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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양식씨 인터뷰...회식 자리의 진실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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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중계-의문사委·全상병에 의해 살인자로 누명 썼던 盧讓植씨(당시 중사)의 격정 토로 2시간 『옛 부하들이 生業 제쳐두고 나의 명예회복 돕고 있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잃어버린 父權을 되찾고 싶다』 1984년 발생한 許元根(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 당시 7사단 3연대 3중대 19소초장이었던 盧讓植(노양식·55)씨는 진통제를 한 줌씩 먹고 있었다. 그는 2002년 7월15일 교통사고를 당해 경추 요추 분리증 및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최근에는 베트남戰의 후유증인 목 디스크까지 악화됐고, 지방간으로 인해 침샘이 말라 3~4분만 말하면 혀가 꼬이고 목이 타들어 가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5개월째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盧씨는 거동이 어려워 최근 국방부 특조단의 현장검증과 재판 준비를 위해 목 보호대와 허리 보호대를 착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국방부 특조단의 「의문사委의 조사결과는 날조·조작됐다」는 내용의 조사결과는 盧씨에게 잃었던 미소를 되찾아 주고 있다. 그는 2002년 11월 의문사委 韓相範(한상범) 위원장 등 다섯 명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소송을 낸 목적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父權(부권)」을 되찾고 싶다는 것이다. 『서른 살인 큰아들이 최근 언론의 보도를 보고 곤혹스러웠던지 나를 피합디다. 2001년에 7사단 부사관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때 어색했던 분위기는 말로 할 수 없었어요. 法에 호소해서라도 저에 대한 의혹을 씻는 것이 자식(2남1녀)과 32년 軍 생활의 명예를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盧씨는 1970년 軍에 입대한 후 32년간 軍생활을 마치고 1998년 1월 원사로 전역했다. 그는 1970년 5월6일, 백마부대 28연대 박격포 반장(하사)으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그는 이듬해인 1971년 1월23일 귀국할 때까지 駐越 한국군사령부 작전, 백마 작전, 도깨비 작전, 홍두깨비 작전 등 크고 작은 27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인헌무공훈장을 두 번 받았다. 귀국한 그는 1971년 3월1일 7사단에 부임해 1998년 전역時까지 7사단에 근무했다. 베트남戰 후유증으로 수도통합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은 뒤 전역하게 됐다. 그는 軍에서 원칙을 강조해 별명이 「FM」이었으나, 인간적으로 따스한 면도 많았다고 같이 근무한 부하들은 말하고 있다. 2002년 11월28일 오후, 기자는 서울 강남의 林炚圭(임광규)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 오전에는 국방부 특조단의 許元根 일병 사망사건 최종 조사 발표가 있었다. 『事故 보름 전 19소초에서 닷새간 휴식』 ―국방부 특조단의 許일병 사망사건 발표를 본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처음엔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사실은 계속 울고 있었어요.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이 치받쳐 올라왔어요. 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막 흐르더라고요. 의문사委로부터 당했던 것, 언론사들로부터 「살인범」으로 몰려 어려움을 겪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거예요. 누군가 저를 막아 주더라고요. 그 때 심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새하얀 백지」였습니다』 ―許元根 일병이 사망하던 1984년 4월2일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습니까. 『그날은 받지 않았고, 며칠 뒤 헌병들이 와서 진술을 받아 갔습니다』 ―盧중사께서 許일병을 중대장 전령으로 추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간부 및 계원들이 저녁 결산을 하다가 전령 선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전방부대에 들어가기 얼마 전이었어요. 전령인 오용근 병장이 제대 말년이기 때문에 교체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김○○ 중대장도 「오용근이가 제대하는데, 전령으로 쓸 만한 친구를 각 소대에서 한 사람씩 차출해 달라」고 하더군요. 각 소대에서 추천을 했는데, 중대장이 유독 원근이를 집착해서 데려간 겁니다』 ―어떤 점 때문에 중대장이 許일병을 전령으로 선발했을까요. 『중대장 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일단 원근이가 키 크고 인물이 잘 생겼고요. 덩치가 좋으니까 훈련 때 무전기를 메고 중대장을 잘 따라다닐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은 전령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격요건입니다』 許일병이 사망하기 보름 전쯤. 許일병은 중대장의 지시로 19소초로 내려간다. 