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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안보

안에서 싸우다 망한 중국 왕조(王朝)들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본다 ③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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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宋나라; ‘과거사 청산’ 놀음에 나라를 망치다
 
▶ 시대 개요
 
송(宋·960~1279년)은 후주(後周)의 절도사이던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나라다. 쿠데타로 집권한 태조 조광윤은 절도사들에게서 군권을 빼앗고 병력을 중앙에 집중시켰다. 문치주의(文治主義)를 내세워 군에 대한 문관(文官) 우위의 원칙을 확립했다. 그 결과 송은 성리학이 등장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는 등 문화적·경제적으로는 전에 없는 번영을 누렸다.
 
부작용도 있었다. 관료조직이 확대되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부담이 커졌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한 관료들의 경쟁은 당쟁(黨爭)으로 이어졌다. 병력의 중앙 집중과 문관 우위의 원칙은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관료기구의 확대는 재정부담으로 이어졌다.
 
변경에서는 거란족의 요(遼·916~ 1125년), 탕구트족의 서하(西夏·1032~ 1227년) 등이 일어나 중국 본토의 일각을 차지했다. 송은 이들을 물리치려다 실패하자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주어 이들을 달랬다. ‘퍼주기’로 평화를 산 셈인데 그로 인한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1069년 신종은 신진 관료인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해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왕안석의 개혁을 둘러싸고 신법당(新法黨·개혁파)과 구법당(舊法黨·보수파) 간에 극심한 당쟁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휘종 때에 이르러 신법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이 기득권 세력화되면서 정치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금(金·1115~1234년)이 일어났지만 오랫동안 문약(文弱)과 당쟁에 젖어 있던 송은 이에 전략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금의 침공으로 1127년 북송(北宋)은 패망했다. 휘종의 아들 고종이 양자강 이남으로 옮겨가 남송(南宋·1127~1279년)을 세웠으나, 150년 후 몽골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왕안석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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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개혁가 왕안석.
1069년 송의 신종(神宗·재위 1067~1085년)은 지방관으로 있던 왕안석을 참지정사(부총리)로 임명했다. 왕안석은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벼슬자리에 나간 신흥관료 계층 출신이었다.
 
왕안석은 신종의 신임 아래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경제정책 면에서는 균수법(均輸法)과 시역법(市易法)을 시행해 상인이 상품 가격을 조작해 폭리를 얻는 것을 억제하고 유통구조를 개선했다.
 
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어전법(隙田法)을 실시해 농지개량과 관개사업을 펼쳐 농업생산성의 향상을 도모했다.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통해 토지측량을 새로 해 농민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었다.
 
농민들에게 저리(低利)로 대여해 주는 청묘법(靑苗法), 농민들이 지던 관청의 잡비부담을 덜어주는 면역법(免役法)으로 민생의 안정도 꾀했다. 안보 차원에서는 주민들을 일정한 단위로 묶어 치안 유지와 향병(鄕兵) 양성을 담당하게 하는 보갑법(保甲法), 전마(戰馬)를 기르기 위한 호마법(戶馬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시행했다.
 
왕안석은 늙고 병든 병사들을 퇴역시키고, 낡은 무기들을 새 무기로 교체했다. 유학에만 매몰되지 않은 폭넓은 사고를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과거제도와 학교제도도 개혁했다.
 
 
구법당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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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당의 영수 사마광.
문제는 이런 개혁정책들이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점이었다. 균수법·시역법은 거대 상인들과 결탁한 황족·귀족·관료들의 이익을 침해했다. 청묘법은 농민들에게 고리(高利)로 돈을 꾸어주고 돈을 갚지 못하면 농민들의 땅을 빼앗던 상인이나 지주, 관료들의 불만을 샀다. 농민들의 부역을 감해주는 부역법에 대해서는 농민들의 부담을 금전적으로 나누어지게 된 사대부층이 반발하고 나섰다.
 
