 공주 유구·마곡 사이 백리에는 유명한 사찰이 있다. 마곡사다.
 
  격암 남사고 선생의 고향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다. 증조부 남호 선생은 울릉도를 토벌할 때 공을 세운 무장이었으나 할아버지 남구주(南九疇)는 정4품 의정부 사인(舍人), 아버지 남희백(南希伯)은 이조좌랑을 지낸 문인 가정이었다.
 
  남사고 선생의 호 격암에서의 ‘격’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격자를 따온 것이다. 어렸을 적 그의 집안이 가난해 서당이나 서원을 다니지 못하고 선생님 없이 오로지 독학으로 책을 읽고 오묘한 학문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한다.
 
  남사고는 과거시험에 여러 번 응시하고도 실패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자 천거를 통한 등용을 꾀했다. 대표적인 게 강원도관찰사에게 보낸 편지다. 거기 ‘연래치소 문전지(年來恥掃 門前地·요즘은 문 앞을 쓸기가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항리하무 걸화인(巷里何無 乞火人·내 심정 헤아려 주는 사람도 어찌 이다지도 없습니까)’라는 구절이 있다.
 
  걸화인이라는 말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걸화녀(乞火女)’를 빗댄 것이다. 옛날에 한 시어머니가 부엌에 걸어 둔 고기가 없어지자 며느리가 훔쳐 먹었다고 의심해 쫓아냈다. 며느리는 길을 가다 아는 이에게 하소연했다. 그랬더니 그가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우리집 개가 고기를 물고 오자 서로 먹으려고 싸워 두 마리 모두 죽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55세 때 벼슬길에 올라
 
  하소연이 통했는지 남사고는 55세 때인 명종대에 9품 사직참봉을 시작으로 선조 때 관상감의 천문교수(6품)에 임명됐다. 그는 평소 역학을 연구했는지 천문교수로 일할 때 완역도(玩易圖) 같은 천체의 도식을 직접 그려 벽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의 고향 울진 주변에서는 남사고 선생이 득도한 과정에 대해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남사고가 울진의 명승인 불영계곡의 불영사(佛影寺)로 가는 중에 스님 한 분과 동행했다. 스님은 돌연 “장기를 둘 줄 알거든 나와 내기를 하자”고 했다.
 
  두 사람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참 장기를 두는데 갑자기 기합소리와 함께 스님이 사라졌다. 한참 있자니 없어졌던 스님이 땅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남사고가 태연히 앉아 있자 오히려 스님이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선생이 “무엇이 무섭냐”고 되묻자 스님은 “내가 많은 사람을 시험해 보았지만 모두 놀라 기절하였는데 너만 이렇게 대담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의 수제자 남세영(南世英)의 기록에 의하면 “나(남세영)의 어머님이 선생과 인척인 관계로 가끔 나의 편에 안부를 전하면 반드시 절하고 받으며 혹시 무슨 일을 나의 편으로 묻기라도 하면 꼭 엎드려서 아뢰었다”고 적었다. 그만큼 존경했다는 뜻이다.
 
  또 다른 설화에는 남사고가 젊었을 때 풍악산(楓岳山·금강산)에 놀러갔다가 신승(神僧)을 만나 석실(石室)로 인도돼 세 권의 책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승이 바로 정희량(鄭希良)이며 세 권의 책이 비서(秘書)라고 여겼다. 정희량(1469~?)은 연산군에게 경연에 충실히 임하라고 간했다가 미움을 받은 인물로 갑자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언한, 음양학에 밝은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묘를 지키다 홀연히 사라져 당대 사람들에겐 미스터리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전우치와 얽힌 전설도 전해져
 
전라북도 남원의 운봉마을이다. 왼쪽으로 지리산 줄기가 보인다.
  조선 중종 시절 송도(松都) 출신의 도인(道人) 전우치(田禹治)와 얽힌 전설도 전해진다. 대사성을 지내던 낙봉 신광한이 전우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기묘사화 당시 자신이 조광조파로 몰려 삼척부사로 좌천됐을 때를 회상한다.
 
