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명 세력이 재집결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조선DB
4·10 총선 이후 정치판 역학구도의 주요 변수중 하나가 친문(문재인) 세력의 향배이다. 총선 공천과정에서 ‘비명횡사’ 당했던 이들의 향후 행보에 따라 정치판에 지각변동이 초래될 수 있다.
물론 지난 대선 이후 친명(이재명) 측의 세력화가 가속화되면서 친문 측 상당수 의원들이 친명측에 흡수되거나 친명에서 한 발 물러선 비명쪽으로 전향함으로써 친문 측은 위축돼 왔다.
게다가 이번 총선 공천파동에 상당수 친문 의원들이 휩쓸리면서 기사회생했던 당선자들은 2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체 의석이 175석이고 대부분 친명 쪽이란 점과 비교할 경우 이에 맞섰던 친문의 당내 위상은 급전직하로 추락한 셈이다. 앞서 2020년 총선을 통해 180석을 차지했던 더불어민주당의 주류세력들이 4년만에 그렇게 됐다.
이런 상황으로 내몰린 친문의 행보는 어느 쪽으로 향할까?
노무현 정부 당시 집권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의 분열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됐던 상황도 요즘 더불어민주당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정권 출범 직후 친노(노무현) 측은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하는 세력이었음에도, 새천년민주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호남 주류세력들에 비해 열세였던 데다 당 쇄신문제를 놓고 갈등을 거듭하는 등 세(勢)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면서 향후 행보를 놓고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양측간 갈등의 저변에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을 때 노 후보를 교체하려 했던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 사태의 앙금도 자리해 있었다. 이런 상황들이 겹치면서 양측간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던 셈이다.
이들이 택한 돌파구는 탈당이었다. 집권 첫해인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을 창당했고, 예상됐던 대로 노무현 대통령도 탈당한 뒤 가세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 탄핵의결에 따른 역풍에다 정치권 쇄신 기치가 표심에 주효,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으로 부상함으로써 상승세를 탔다. 그것도 새천년민주당을 텃밭 호남에서 밀어내고 맹주자리까지 차지하게 됐을 정도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새천년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함께 탄핵을 추진하다가 역풍에 휩쓸렸던데다 당의 구심점이었던 DJ가 퇴임과 함께 정치권을 떠나며 중립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당의 지지기반이 크게 약화됐던 상황도 작용했다. 당시 총선에서 9석을 얻는 데 그쳐 민주노동당에도 뒤진 원내 4당으로 전락했던 것.
문재인 전 대통령 세력이었던 친문 측 역시 대선과 지방선거 연패 이후 이재명 체제에 대해 당 쇄신을 촉구했으나 자신의 사법 리스크 방어에 주력하고 있던 이 대표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부 의원들은 탈당, 독자 세력화에 나섰고 후일을 기약했던 잔류 의원들의 경우 총선 공천과정에서 비명횡사 당함으로써 더욱 공고해진 이재명 일극 체제에서 변방으로 쫒겨나 있는 처지이다. 게다가 이 대표의 연임론이 의원들 사이에 충성 경쟁하듯 확산되고 있어 친명 측이 꿈꿨다던 차기 당권도 더욱 멀어지고 있다.
민주당은 1990년 6월 15일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창당 전당대회를 가졌다. 이기택 총재(가운데)가 박찬종(왼쪽) 김광일 의원과 함께 손을 들어 대의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렇다고 탈당이 세 반전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친노세력에 앞서 1990년 YS의 3당합당 추진을 거세게 비난하며 합류를 거부했던 통일민주당일부 세력의 경우 DJ의 평화민주당 세력과 합쳐 민주당을 창당, 몸집을 키운 듯 했으나 세력간 갈등에 휩쓸리다가 무너졌다.
대선패배 후 정계를 은퇴했던 DJ가 복귀한 것을 계기로 갈등이 더욱 격화됐던 것이다. 이기택·노무현 등은 DJ의 정계복귀를 거세게 비난했고 이에 평화민주당 측은 집단탈당, DJ신당(새정치국민회의)을 창당함으로써 민주당의 위상은 급격히 꺾이기 시작했다.
비(非)동교동세력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민주당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아예 소멸해버렸다. 그것도 자신들이 비난했던 쪽으로 흡수됐던 것. 한쪽은 정계복귀한 DJ의 새정치국민회의로, 다른 쪽은 3당합당에 나선 YS의 신한국당으로 갔다. 신한국당으로 갔던 인사들중 일부는 또 다시 DJ 쪽으로 갈아타는 등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 등이 1997년 9월 5일 오전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새정치국민회의 창당 2주년 기념식장에 참석 자축하고 있다. 사진=조선DB
민주당의 침몰은 예정된 것이기도 했다. 지지기반과 구심력이 취약했던 세력이, 그것도 3김이 할거하던 정치판에서 독자생존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친문 측 역시 탈당을 결행, 정치적 승부수를 던질 수는 있지만 승산이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조국혁신당이나 새로운미래 등과 합쳐 친문 세력화를 본격화할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으나 이들을 함께 이끌어 갈 만한 구심점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한계다. 조국 대표의 경우 이번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자녀 입시비리 혐의 등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두고 있어 정치적 앞날이 불투명하다.
때문에 문 전 대통령의 거취가 탈당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지난 총선때 문 전 대통령이 비난여론에도 정치적 행보에 나섰다는 점에서 탈당 움직임이 가시화될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표명할 수 있다. 동반 탈당까지 강행한다면 친문 세력화에는 기폭제가 될 수 있으나 야권통합을 강조해왔던 만큼 그렇게 할 명분을 내세우기가 궁색하다. 게다가 문 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 자체가 친노측의 열린우리당을 지지했고 입당까지 했던 노 전 대통령과는 대비되기도 한다.
또한 대통령 재임 당시의 각종 의혹들에 대한 검찰수사 움직임에 부담감을 갖고 있을 것인 만큼 이재명 대표와의 연대 고리를 끊기도 쉽지않다. 그런 점에서 입장 표명은 하더라도 원론적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재판의 향배도 친문 탈당의 지렛대나 브레이크가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선 친문 측이 탈당보다는 당권 장악으로 선회할 수 있고 오히려 친명 측 일부 세력이 탈당하는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친문 측은 당분간 세력 다지기에 주력할 것이다.
이처럼 더불어민주당의 계파갈등이 어느 쪽으로 향할지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친문의 향후 행보가 정치판을 흔들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