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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夢憲 現代 회장의 죽음의 행로 - 검찰 관계자 충격 證言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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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夢憲 現代 회장의 죽음의 행로 - 검찰 관계자 충격 證言 
 
『鄭夢憲 회장은 죽기 전날 내게 유서를 보여 주었다』  
   
 무기 중개상 金榮浣은 자신이 도난당했다고 했던 무기명 증권금융채 40여억원을 鄭회장 死後 찾아갔다.

 

[검찰 관계자]
『鄭회장은 누군가 작성해 놓은 文書를 보고 유서를 휘갈겨 썼던 것 같다』

 

● 경찰 발표는「3개 봉투에 담긴 유서 4장」, 검찰 관계자가 본 유서는 5장. 공개되지 않은 1장의 유서는 DJ정권 핵심실세에게 보내는 항의성 유서였다.
● 鄭회장은 구속을 피하기 위해 「자해·자살 소동」을 벌이기로 자신의 측근과 사전 협의. 친분이 있는 검찰 관계자에게 이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 경찰 관계자: 『鄭회장이 자살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eaglebsk@chosun.com〉  
 
『鄭夢憲은 自殺로 몰려갔거나, 他殺당했다』 
 
 기자는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여러 차례에 걸쳐 鄭夢憲(정몽헌) 前 現代(현대)그룹 회장의 죽음에 얽힌 證言(증언)을 한 검찰 관계자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鄭회장이 남긴 유서를 鄭회장 사망 하루 前에 봤다는 그는 『鄭회장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他意(타의)에 의해 자살로 몰려갔거나 타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반신반의하는 기자에게 그는 여러 가지 情況(정황)을 제시했다. 4개월에 걸친 본격적인 鄭夢憲 사망 미스터리 취재는 이렇게 시작됐다.
 
  2003년 8월4일 사망한 鄭회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지이 엄마. 모든 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당신에게 모든 짐만 남기는군요. 지이, 영이, 영선, 이 아빠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아빠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나의 유분은 금강산에 뿌려 주기 바랍니다.
 
  김윤규 사장. 명예회장님께서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회장님을 모실 때 저희 자식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을 뿐입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하는 대로 모든 대북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를 바랍니다>
 
  이 검찰 관계자는 鄭회장이 남긴 이 유서를 鄭회장 사망 전날인 8월3일 오후에 봤다고 증언했다. 아래는 그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鄭夢憲의 마지막 순간이다.
 
  2003년 8월3일 오후 2시경. 鄭夢憲 前 現代그룹 회장의 주검이 발견되기 16시간여 전이다. 그 시간 鄭회장은 하얏트 호텔 커피숍에 있었다.
 
  鄭회장의 사망 전 행적 중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다. 호텔 커피숍에 앉은 鄭회장의 맞은편에는 역시 지금까지 鄭회장의 죽음과 관련해서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앉아 있었다.
  
    鄭회장, 공중전화로 검찰 관계자 불러
  
2003년 6월17일 對北송금 의혹과 관련 再소환된 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장이 특검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다.

  기자에게 충격적인 증언을 해 준 바로 그 검찰 관계자였다. 이 검찰 관계자는 鄭회장의 전화를 받고 하얏트 호텔 커피숍으로 찾아왔다. 이날 鄭회장이 검찰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한 수단은 공중전화였다. 鄭회장은 당시 現代비자금과 관련해 대검 중수부의 수사를 받고 있어 몸조심을 하고 있던 때였다.
 
  鄭회장은 「對北 비밀송금 의혹사건」 관련 宋斗煥(송두환) 특검팀에서 2003년 5월30일 첫 조사를 받았다. 이후 두 달여 사이에 10여 차례 특검과 법원·검찰에 출석했다. 특검 조사가 마무리된 직후인 같은 해 7월4일부터 법원에서 對北비밀송금 사건 재판이 시작됐다.
 
  대검 중수부에서 月刊朝鮮이 특종 보도한 現代상선 비자금 200억원 관련 수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鄭회장은 사망 직전인 7월26일과 31일, 8월1일과 2일에는 검찰 조사실과 법정을 오가야 하는 일정을 보냈다. 7월26일과 31일, 8월2일은 대검 중수부의 1, 2, 3차 소환조사였고, 8월1일은 對北 송금 3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검 중수부는 對北 비밀송금 사건에서 불거져 나온 現代 비자금(150억원+α) 이외에 現代상선 비자금 200억원에 대해 鄭회장을 상대로 중점 조사를 벌였다. 이 같은 상황은 鄭회장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한 이유로 추정되기도 했다.
    