왕안석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을 구법당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은 사마광, 성리학의 태두(泰斗) 정이·정호 형제, 당대 최고의 문장가 소식(소동파)·소철 형제 등이 망라돼 있었다. 신종의 할머니인 조후(曹后), 어머니인 고후(高后) 등 황실의 어른들, 신종의 동생들까지 구법당을 지지했다.
 
설상가상으로 개혁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일부 지방관리들은 실적을 내기 위해 무리하게 신법을 강행하다가 반발을 샀다. 구법당계 지방관리들은 신법의 시행을 의도적으로 사보타주했다. 가뭄이 들어도 신법 탓이고, 별자리에 이상이 생겨도 왕안석 탓이었다.
 
왕안석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는 여혜경·채확 등으로 구성된 신법당도 있었지만 대대로 조정에 세력을 구축해 온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보 문제도 당쟁 소재로 삼아
 
1074년 돌연 요의 군대가 국경을 침입했다. 요는 태항산 서쪽 대주(代州) 일대의 국경선을 다시 획정하자고 요구했다.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 이래 거란과 평화 관계를 유지해 왔던 송은 당황했다. 신종은 신하들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의견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구법당 소속 퇴임 재상 한기가 상소를 올렸다.
 
〈우리는 다음 7가지 일로 적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고려는 진작 중국에서 떨어져 나가 요의 번속(蕃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인들을 이용하여 고려와 옛 관계를 회복했으니 요는 당연히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무력으로 토번의 하황지구를 탈취했으니 요는 다음 목표는 분명 자신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대주 지역에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대량으로 심었는데 그 목적은 요의 기병이 달려드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
 
넷째, 우리가 국내에서 보갑제도를 시행하여 군사와 농업을 병행하며 농민에게 전투기술을 가르쳤습니다.
 
다섯째, 황하 이북의 각 주현(州縣)들이 적극적으로 성곽을 수리하고 성을 보호하는 해자를 깊이 팠습니다.
 
여섯째, 우리는 병기창을 만들어 신식 무기를 만들고 무장 부대의 장비를 교체했습니다.
 
일곱째, 우리는 황하 이북의 중요한 주(州)에다 37명의 장수를 배치하여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훈련을 강화했습니다.
 
이상 7가지는 모두 요를 자극하는 조치로 그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우리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요를 대해야만 그들에게 우리의 평화의지를 믿게 하여 계속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상의 조치들을 즉각 폐지하는 것입니다.〉
 
송이 시행한 국방력 강화 조치들이 요나라를 자극했으니 그러한 조치들을 철폐해야 평화가 온다는 황당한 주장이었다. 오늘날 국내 좌파 세력들이 즐겨 찾는 ‘내재적 접근법’ ‘사드배치 반대’ 주장들과 흡사하다.
 
한기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그가 올린 상소문의 다음 구절에 그의 본심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들이 완전히 폐지된 다음 폐하께서 다시 백성의 힘을 기르시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시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자를 기용하시면, 요나라도 자연히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기서 ‘간사한 자’는 왕안석, ‘충성스럽고 선량한 자’는 한기 자신, 사마광 등 구법당 인사들을 가리킨다.
 
공교롭게도 그해 하북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다. 유민(流民)이 발생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신종은 결국 왕안석을 해임했다. 왕안석은 이듬해 다시 조정으로 복귀했지만 이미 심신이 지쳐 있었다. 왕안석은 1076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1086년 세상을 떠났다.
 
개혁을 하려면 개혁주체 세력이 충분히 형성되고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일선에서의 시행 착오를 줄이기 위해 대비도 해야 한다. 기득권 세력이 필요 이상으로 불안감이나 반감을 갖지 않도록 소통하고 설득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신종과 왕안석에게는 그런 점이 부족했다. ‘개혁’을 한다면서 성과는 없이 국민들에게 피로감만 준 노무현 정권의 경우와 비슷하다.(계속)

입력 :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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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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