  신광한이 울진 불영사를 관람하고 주천대(酒泉臺)에서 땀을 식힐 때 지나가던 준수한 청년을 만났다. 그가 남사고였는데 남사고가 앞날을 걱정하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구후사장(二九後師長)!’ 이것은 18년 후 신광한이 대사성으로 중용될 것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전우치는 빙그레 웃으며 남사고가 소년이었을 때 만난 적이 있다며 그가 천자의 주성(主星)인 자미성의 기운을 받은 기재(奇才)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화담(花潭·서경덕·1489~1546)이나 북창선생(정렴·1509~1546)과 비교해 달라고 하자 전우치는 “화담은 현인이며 북창선생은 이인(異人)이요 남사고는 도인이 될 그릇”이라 한 뒤 “속명만 버리면 신선이 될 재목”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남사고가 열다섯 살 때 불영계곡에서 높은 바위절벽 위에 앉아 있는 운학도인(雲鶴道人)을 만났는데 운학도인이 그를 보고 “삼원명경(三元明鏡)의 점괘 대로 과연 동방의 기재가 여기 있었구나”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사고는 운학도인에게서 낡은 책 두 권을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복서(卜筮·점괘)와 상법(相法·관상)에 관한 책과 천문과 역학을 기록한 비서였다는 것이다. 이 책을 주면서 운학도인은 다음과 같은 무서운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이 비서를 받기에 앞서 반드시 마음에 새겨둬야 할 것이 있다. 책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모두 천기(天氣)에 관계된 내용들이어서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아무에게나 발설하게 되면 집안의 대가 끊기는 화를 입는데 그래도 비서를 받겠느냐”는 것이었다.
 
  남사고는 주저하다 비서를 받아 수년에 걸쳐 공부했다. 상법을 익혀 관상으로 사람들의 앞날을 점치고 복서를 터득해 길흉화복을 예언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풍수지리에 도통해 간룡(看龍) 장풍(藏風) 득수(得水) 정혈(定血)의 묘를 깨쳤다.
 
 
  부친의 묘 정할 때 운이 다해
 
경상북도 예천의 금당실 마을 전경.
  남사고의 명운은 부친 남희백의 묘를 정할 때 다하고 만다. 그의 부친 묘는 근남면 수곡리 대현산 중턱에 있었는데 남사고는 부친을 명당에 모시기 위해 아홉 번이나 이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는 구천십장(九遷十葬)의 전설이 그것이다. 장사를 마치고 보니 묫자리가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툰다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이 아니라 아홉마리의 뱀이 개구리 한 마리를 놓고 싸우는 구사쟁와(九蛇爭蛙)의 혈이었다는 것이다.
 
  남사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홉 번을 이장했지만 그래도 명당을 찾을 수 없었지만 열 번을 이장(移葬)하면 횡액을 당한다는 풍수지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명당 찾기를 포기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천기를 누설하면 대가 끊기리라는 운학도인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보고 있다.
 
  남사고의 최후 역시 운학도인과 연결된다. 그가 종6품 관상감(觀象監) 천문학교수로 재직하던 어느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역서를 읽다 문득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니 운학도인이 문 밖에 서 있었다. 운학도인은 “이제 시간이 다 됐으니 내가 줬던 비서 두 권을 거두어 가야겠다”며 “천기를 누설한 준비는 돼 있느냐”고 힐난했다.
 
  놀라서 보니 남사고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데 도인이 준 비결 2권은 서고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 날 관상감정(觀象監正)으로 있던 이번신(李蕃臣)이 “어젯밤 별자리를 살펴보니 태사성(太史星)이 어두워졌다”고 하자 남사고는 “그 별의 운명이 바로 내 명운”이라고 했다.
 
  며칠 후 남사고는 사표를 내고 한 줄의 시를 남기고 낙향했다. 〈강물 남쪽에 경치가 좋은데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 보리라(水南山色好 歸計莫樓遲).〉 과연 울진 남수산 자락으로 돌아온 남사고는 사표를 낸 지 1년 후인 1571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 남사고에겐 액운이 찾아왔다. 생전에 1년 넘게 남사고가 봐 둔 묫자리를 파헤치는 땅속에서 물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명당이라고 봐 뒀던 장소가 풍수지리에서 제일 기피하는 수맥 자리였던 것이다. 남사고는 다른 자리에 묻혔고 그의 아들 대에서 남사고의 후손은 끊겼다.
 
 
  동서 분당·임진왜란·선조 즉위 등 족집게 예언
 
경상북도 봉화의 춘양마을 입구에서 본 모습.
  남사고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남긴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가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라 할 만한 선비들의 ‘동서 분당(分黨)’에 대한 것인데 이 이야기는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기록이 남아 있다. 1575년 남사고가 이산해를 만났다.
 