  鄭회장, 『내가 구속될 것 같습니까』
 
  鄭회장은 이날 만난 검찰 관계자에게 『내가 구속될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검찰 관계자는 『구속이 되더라도 몇 개월 이상 되겠습니까. 담담하게 마음먹고 대처하십시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鄭회장은 『변호사나 내 주변 사람들의 말이 다 달라요. 변호사들은 「정치자금 등의 문제로 구속을 각오해야 한다」고 하고, 주변에서는 다르게 말하고…』라며 검찰 관계자의 의견을 또 물었다. 이 검찰 관계자는 『검찰이 밝혀 낸 정치 자금과 관련한 부분들에 대해서 솔직히 털어놓더라도 對北사업을 위해 고생하신 대그룹의 회장을 구속까지야 하겠느냐』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 이 검찰 관계자는 『혹시 정치권에 제공한 비자금 리스트를 가지고 있느냐, 있으면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검찰 관계자가 鄭회장이 만나자고 한 제의에 응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鄭회장은 고개를 저으면서 『괴롭다. 더 이상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날 鄭회장은 검찰 관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의 전언이다.
 
  『鄭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자신은 「고문 변호사 등이 있는 데도 법조인들이 굶주린 승냥이처럼 여기저기서 연락해 온다」고 했어요. 어떤 변호사는 수임료로 몇십억원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디다. 鄭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법조인들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썩었다」고 하더군요』
 
  약간의 침묵이 흘렀고 鄭회장은 윗옷 안주머니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종이뭉치를 검찰 관계자에게 건네면서 鄭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서 몇몇 측근들과 대책회의를 했어요. 두 가지 案(안)이 나왔는데 하나는 송곳 등을 이용해 조사를 받던 중에 자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치사량 미달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 소동을 벌이는 것이죠. 어떻게 생각해요? 유서는 미리 써 놨는데…』
  
  鄭회장, 핵심측근과 「자살 소동」 논의
 
  鄭회장이 검찰 관계자에게 내민 종이뭉치는 바로 유서였다. 검찰 관계자는 鄭회장이 갑자기 내민 뜻밖의 유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핵심측근과 자살 소동에 관한 대책회의를 했다」는 鄭회장의 말이 사실인 것으로 검찰 관계자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鄭회장의 심적상태와 대화내용 그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유서를 내놓은 행동 등에서 鄭회장이 실제로 자살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확신이다. 그는 鄭회장이 꺼낸 유서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확인 차원에서 유서를 모두 읽어 봤다고 한다.
 
  鄭회장 사망 사건 직후 경찰은 『3개의 봉투에 담긴 A4용지 4장의 유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다음은 기자와 검찰 관계자와의 일문일답이다.
  
  사라진 한 장의 유서
  
2003년 8월4일 鄭世榮씨, 鄭夢九 현대자동차 회장, 金潤圭 현대아산 사장 등 일가들이 투신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당시 鄭회장이 보여 준 유서는 몇 장이었습니까.
 
  『휘갈겨 쓴 유서였는데 다섯 장이었어요』
 
  ―鄭회장의 사망 사건 이후 언론에는 넉 장의 유서가 공개됐는데요.
 
  『저는 분명히 다섯 장을 봤어요.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한 장은 국민의 정부 시절 핵심 실세에게 보내는 내용이었는데 원망하는 내용이 있었어요. 對北 메시지를 담은 것 같기도 하고』
 
  ―핵심 실세가 누구입니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鄭회장이 유서를 보여 줄 만큼 두 분 사이에는 신뢰가 있었습니까.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끔 만났습니다. 저한테 의논해 오는 일도 있었고, 어떤 때는 저에게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며 격려의 말도 해주시곤 했습니다』
 
  ―유서에서 특별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나요.
 
  『있었죠. 유서에 날짜를 적어 놓지 않았어요. 이미 오래 전에 유서를 써서 지니고 다녔다는 뜻이죠』
  
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투신한 곳으로 알려진 12층 鄭회장 집무실의 창문. 가로 95cm, 세로 54cm의 크기다.

  기자는 그에게 언론에 보도된 鄭회장의 유서 넉 장을 보여 주며 물었다.
 
  ―그때 본 유서와 이 유서의 필체가 같습니까.
 
  『언론에 보도될 당시에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지금 봐도 필체가 같아요. 휘갈겨 쓴 글씨가 맞아요. 鄭회장님의 사망 사건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기억을 못 할지도 모르죠. 그러나 저를 만나고 나서 바로 10여 시간 이후에 터진 사건이라 잊을 수 없죠』
 
  검찰 관계자는 「자살 사건」이라는 용어 대신 「사망 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鄭회장이 자살을 결심하지 않았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인 듯했다.
 
  ―그렇다면 鄭회장 사망 사건 직후 왜 그같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두려움이었죠. 그랬다가는 나도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무슨 일을요.
 