盧중사도 중대장의 연락을 받긴 했지만 중대본부에서 19소초로 「더플백」을 메고 내려온 許일병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국방부 특조단은 최종 조사결과 발표에서 『괴팍한 성격을 가진 중대장 밑에서 전령 업무를 보면서 갖게 된 심적부담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라며 중대장 책임론을 전개했었다. 『중대장이 제게 내려보낼 때는 명목상 「취사교육」을 시키라고 했습니다만, 쉽게 말하면 너무 힘들어 하니까 휴가를 보낸 겁니다. 「네가 웬일이냐」고 했더니 「중대장님께 전화 안 받으셨습니까」라는 말만 하고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안 하더라고요. 「목욕탕에 빨랫감을 가져가서 빨래하고 좀 쉬라」고 했지요. 19소초는 낮은 지대라 계곡 물이 콸콸 잘 흘러갑니다. 계곡이 좋아 쉬기도 좋고 씻기도 좋아 일주일에 한 번쯤 다른 소초 병사들이 목욕도 하고 가는 곳입니다. 중대 행정반원들도, 소대장들도 「원근이가 힘들어 한다」고 하니까 그 소리가 중대장에게 들어갔겠지요』 ―얼마 간 머물렀습니까. 『닷새쯤 쉬다가 갔지요. 사흘째가 되니까 중대장이 제게 전화해서 「올라와서 생활할 수 있겠다는데 뭐, 올려보내지」 하더군요. 중대장 말하는 투가 독특해요. 許일병이 제가 없을 때 중대장에게 전화를 했던가봐요. 그렇게 올라가고 나서 4월2일 오후에 사고소식을 들은 겁니다』 ―닷새 간 지내면서 許일병이 盧중사께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를 한 것은 없습니까. 『성격이 내성적이라 묻는 말 외에는 거의 대답을 안 했습니다』 중대장의 괴팍한 행태 당시 22세인 許일병은 現 주소가 전남 진도군 군내면으로 돼 있었다. 부산 수산大(현 釜慶大) 재학중 1983년 9월28일 입대해 그해 11월16일 7사단에 전입했고, 이듬해 4월2일 7개월을 복무한 시점에서 총기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신상명세표를 보면 특기는 배구, 취미는 바둑, 주량은 소주 1홉 정도로 돼 있었다. -중대장과 許일병이 同鄕(동향)이었다면 중대장이 신경을 써주었을 것이고, 오히려 일반 소초 근무보다 나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당연히 팔은 안으로 굽을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분에게는 그런 것을 못 느껴요. 許일병도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김○○ 중대장의 전령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중대장은 아침에 세수하다 목 부위의 러닝이 젖으면 사정없이 전령의 뺨을 때렸답니다. 맞지 않으려면 양칫물을 들고 있다가 잽싸게 허리 부분의 러닝을 당겨서 목 부위의 러닝이 젖지 않도록 해야 했답니다.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가면 「성의가 없다」면서 飯盒(반합)을 발로 찬 적도 있었답니다』 ―중대장은 16소초에서 가져 온 식사를 먹지 않고, 내무반에서 許일병이 지어 준 밥만 먹었다는데 사실입니까. 『밥을 새로 지어 먹었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전방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타다 놓은 군대 밥은 금방 식어버립니다. 그럴 때는 전령이 취사장에서 쌀을 가져와서 밥을 짓고, 반합에 타온 국을 따끈하게 데워 주는 정도지요. 전방에 들어가기 전 전령인 오용근 병장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중대장과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중대장과 저는 「상하관계」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제가 중대장보다 여덟 살이 더 위니까 그것 때문에 두사람이 껄끄럽지 않았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게 아닙니다. 중대장은 유독 位階(위계)를 따지는 타입이었고, 그 때문에 저는 감히 말을 붙일 생각도 못했습니다』 ―장○○ 소위가 중위로 진급한 4월1일, 盧중사께서는 중대장으로부터 회식 날짜를 통보받았습니까. 『회식을 준비하라는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전쯤이었을 겁니다. 보통 소초장들은 유선상으로 중대장에게 그날그날의 일들을 「지휘 보고」하는데, 중대장이 「장 소위가 진급하는데, 그냥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면서 좋은 분위기에서 회식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그때 각자 소초장들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할당받았는데, 저는 술을 맡았을 겁니다』 ―그날 회식을 시작한 시각은 몇시입니까. 『일과가 시작된 후니까 오후 9시30분이나 10시경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의문사委에서 「정확하게 시간臺(대)를 써야 한다」고 하니까 미치겠더라고요. 회식하러 들어가면서 시계 정확히 보고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엔 의문사委에서 아무 부담없이 진술을 했는데, 나중에 조서를 보니 시간 짜맞추기로 됐어요. 「이거 말을 잘못했다가는 뒤집어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사람들이 조사하는 방법이 그런 식이었고요』 『총은 안전검사를 하고 총기함에 넣었다』 ―중대본부에 들어갈 때 許일병을 보았습니까. 『중대본부 입구에 들어서니 인사계실 앞에서 許일병이 안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안주는 아니고 치즈 등 마른 안주를 준비하고, 찌개도 끓이더군요. 許일병이 준비하는 동안 함께 온 저희 소초의 정성홍 하사와 내무반 안에 있는 중대장 책상 앞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얼마후에 許일병이 와서 「다 됐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중대장실로 들어간 겁니다』 ―GOP는 接敵(접적) 지역이기 때문에 탄창을 총기에 결합한 채 이동해야 하고, 막사(내무반)에 들어갈 때는 안전 검사를 하는 규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은 총기함에 두어야 하고요. 