  남사고는 한양의 서쪽 안산(鞍山)과 동쪽 낙산(駱山)을 가리킨 뒤 말했다. “조정에서 분당이 있을 것이오. 낙(駱)이란 각(各) 마(馬)로 끝에 가서 헤어지며 안(鞍)은 혁(革) 안(安)이라 개혁 후 편안해지지요.” 말대로 서인은 조선 말기까지 정권의 주류를 이뤘으며 동인은 훗날 대북·소북으로 찢어졌다.
 
  남사고는 명종의 사망과 선조의 즉위도 예언했다고 한다. 그는 남산에 올라 “왕기가 흩어져 사라지는구나. 사직동으로 옮겨지리라”라고 되뇌었다. 그의 예언처럼 명종은 후손 없이 사망하고 16세 된 하성군 균(鈞)이 보위를 이어받았는데 그의 집이 사직동에 있었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남사고가 임진왜란을 예고해 적중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전해진다.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에서 조선을 침범하리라!” 과연 그의 말대로 왜군의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백마를 타고 있었다.
 
  격암 남사고가 말한 십승지 으뜸은 경상북도 풍기 금계촌이다. 이 마을 입구에는 ‘정감록마을’이라는 돌비석이 서 있다. 풍기는 제주도처럼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인데 놀라운 것은 거란·몽골의 외침과 임진왜란, 6·25 때도 피해를 안 봤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비율이 낮아졌지만 한때 주민의 70%가량이 이북 출신이라는 점도 기이하다. 이북 사람들이 해방 후 공산당의 횡포를 피해 월남할 때 《정감록》에 나오는 풍기를 찾아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이들이 들고 온 게 베틀과 인삼이다.
 
  베틀로 시작한 게 지금 저 유명한 풍기 인견의 시발점이 됐고 인삼농사로 풍기인삼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다. 금계촌에 서면 뒤로는 소백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좌우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사과나무밭이 많은 게 인상적이다.
 
경상북도 울진에 있는 격암 남사고 선생의 서당.
  십승지마을 가운데 두 번째로 꼽히는 봉화는 지금도 오지 중의 오지다. 그중에서도 춘양(春陽)마을은 임진왜란 때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인 겸암 류운용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피란 갔던 곳으로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겸암선생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이곳으로 와 아무 피해도 받지 않았다는데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안동에서 봉화 춘양마을까지 가는 것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춘양마을 근처에 태백산 사고(史庫)가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전란 등을 피해 가장 안전한 곳에 실록을 나눠 보관했다. 춘양마을 인근에 태백산 사고가 있다는 것은 이곳이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라는 반증이 된다.
 
  세번째가 안동에서 가까운 예천 금당실마을이다. 이 마을 북쪽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현대식 정자가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마을을 지킨다는 노거수가 아직도 웅장한 자태로 마을을 보고 있다. 그곳에서 보면 금당실마을은 분지형이며 산들이 마을을 빙 둘러싼 형상인데 특이하게도 2010년 이웃 안동에서 전국으로 번진 구제역 파동이 이곳에만은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금당실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얽인 일화도 있다. 이여송이 마을 지형을 보고 깜짝 놀란 뒤 “(마을 뒤편) 오미봉(五美峰)의 산세를 보아하니 금당실에서 인재가 많이 날 모습이다. 장차 중국에 해를 끼칠 것이니 무쇠말뚝을 박아 산의 맥을 끊어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당실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사람만 15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금에도 법조계와 금융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충북 보은 속리산은 누구나 한 번쯤 가 봤을 장소다. 이 산은 보은·괴산과 경북 상주의 경계에 있다. 몇 가지 설화만 소개하자면 속리산은 고려시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으로 몽진 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가던 중 넉달이나 머물렀던 곳이며 조선 중기 최고의 명장이라 할 임경업장군이 경업대·입석대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전설도 서려 있다.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관기리는 사실 속리산과 거리가 있으며 주변에는 구병산(九屛山·해발 876m)이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관기리 옆에는 적암리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촌로로부터 “여기는 옛날부터 피란지처”라는 말을 들었다.
 
  “북한의 미사일이 구병산에 막혀 이곳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 때 이곳에 국가기간방송망의 송신탑이 설치됐지요. 6·25가 났을 때는 이북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기도 했고요. 지금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지만요.”
 
  특이한 것은 구병산을 끼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시루봉이 서 있는 것이다. 마치 떡시루와 같은 형상인데 놀랍게도 이 주변에는 시루봉이라는 이름의 산만 최소 5개가 있다는 것이다. 이름만으로 봐도 뭔가 범상치 않은 지역임에 틀림없다.⊙

입력 : 20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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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 ‘세상읽기’

gsmoon@chosun.com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선임기자를 역임했다. 현재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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