  그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金기자가 내 존재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제가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어요. 제가 잘 아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죠. 제가 그분에게 鄭회장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제 자신이 답답하고 두렵고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어요. 가까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면 시원해지지나 않을까 해서, 그런데 이게 더 곤란하게 됐군요』
 
  그러면서 그는 체념한 듯 이렇게 덧붙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하죠. 그게 돌아가신 鄭회장님을 위한 길인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평범했던 死亡 직전의 鄭夢憲 행적
  
2003년 8월8일 鄭회장의 영결식 후 영정이 장례식장으로 옮겨지고 있다.

  기자가 鄭회장의 유서를 보았다는 검찰 관계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지난해 9월께다. 기자는 그 무렵 한 知人(지인)으로부터 『鄭夢憲 회장의 유서를 鄭회장 사망 직전인 8월3일에 미리 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유서를 본 사람은 검찰에 있는 사람』이라며 『혹시 鄭회장이 자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추적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와 헤어진 후 기자는 사망 사건 직전 鄭회장의 행적을 되짚어 보았다.
 
  鄭회장이 이승에서 보낸 마지막 날이었던 2003년 8월3일의 행적은 자살을 결행할 사람 치고는 너무나 평범했다. 경찰 조서 등을 통해 鄭회장의 행적을 再구성해 본다.
 
  <2003년 8월2일 밤 10시30분까지 대검에서 조사를 받은 鄭회장은 서울 청담동의 W바에서 술을 마신 뒤 3일 오전 4시30분쯤 귀가했다. 對北송금 사건 3차 공판이 있던 8월1일에도 鄭회장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8월3일, 늦은 귀가로 늦잠을 잔 鄭회장은 성북동 자택에서 가족들과 점심 식사를 한 후 낮 12시30분쯤 하얏트 호텔로 향했다. 하얏트 호텔에 묵고 있던 고교 동창생 朴騏秀(박기수)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에 호텔에 도착한 鄭회장은 朴씨와 오후 2시에 만나기로 돼 있었지만 이발을 위해 2시30분으로 시간을 늦췄다. 호텔 구내 이발관에서 이발을 마친 鄭회장은 2시40분경 하얏트 호텔 로비에서 친구 朴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호텔 오픈 바에서 3시55분까지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鄭회장은 맥주 한 잔, 朴씨는 와인 한 잔을 마셨다. 이 자리에서 오간 두 사람의 대화는 골프 이야기와 자녀 문제 등이었다고 한다.
 
  오후 4시경 鄭회장은 호텔 로비에서 손위동서인 유모씨와 전화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호텔 인근 S클럽으로 朴씨와 함께 이동했다. 오후 4시5분경 S클럽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유씨와 그의 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곳에서도 골프 이야기와 유씨의 딸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 이야기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鄭회장은 그 자리에서 칵테일 한 잔을 마셨다.
 
  오후 5시경 鄭회장 일행은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인근 N식당으로 이동하면서 부인 玄貞恩(현정은) 現 현대그룹 회장에게 N식당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했다. 鄭회장은 친구 朴씨와 같은 차에, 손위동서 유씨는 그의 딸이 운전하는 차를 이용해 N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40분경. 오후 6시경에 부인과 딸이 도착했다. 저녁 8시경. 식사를 마친 鄭회장은 이들과 헤어진 후 친구 朴씨와 청담동 소재 W바로 향했다.
 
  두 사람은 W바에서 저녁 8시30분부터 11시30분까지 세 시간 동안 와인 두 병을 나눠 마셨다. 이 자리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골프 이야기, 칠레産(산) 와인 이야기, 미국 체류 경험담 등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자리를 파하고 밤 11시40분경 鄭회장은 朴씨를 하얏트 호텔로 데려다 준 후 성북동 자택으로 향했다. 자택으로 향하던 鄭회장은 운전기사 金모씨에게 『회사로 가자』며 행선지를 갑자기 바꿨다.
 
  오후 11시52분경 現代사옥에 도착한 鄭회장은 운전기사에게 『20~30분쯤 있다가 나오겠다』고 말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 회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의 문은 함께 동행한 현관 안내원 위모씨가 열어 주었다.
 
  운전기사 金모씨는 차 안에서 鄭회장을 기다렸다. 부인 玄회장은 鄭회장의 귀가가 늦자 8월4일 새벽 1시에 전화를 걸었다. 鄭회장은 평소 휴대전화기를 들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전화는 운전기사 金모씨가 받았다. 金씨는 玄회장에게 『아직 내려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玄회장은 8월4일 새벽 5시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운전기사가 『주무시는 모양입니다』고 대답하자, 玄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鄭회장은 그날 자신이 들어갔던 회장실 출입문을 통해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회장실 북쪽으로 난 가로 95cm, 세로 54cm의 半개폐식 창문이 鄭회장의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집무실로 들어간 지 6시간 만인 8월4일 새벽 5시52분 계동 現代사옥 뒤편 주차장 앞 화단에서 鄭회장은 미화원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시신이 발견된 4~5시간 전으로 사망 시간을 추정했다. 경찰의 추정대로라면 鄭회장은 집무실에 1~2시간 머무르면서 유서를 쓴 후 투신자살을 한 셈이다>
    
  마지막 순간을 보낸 朴騏秀씨는 현대상선의 자금에 손댄 인물
 
  鄭회장 사망 전날 가장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 있었던 친구 朴騏秀씨는 경찰에서 鄭회장이 자살하기 직전 나눈 대화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8월3일 오후 2시40~50분경 하얏트호텔 로비에서 鄭회장을 만나 오후 3시55분까지 골프, 자식들 문제 등 일상적 대화를 나누다가 오후 4시5분경 「S클럽」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얘기를 계속했다.
 