盧중사께서는 당시 어떻게 했습니까. 『맞습니다. 간부들도 솔선수범해야 하니까 예외가 아닙니다. 병사들은 저를 「육군 FM(야전교범)」이라고 했을 정도로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런 제가 기본 근무수칙도 안 지켰다면 말이 됩니까』 ―회식은 언제 끝났습니까. 『아무리 늦게 끝나도 새벽 1시~1시30분쯤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의문사委에서는 「2시에 회식이 끝났고, 당신이 2시30분에 許일병을 쏘고…」하는 식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부터 시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술 좌석이 끝나고 자고 있던 정 하사를 깨워 중대본부 입구에서 담배 한 대 피운 것밖에 없습니다. 의문사委에서는 제가 허일병을 쏘고 나서 멍청하게 서있었다고 하니까 너무 어이가 없는 겁니다. 지난번 국방부의 현장검증 때 중대본부 막사內에서 총성실험도 했지만, 내무반 안에서 91데시벨(戰車가 옆을 지나는 정도의 소음)이면 자던 병사들도 벌떡 일어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무반에서 총을 쏘았다는데 그때 자고 있던 병사들 중 총소리를 들었다는 병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문사委는 저에게 「다른 것은 잘 기억하면서 왜 총 쏜 사실만은 기억을 못 하느냐」면서 일방적으로 몰아갔습니다. 저는 3회 조사 때부터 「변호사를 선임해 주기 전에는 당신들과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現 단계는 의문사委의 조사과정일 뿐이지 法的인 과정이 아니다」라면서 오리발을 내밀더군요. 그들은 그 조사를 근거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모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으면서…』 회식 자리의 분위기 ―그날 회식 자리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보통 회식자리였어요.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고 다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는 정도입니다. 중대장이 회식 때면 자잘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했습니다』 ―중대장과 말다툼은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말다툼이 아니고 제가 일방적으로 야단을 맞은 겁니다』 盧중사가 설명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여덟 살 아래인 중대장의 사생활 문제에 대해 꼭 충고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중대장 체면도 걸린 문제라 기회를 보다가 장 중위 축하 회식자리를 택한 겁니다. 그것도 회식이 끝나갈 무렵에 말을 꺼냈고요. 그런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중대장의 첫 마디가 「싸가지 없는 놈, 하사관이 건방지다. 자기 일도 똑바로 못하는 놈이 왜 남의 일까지 참견하느냐」고 일방적으로 욕을 했어요. 그분 스타일이 나이 많은 부하도 화가 나면 막 하대를 했으니까요. 「제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주제넘게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다」고 했는데도 펄펄 뛰었습니다. 서너 차례 사과를 하는 와중에 제 옆에 있던 장 중위가 중대장이 눈치를 못 채게 제 전투복 바지를 서너 차례 잡아당겼습니다. 먼저 나가란 신호를 한 거지요. 그래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하고 나왔단 말이에요』 ―그때 서로 高聲(고성)이 오갔습니까. 『중대장 목소리만 컸지 저는 잘못했다고 한 것밖에 없습니다. 중대장실이 얇은 베니어板(판)으로 돼 있어 깨어 있던 병사들은 싸우는 소리로 들었을 겁니다. 장 중위도 같이 나온 것은 분명하고, 둘이서 중대본부 앞 공터에서 담배를 피웠는지, 아니면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헤어질 때 장 중위가 「(회식)준비하느라 신경써주셔서 고맙다」고 한 것은 기억납니다』 ―문을 박차고 나왔다는데 화가 났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문을 찬 것도 아니고 중대장실의 문이 본디 잘 안 열리니까 문고리를 잡고 문짝 아래를 발로 툭 친 것이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했을 겁니다』 ―왜 全○○ 상병이 盧중사를 지목했다고 보십니까. 『그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의문사委에서는 중대장실에서 나와 자고 있던 중대원들을 발로 차며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만. 『제가 저희 소대원인 정성홍 하사를 깨워서 내려가려고 중대원들의 군화를 툭툭 찼던 겁니다. 날씨가 추워서 군화를 신은 채 모포를 얼굴에 덮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구둣발로 차서 깨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문사委의 황당한 신문 ―사건 당일 몇 시 쯤 본부중대로 올라왔습니까. 『오후 3~4시 사이로 알고 있어요. 제가 올라가니까 헌병대에서 사체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국방부 특조단이 밝힌 盧중사의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는 사건 전날 오후 9시경 중대본부에 도착해 9시30분~이튿날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셨고, 19소초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3시경. 盧중사는 이때부터 낮 12시까지 취침했고(오용근 병장 목격), 오후 1시50분경 19소초 세면장 앞 빙판 제거 작업을 지휘하다 許일병의 사고소식을 접한 것으로 돼 있다. 