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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사건’을 통해 본 홀트 가족 이야기

해리 홀트(1905~1964)는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려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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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무렵 홀트아동재단에 맡겨진 영아들 모습이다.

‘정인이 사건’을 통해 국내 입양아 학대 문제가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다. 

한편으로 한국인을 대신해 수 많은 한국의 고아들을 살려낸 ‘해리 홀트’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회자되고 있다. 


역사학자인 김형석 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은 최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해리 홀트를 조명했다. 

해리 홀트(Harry Hol, 1905~1964)는 6.25 전쟁 이후 한국 고아들을 입양한 인물이다.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다.

수 많은 한국의 혼혈 고아를 돌보고 부모를 맺어주었다. 1955년부터 국내 혼혈 고아를 비롯한 전쟁고아를 길러 3000여명의 고아들을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시켰다. 그의 가정(부인과 1남5녀)에서도 4남4녀의 혼혈 고아들을 아들 딸로 맞아 미국에서 길렀다고 한다.


다음은 김형석 원장의 글 <정인이 사건을 통해 본 홀트 가족 이야기>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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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홀트(Harry Hol, 1905~1964)는 미국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주에서 밀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1927년 버다(Bertha Holt, 1904~2000)와 결혼한 후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가뭄이 계속되자 오리건주로 이사하여 목재사업과 제재소를 운영한 것이 큰 사업으로 번창하였다.

이렇게 해리는 목재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가는 체험을 한 후부터 신앙생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4년 12월 14일 오리건주의 유진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월드비전(World Vision) 창시자 밥 피어스 박사의 특별 강연에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전쟁고아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우리같은 가난한 농부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타까운 마음만 남긴 채 집으로 향했다. 그날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구호금을 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다큐 속 아이들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에게는 이미 1남 5녀의 여섯 자녀가 있었지만 한국의 고아를 품기로 결심하고 농장의 일부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무작정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홀트는 한국의 고아들을 입앙하고, 한국에서 아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과 심장 수술을 한 쇠약한 50세의 농부가 어떻게 새로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가 한국으로 오는 도중에 들런 일본의 한 호텔에서 아침에 펼친 성경의 한 구절을 보고 자신의 인생을 입양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하라. 그를 내가 지였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서 43:5-7)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미국의 피난민구호법은 한 가정에서 입양 가능한 인원을 두 명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리건주 출신의 리처드 뉴버거 상원의원과 에디스 그린 하원의원의 도움으로 입양을 2명으로 제한한 규정을 개정한 '홀트 법안'을 통과시켰다.


1955년 6월 한국을 찾은 홀트 부부는 혼혈아 등 8명의 전쟁고아를 입앙하고, 4명은 다른 부모들에게 입양을 주선했다. 10월 14일 홀트 부부와 입앙아 12명을 태운 비행기가 미국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여러 곳에서 돕겠다는 연락과 함께 입양 문의가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홀트 부부는 1955년 자신들의 이름을 딴 '홀트씨(FE) 양자회'를 한국에 설립하고 본격적인 입양사업에 나섰다. 홀트씨양자회는 단체 수용방식의 기존 고아원과 다르게 아이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선물해 줌으로써 아이들의 양육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입양 초기에 한 아이가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사가 유전병이라고 진단하자, 버다는 그 아이가 입양아라는 사실도 잊은 채 자신의 집안에는 그런 병이 없다면서 전력을 다해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았다. 이들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의 많은 가정에서 국제 입양을 문의하였다.

 

1960년 12월 재단법인 홀트해외양자회로 재설립되어 국내 혼혈아둥을 초기에는 주로 미국에 입양시켰으나 점차 유럽·아시아 등지까지 입양시키는 사업에 증점을 두었다. 처음에는 전쟁고아들을 입양하다가 그중에 아픈 아이들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있어 직접 의사를 고용하여 아픈 아이들을 돌보았다. 1961년 무렵에는 장애아동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일산 탄현리의 농장 부지 7만여 평을 구입하였다. 새로운 집을 짓고 특수교육과 물리치료 등을 시작하여 홀트일산복지타운을 만들었다.


해리 홀트는 숨을 거두는 날에도 아기 두 명을 안고 와서 담요를 끌어당겨 덮어주고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버다 홀트는 1964년 세상을 떠난 남편 해리 홀트의 유업을 이어서 홀트 국제아둥복지회를 이끌었다. 아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입양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손수 축하 편지를 쩌서 보냈다. 버다 홀트는 2000년에 삶을 마감하였는데, 생전에 경기도 일산에 자신의 묘를 마련할 정도로 한국 사랑이 각별했다. 버다 홀트는 1995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키스와니 세계 봉사상을 받았다.

 

버다 홀트가 세상을 떠나자 셋째 딸팔 말리 홀트(Molly Halt, 1935-2019)가 그 뒤를 이었다. 1956년 오리건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말리는 아버지의 부름으로 한국에 와서 서울 효창공원과 녹번동 일대에서 고아들을 양육했다. 특히 버려진 장애아동에 대한 사랑을 쏟아온 그녀는 1975년부터 홀트일산복지타운의 '말리의 집에서 중증 장애아동을 돌보다가, 2019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대를 이은 홀트 가족의 붕사는 한국전쟁으로 고통당하던 고아와 장애인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었다. 홀트 가족의 품을 거친 입양아는 대략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21세기 접어들어 해외 입양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해외입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나타나고, 대안으로 국내 입양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국내 최대의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가 운영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지 홀트 가족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은 아니다. 홀트 가족이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미국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희생하면서, 고아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양육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던 정신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은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훈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정인이 사건에 나타난 아동학대라는 개인의 일탈을 마치 입양 가족과 제도의 문제처럼 오도하는 잘못은 즉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현수 사건(2014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세 살배기 현수 군이 양아버지 오캘러핸의 구타로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때 검찰은 양부인 오캘러핸에게 1급 살인 및 1급 아동학대치사죄를 구형했지만, 재판에서는 플리바게닝을 통해 1급 살인 혐의는 벗고 1급 아동학대 치사죄 중 최저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과거 수감기간을 형량에 더하도록 판결했는데, 오캘러핸은 과거 2년간 수감된 기록이 있어 결과적으로 10년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전국입양가족연대 오창화 대표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정인이 사건으로 인해 지금 당장 입양이 필요한 말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지키고 보살펴서 새로운 엄마 아빠의 품으로 보내야 한다."고 안타까움을 호소한다. 그의 외침은 계속된다. "우리(크리스천)가 말씀대로 주변의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잘 돌봤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생명을 돌보는 일보다 더 큰 선교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시대의 사명 아닐까요." 지금이라도 그의 말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홀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되갚는 것이다.

입력 : 20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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