  오후 5시경 N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鄭회장 부인과 딸 등과 함께 식사를 했고, 이후 鄭회장이 평소 자주 다니던 술집으로 옮겨 와인 두 병을 나눠 마시고 헤어졌으며 鄭회장으로부터 평소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朴씨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현대상선 美洲(미주)본부장으로 있으면서 국내 본사의 재정담당 고위관계자와 함께 對北송금과 정치자금 조성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現代 측 관계자들에 따르면, 朴씨의 主활동무대는 LA이며 現代의 비자금을 관리하면서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金榮浣씨와 친분관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그가 鄭회장과 만나 골프 등 일상적 이야기만 나누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는 게 現代 주변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朴씨는 鄭회장이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8월2일에도 鄭회장과 8월3일 새벽 4시30분까지 술을 마셨다. 그 긴 시간 동안 죽음을 염두에 두고 유서를 품고 다녔던 鄭회장이 私的인 이야기만 나누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朴씨는 鄭회장의 빈소에도 들르지 않고 鄭회장 사망 직후인 8월6일 오후(미국 현지 시각) LA 공항에 도착한 후 자취를 감췄다.
 
  어쨌든 朴씨의 진술대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鄭회장의 모습」과 對北 비밀송금 사건, 現代 비자금 사건 등은 鄭회장의 죽음과 관련 여러 가지 의혹들을 낳았다. 「혹시 타살된 것은 아니냐」는 의혹들이었다. 특히 12층 높이에서 떨어졌는 데도 시신 발견 당시 외부로 드러난 상처가 심하지 않았다는 점도 의혹의 대상이었다.
    
  『鄭회장이 타살됐을 가능성은 제로』
 
  이런 의혹에 대해 鄭회장 사건 수사를 맡았던 당시 종로경찰서 곽영진 형사계장(現 202경비대 副대장)은 『사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수사를 오픈하다시피 했던 사건』이라면서 『鄭회장이 타살됐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사건 발생 초기 인터넷에 유포된 「간첩 등에 의한 鄭회장 테러」說 등을 들어 보셨습니까.
 
  『鄭회장 자살 후 별 이야기가 다 있었던 것 알아요. 그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의심이 가는 모든 경우에 대해 수사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12층에서 떨어진 시신이 너무 깨끗했다는 점도 의혹의 대상이 됐습니다.
 
  『시신이 겉만 깨끗했지 속은 안 그랬어요. 안의 골반뼈가 다 으스러져 나갔고 장기 쪽은 다 깨지고 그랬어요』
 
  ―그런데 겉은 왜 그렇게 멀쩡했던 겁니까.
 
  『떨어진 곳에 따라 달라요. 만약 시멘트 위로 떨어졌다면 피가 터지고 그랬겠죠. 그런데 鄭회장님은 화단 흙에 떨어졌어요. 그럴 경우는 외부보다 내부의 파열이 심합니다』
 
  ―당시 발견된 유서가 넉 장이었지만 「鄭회장이 쓴 유서 다섯 장을 봤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몇 장인지 정확지 않지만 우리 경찰이 넉 장이라고 했다면 발표한 그대로예요. 우리는 사건현장을 유지한 상태에서 鄭회장님의 가족들이 있는 가운데서 조사를 했어요』
 
  ―오랜 수사 경험에 비춰볼 때 자살할 사람이 미리 유서를 써서 지니고 다니는 경우도 있습니까.
 
  『있죠』
 
  ―鄭회장님도 미리 유서를 써 가지고 다닌 것 같습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필체를 봐도 그렇고. 경찰하면서 느끼는 건데 사람의 목숨은 순간 판단이에요. 집에 안 가고 밤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그런 일을 벌인 것이라고 봐요.
 
  유서를 보더라도 삶을 정리하면서 적은 게 아니잖아요. 죽음을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고 봐요. 상식적으로 鄭회장님이 자살할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의심들을 갖는 거고』
 
  ―鄭회장님의 8월3일 행적 중에 친구 朴騎秀씨를 만나기 직전인 오후 2시경 만났던 사람은 없습니까.
 