『제가 의문사委에서 아무리 상황 설명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해도 일언지하에 잘라버리더라고요. 의문사委가 사전에 짜놓은 각본대로 「모자이크」했습니다. 의문사委가 자신들의 기초 조사를 근거로 우리를 訊問(신문)해야 하는 것이 수사의 기본인데 수사관은 처음부터 「許元根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황당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許元根 自殺(자살) 사건이오?」라고 했더니, 「자살」 소리가 나오자마자 책상을 「꽝!」 쳤어요(盧중사는 책상을 주먹으로 엄청 세게 내리쳤다). 왜 자살이냐는 거예요.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自殺의 「自」자도 못 꺼내게 했습니다』 ―수사는 自殺과 他殺의 가능성을 같이 열어 놓고 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의문사委는 처음부터 他殺에 초점을 맞춘 것이란 말입니까. 『1984년 당시의 헌병대도 他殺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하는 바람에 중대원들이 엄청나게 고생한 겁니다. 병기계 손명조 상병은 중대장의 지시로 許일병 사체 위에 탄창을 가져다 놓는 바람에 뺨을 40대나 맞았고, 중대원들은 헌병들에게 「네가 죽였잖아」하는 소리와 함께 곤봉으로 머리를 맞았답니다. 국방부에서 애당초 자살로 은폐하려 했다면 왜 중대원들에게 他殺혐의를 두고 조사했겠습니까』 盧중사는 『만약 내가 중대원들이 보는 데서 許일병을 쏘았다면, 제대하면서 「내가 7사단엘 다시 오면 姓(성)을 간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고통을 받은 중대원들이 저에게 찾아오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병사들의 입장에서, 제가 만약 許일병을 쏘았다면 보호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 이하의 육체적인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런 악랄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저를 지목한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다. 제가 뭐가 예쁘다고…. 그런 말을 의문사委에서 하니까 헌병대에서 「洗腦(세뇌)」시켰다면서 일축하는 겁니다. 헌병대에서 때린 것이 글쎄, 세뇌시킨 것이라네요』 『부하들이 生業 제쳐 두고 나의 명예회복 위해 뛰어 준다』 ―의문사委의 조사결과를 발표한 신문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극단적인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참담했죠. 일반 국민들은 보도를 보고 어떻게 살인 혐의가 있는 사람을 지금껏 조사도 하지 않고 1998년까지 軍 생활을 하게 했느냐는 것이었잖아요.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전화벨 소리도 싫었고,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기조차 싫었어요. 친구들은 절 위로한답시고 전화를 하는데, 저는 친구들이 죽이고 싶도록 밉더라고요. 「야, 술 한잔 하러 가자」는 소리를 들으면 벌써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거예요. 의문사委의 조사를 받고 나면 한 열흘 간은 싸움만 하고 싶어요』 의문사委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진행중인 盧씨는 소송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 줬다. 『訴狀(소장)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길래 軍 생활하면서 받은 표창장을 한 뭉치를 변호사 사무실로 가져왔습니다. 복사하다 보니 1984년도에 표창을 받은 것도 있더군요. 林炚圭 변호사가 「살인자에게 누가 이런 표창을 줬지」하며 농담을 하시더군요』 ―국방부의 조사결과가 발표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개구리가 멀리 뛰기 위해 웅크리듯 저도 진실을 밝히고 저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뛸 겁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봅니다. 특히 제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生業을 제쳐 두고 찾아오는 부하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들이 이번 訴狀 작성에 증인으로 큰 도움을 줬고, 제가 이 친구들에게 못 된 짓을 조금이라도 했었더라면… 요즘 세상이 얼마나 각박합니까. 나 하나 생각하기도 힘든데 부하들이 도와준다고 찾아왔을 때…(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盧씨는 지난번 국방부 특조단의 현장검증을 참관했었다. 그는 의문사委가 불참한 사실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현장검증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시범을 그들에게 보였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두 국가기관인 의문사委의 발표와 국방부 특조단의 발표가 自·他殺로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데 대해 『어차피 중대원들 아홉 명과 全○○ 상병의 최종 대질심문은 한 번은 이뤄져야 한다』면서 『그 자리에 제가 꼭 참여해 진실을 확인하고 全○○ 상병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했다.●

입력 : 200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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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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