  『경찰 발표 그대로예요. 없어요』
 
  ―鄭회장이 朴騎秀씨를 만나기 직전에 만난 사람이 있다는데요.
 
  『통화 내역까지 다 조사했어요. 검찰에 기록이 다 있을 겁니다』
 
  ―유서에서 지문 검사는 했습니까.
 
  『다 했어요. 필적 감정까지 다 했을 거예요. 혹시 모르니까.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혹시 수사가 미진했다는 뒷말이 나올까 봐 다 완벽하게 했어요. 거대한 음모설 같은 것은 제가 보기에 없어요』
    
  『마취제 성분은 부검時 검출되지 않는다』
 
  사건 당시 鄭회장의 부검을 맡았던 이한영 前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과장(現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부 분소장)도 시신의 상태에 대해 곽영진 前 종로경찰서 형사계장의 말과 같았다. 李분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12층에서 떨어졌는 데도 시신에 큰 손상이 없었던 점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보기에 손상이 심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죠. 떨어진 곳이 어디냐에 따라 시신의 상태는 달라집니다. 흙이나 잔디 같은 곳에 떨어지면 겉은 비교적 큰 상처가 없어요. 鄭회장님 같은 경우죠. 그런데 鄭회장님의 시신 내부는 여러 가지 충격으로 인해 많이 손상돼 있었죠』
 
  ―부검 결과 특별한 게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나왔으면 이야기를 했겠죠』
 
  ―복용한 약물 등을 검출할 수 있는 이화학적 검사도 하셨습니까.
 
  『그럼요. 당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희들도 철저하게 부검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단정은 못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부분들은 없었던 걸로 기억되네요』
 
  ―마취제로 인해 의식을 잃은 후 사망했을 경우 부검할 때 마취제 성분이 검출됩니까.
 
  『마취제 성분 중에서 일부는 아마 저희가 검사를 못 할 겁니다. 마취 후 금방 증발돼 버리면 저희들이 찾기 어렵죠』
 
  ―수면제의 경우는요.
 
  『수면제는 문제 없이 검출되죠』
 
  기자는 자살 심리와 관련 李昶旭(이창욱) 가톨릭 의대 정신과 교수에게 자문했다. 그에게 「자살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유서를 미리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경우도 있는지」를 물었다. 李교수의 답변이다.
 
  『유서를 미리 보여 주는 경우도 있죠.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들 가운데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하는 경우보다는 왔다갔다하는 갈등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그 징후가 감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뛰어내릴 정도의 심한 자살 같은 경우는 제스처가 아니고 실제 자살 의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그럴 경우 유서를 미리 보여 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딸도 믿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죽음
 
  鄭夢憲 회장의 장녀 志伊(지이·28)양은 2004년 5월 인터넷 「정몽헌 회장 추모 카페」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속마음을 이렇게 털어놨다.
 
  <아버지는 제게 가장 커다란 힘이 되어준 분이었습니다. 굳이 많은 충고나 지침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항상 행동으로써 저에게 인생의 모델이 되어준 분이셨구요. 항상 그렇게 묵묵하고 듬직하게 저를 챙겨 주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가버리시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나 강하시던 분이 이렇게 우리 가족을 포기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항상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찾고자 했던 분이 평소에 자신이 부정적으로 여기던 방식으로 세상을 버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장녀 志伊양이 말한 대로 鄭회장이 「자신이 부정적으로 여기던 방식으로 세상을 버린 이유」는 뭘까.
 
  鄭회장은 對北송금 특검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사망 직전까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등과 관련 의욕적으로 활동을 벌였다. 2003년 7월에는 금강산 육로관광 재개를 위해 金潤圭(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사장과 함께 금강산을 방문하기도 했고, 실제 육로관광 재개를 앞두고 있는 터였다. 또 같은 달에 개성공단 조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공단 조성 컨설팅 업체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일본에서 투자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2003년 6월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북한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종혁에게 『내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개성 시장을 해보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사망 하루 전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과 鄭회장의 이러한 행보 때문에 가족들과 측근들조차 사건 발생 당시 그 동기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고, 사망 10개월여가 흐른 뒤에도 장녀 志伊양은 아버지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망 직후 鄭회장의 빈소를 찾은 林東源(임동원) 前 국정원장에게 金潤圭 당시 현대아산 사장은 『회장님이 다 막으려고 돌아가신 거예요』라며 흐느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鄭회장이 막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鄭회장 사망 사건을 취재하던 중 기자는 해외로부터 하나의 제보를 받았다.
    
  現代 비자금, 鄭夢憲, 權魯甲, 朴智元 그리고 金榮浣
  
2003년 6월12일 李益治 前 現代증권 회장이 對北송금 문제로 검찰에 출두하고 있다.

  국회에서 「對北송금사건 특별검사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무렵인 2003년 3월20일 미국으로 출국해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무기중개상 金榮浣(김영완)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제보였다. 金씨는 現代 비자금 사건과 관련된 핵심 인물이다.
 
  이 제보는 「金씨가 鄭회장 사망 직전 대리인을 내세워 32억여원을 자금 세탁했고, 2002년 3월 金씨가 보유 중 도난당했다고 했던 무기명 증권금융채 40여억원이 鄭회장 死後(사후)인 2003년 12월 金씨의 계좌로 입금됐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그의 제보가 사실이라면 무기중개상 金榮浣씨는 「鄭夢憲 비자금」을 떼먹기위해 경찰에 거짓 신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가 아니라면 실제로 도난당한 「눈먼 돈」을 鄭회장 사망 후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기 호주머니에 다시 채워 넣은 셈이다.
  
2003년 7월21일 서울지방법원. 對北송금 사건 2차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朴智源 前 비서실장이 호송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現代 비자금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鄭회장이 16代 총선 3개월 전인 2000년 1월 權魯甲(권노갑) 前 민주당 고문에게 3000만 달러를 제공한데 이어, 2000년 3~4월 총선 자금 지원 명목으로 200억원을 추가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鄭회장이 2000년 4월경 朴智元(박지원) 前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금강선 유람선 카지노 사업 허가 등을 부탁하며 150억원을 제공했다는 사건이다.
 
  金榮浣씨는 이 두 사건과 모두 관련돼 있다. 權魯甲씨가 金씨를 통해 鄭회장에게 200억원 지원을 요청했고, 現代 측으로부터 이 돈을 전달받은 金씨는 검찰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200억원 가운데 150억원을 權 前 고문에게 전달했고 나머지 50억원은 보관 중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金씨는 검찰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鄭夢憲 회장이 李益治 前 현대증권 회장을 통해 내게 전달한 150억원을 관리했고, 朴智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이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돈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朴 前 실장은 이 사건과 관련 1,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은 「돈을 직접 朴智元씨에게 전달했다는 李益治씨의 진술과 돈을 관리해 왔다는 金榮浣씨의 자술서가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 사건을 무죄 취지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鄭회장 사망 前後 金榮浣의 돈거래
   
  어쨌든 金榮浣씨가 現代 비자금 문제에 깊숙이 관련돼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해외의 제보자는 『당시 金榮浣씨가 주물렀던 돈의 대부분이 鄭夢憲 회장의 돈이었다』면서 『金씨가 금융서비스회사라며 만든 「J&C캐피탈」은 사실상 鄭회장의 돈을 세탁하기 위한 회사였다』고 했다. 제보자는 『회사 이름의 영문자 J와 C는 DJ정부의 실세와 현대그룹 실세의 영문 이니셜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金씨의 대리인이 인출한 수표의 번호와 金씨의 계좌번호까지 알려줬다.
 
  제보자에 따르면, 金榮浣씨는 2003년 現代 비자금 사건 당시 국내 대리인을 통해 긴박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權魯甲, 朴智源, 李益治 등과 복잡하게 연루된 사건을 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金씨는 鄭회장이 사망하기 13일 전인 2003년 7월22일 (주)운남매니지먼트社의 송모씨를 통해 은행에서 32여억원을 인출했다. 이날 송모씨는 검찰 인사라는 남자 1명과 H은행 역삼동 지점을 찾아갔다. 이 지점에는 金榮浣씨 명의의 계좌에서 출금된 현금 3억6700만원이 대여금고에 입고돼 있었다. 송모씨는 대여금고에서 이 돈을 자기앞 수표 1매 형식으로 발행해 찾아갔다. 곧바로 H은행 2층에 있는 기업금융지점으로 올라가 운남매니지먼트 명의의 기업저축계좌로부터 수표번호 9138×××××× 등 두 장의 수표로 32여억원을 발행받아 C은행 법조타운 지점에 수표를 제시한 후 돈을 인출했다.
 
  제보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문제의 돈이 C은행 법조타운 지점에서 인출된 점과 검찰 인사가 동행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해당 지점을 이용하는 고객은 대부분 법조인들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 당시 金榮浣씨는 現代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특수한 목적의 로비 자금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런 돈을 검찰청 코앞에 있는 은행지점을 이용했다는 차원에서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 봐요.
 
  金씨의 대리인 송씨가 H은행 역삼동 지점에 검찰 인사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다시 확인해 봐야 할 사항입니다. 은행의 대여금고라는 것은 본인 이외에는 아무나 열어 주지 않아요. 대리인의 경우 신분을 철저히 확인한 후 열어 줍니다. 이 과정에서 검찰 인사의 역할이 있었을 겁니다』
  
2003년 5월14일 오전 차정일 對北송금 특별검사 사무실에 소환되고 있는 金潤圭 前 현대아산 사장.

  金榮浣씨는 검찰에 보낸 자술서에서 운남매니지먼트와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후 삼진통상은 그만두고 「화남텍」이라는 법인을 설립하였으나 국회에서 문제를 제기해 에이전트를 그만뒀고, 그 후 부동산 임대 및 개발 업체인 「운남매니지먼트」, 「맥스 D&I」 등의 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운남매니지먼트의 소유주가 자신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기자는 지난 1월11일 운남매니지먼트의 대표이사로 있는 송모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鄭회장 사망 직전 인출한 32억원의 용도와 당시 동행했던 검찰 인사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송씨는 기자의 신분을 밝히자 『기자가 왜 전화를 내게 하느냐.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느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기자의 질문을 듣자마자 『왜 그런 걸 묻느냐』며 이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재차 전화를 걸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도난신고 후 다시 金榮浣씨의 통장으로 입금된 채권
   
  해외의 제보자는 2002년 3월 金榮浣씨의 평창동 자택에서 발생한 떼강도 사건 당시 도난당한 채권 중 상당 부분이 鄭회장 死後인 2003년 12월 다시 金씨의 국민은행 계좌로 입금된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金榮浣씨가 2002년 5월24일 국민은행 교대역점에 개설한 750601-01-0××××× 계좌에 金씨가 보유 중 도난당했다고 신고한 무기명 증권금융채가 2003년 10월31일 만기가 되자 같은 해 12월26일 증권금융채상환액 40여억원이 한국증권금융에서 입금됐다는 것이다. 이 돈 가운데 35억원은 2004년 2월11일 대리인 송모씨를 통해 金씨 명의의 대우증권계좌로 입금됐다고 한다.
 
  「金榮浣 자택 떼강도 사건」이란 金씨의 전직 운전사 등 9명이 공모, 金씨의 자택에서 90여억원 상당의 채권을 훔친 사건이다.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전직 운전사 등 일당을 체포했으나 도난당한 채권을 모두 회수하지는 못했다. 金榮浣씨는 경찰이 회수하지 못한 채권을 鄭회장 死後 재주도 좋게 되찾아 갔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년3개월이 지난 2003년 6월 외부에 공개되면서 「金榮浣 게이트」로 확산됐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후 경찰 수뇌부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파견 중이던 朴모 경감의 「요청」을 받고 극비 보안 수사를 펼친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찰 수사 과정과 도난당한 채권의 출처 등을 놓고 적잖은 의혹이 제기됐다. 사건이 언론에 알려진 이후 金榮浣씨가 도난당했다는 액수는 180억원대로 늘어났다.
 
  金씨는 당시 도난채권을 무효화하기 위한 공시 최고신청을 한참의 시차를 두고 두 번에 걸쳐 낸 것으로 확인돼 의혹을 샀다. 金씨는 강도를 당한 뒤 두 달이 지난 2002년 5월27일 「채권을 무효화해 달라」는 공시 최고신청을 했고, 같은 해 12월11일에도 또다시 최고신청을 했다. 金씨는 도난당한 채권이 다시 입금된 국민은행 계좌를 2002년 5월24일에 개설했다. 그런 후 3일이 지나서 공시 최고를 최초로 신청했다. 다시 말해 金씨는 도난당한 채권을 다시 회수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해 두고 법적 절차를 받은 셈이다.
 
  「공시 최고」란 도난 채권이나 어음 등을 누가 가졌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해당 채권 및 어음 내역을 일간지나 법원 게시판에 공시, 선의의 취득자가 피해를 보는 것을 방지하는 절차를 말한다. 도난 직후 바로 공시 최고 절차를 밟는 게 상식이다. 이 때문에 金씨는 「자신의 자금규모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시최고를 늦게 한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이 무성했다.
 
  당시 金榮浣씨를 잘 아는 A벤처캐피털 사장은 『金榮浣씨처럼 무기명장기채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은 도난 등의 이유로 그 규모가 드러날 경우 세금추징과 형성경위 등에 대한 조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며 『물론 비자금과의 연관성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金榮浣씨가 鄭회장이 죽은 후 도난당한 채권을 회수해 현금화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걸까?
 
  鄭夢憲 회장은 사망 직전 미국에 체류 중인 金榮浣씨와 네 차례 통화를 했다고 한다. 現代 측 관계자가 鄭회장 사망 후 일부 언론에 공개한 바에 따르면, 鄭회장은 金씨와의 통화에서 現代 비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의 명단 공개 여부와 검찰수사 대응방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鄭회장 사망 8일 전인 7월27일에 있었던 두 사람 간의 마지막 통화에서는 검찰의 수사 대응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現代 비자금 사건의 全貌(전모)와 나아가서 鄭회장 죽음의 비밀까지 알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金씨는 지금까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對北송금액은 10억~15억 달러?
   
  기자는 鄭夢憲 회장의 죽음을 둘러싼 現代 비자금 사건과 金榮浣씨의 역할을 취재하는 동안 남북 頂上회담 성사에 대한 代價로 北으로 넘어간 돈이 특검을 통해 밝혀진 5억 달러보다 더 많은 돈이 조성됐을 수도 있다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해외거주 제보자와 검찰 관계자는 「對北송금액이 5억 달러가 넘느냐」는 질문에 『10억~15억 달러라는 말이 있지만 頂上회담을 앞두고 5억 달러 이상의 돈이 현대그룹 등에서 조성됐다. 나머지 돈의 행방은 鄭夢憲 회장 주변인물과 당시 정권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만약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對北송금 사건보다 더 큰 파문이 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 과정에서 鄭夢憲 회장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라는 요지로 답변했다.
 
  金榮浣씨와 관련된 외국으로부터의 제보로 추측은 할 수 있었지만 기자는 「무엇을 막기 위한 鄭회장의 죽음」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기자는 鄭회장의 유서를 보았다는 검찰 관계자의 존재를 알려 준 知人에게 그 검찰 관계자를 어떻게든 만나게 해줄 것을 부탁했고, 여러 차례 설득 끝에 그를 몇 차례 만날 수 있었다. 이어지는 기자와 검찰 관계자의 문답이다.
 
  ―金榮浣씨에 대해 잘 아십니까.
 
  『現代 비자금 사건, 남북 頂上회담에서의 역할 등과 관련해서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잘 알지는 못해요』
 
  ―金榮浣씨는 現代 비자금 사건과 鄭회장 죽음의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핵심 인물로 지목받고 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저는 鄭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그를 만났고 그 자리에서 유서 다섯 장을 보았으며, 측근들과 자살 소동을 준비했다는 점입니다. 죽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다섯 장의 유서 말고는 없었습니까.
 
  『있었는데, 워드로 작성돼 있는 글이었어요. 이상한 것은 워드로 작성한 글과 자필 유서의 내용이 비슷했다는 거죠』
  
  『누군가 미리 써놓은 것을 보고 성의 없이 베낀 느낌』
 
  ―유서를 써놓고 타이핑해서 옮겼다는 겁니까, 아니면 타이핑된 문서를 보고 유서를 썼다는 겁니까.
 
  『누군가 미리 작성해 놓은 문서를 보고 성의 없이 베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시 경찰 발표에 따르면 유서가 봉투 세 개에 담겨 있었다고 하던데요.
 
  『제가 봤을 때는 봉투에 담겨 있지 않았고 워드로 작성된 문서와 함께 있었어요』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사건 전날 鄭회장의 통화내역을 모두 확인했다고 합니다. 검찰 내에서 자체 조사를 받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 鄭회장은 중요한 사람에게는 항상 공중전화나 다른 사람 명의의 휴대폰을 사용했습니다. 사건 전날 제게 전화할 때도 공중전화를 이용했어요』
 
  ―그날 鄭회장의 모습이 평상시와 달라 보이지는 않았습니까.
 
  『검찰 수사에 대한 중압감은 있었겠지만 특별한 차이점은 못 느꼈어요』
 
  ―자살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까.
 
  『검찰에서의 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鄭회장은 자살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자살할 이유도 없었다고 봅니다』
 
  ―타살이라는 겁니까.
 
  『저는 제가 본 부분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상황은 순간순간 변하는 거니까요』
 
  鄭회장은 유서를 보여 주면서 「이런 방법(자해 및 자살 소동)이 어떻겠는가」를 검찰 관계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 검찰 관계자는 『유치한 방법』이라면서 『正道(정도)대로 가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鄭회장은 20여 분간 이 검찰 관계자와 대화를 나눈 후 『약속이 있다』면서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한 이 검찰 관계자는 이런 말도 했다.
 
  『그 유서를 조사해 보면 제 지문이 남아 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확인해 보세요』
 
  ―당시 鄭회장 사망 사건을 맡았던 경찰 관계자는 지문 조사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지운 거겠죠』
 
  검찰 관계자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제 손바닥은 이렇게 깨끗하기 때문에 지문도 깨끗하게 잘 나올 겁니다』
 
  그 후 기자는 만나기를 꺼려하는 검찰 관계자를 설득해 한 차례 더 접촉했다. 그는 기자와 헤어질 무렵 이런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못 다한 말이 많지만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有口無言(유구무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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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榮浣

  2002년 3월 : 金榮浣 집 떼강도 사건 발생 채권 도난
  2002년 5월24일 : 金榮浣 명의 국민은행 계좌 750601-01-0××××× 개설
  2002년 5월27일 :「도난 채권 무효화」 공시 최고신청
  2003년 10월31일 : 채권 만기
  2003년 12월26일 : 도난 채권 40여억원이 金榮浣 명의, 국민은행 계좌 750601-01-0×××××로 입금  

입력 : 2007.06.28

조회 : 8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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