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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의 ‘흐름’】 ‘만주 호랑이’ 독립지사 김동삼의 울림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랴”

김동삼 탄신 144주년 기념 오페라 갈라콘서트 ‘내앞마을 사람들’ 개최

이상곤  정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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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안동시 내앞마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 탄신 144 주년 기념 오페라 갈라콘서트가 열렸다. 갈라콘서트를 마친 후 일송기념사업회 김경한 회장 등 후원 단체 관계자들이 출연진과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이상곤.

경북 안동(安東)이 항일 독립운동의 본산이라는 것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국 시·군 가운데 독립운동 유공자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 안동이다.

 

안동 출신 독립유공자로 공식 서훈된 인물만 365. 인구 1000만 도시 서울이 429명인데 16만의 도시 안동의 서훈자가 이 정도다. (출처: 김구철 경기대 교수의 선비문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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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에 있는 일송 김동삼 생가터.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이곳 안동에서 최근 항일독립운동을 추념하는 상징적인 행사가 열렸다. 지난 23일 안동시 내앞마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1878~1937) 선생 탄신 144 주년 기념 오페라 갈라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일송 김동삼 선생은 만주 호랑이로 불리는 만주독립운동의 거성(巨星)이다.

 

김좌진(金佐鎭·1889~1930), 오동진(吳東振·1889~?) 등과 함께 만주무장독립운동의 3대 맹장으로 불리지만 그동안 활발한 조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의성김씨 종친회를 중심으로 일송 김동삼 기념사업회(회장:김경한 전 법무부장관)가 최근에 일송의 일제 독립운동 일대기와 공훈을 기리는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이날 일송의 생가터가 있는 내앞마을에서 갈라콘서트가 열린 것도 일송기념사업회가 후원했다. 이날 행사는 경상북도와 대구경북오페라진흥회가 주최하고 일송기념 사업회와 경상북도독립기념관이 공동 후원했다.

 

이날 갈라콘서트는 일송 선생과 안동 독립운동의 메카로 통하는 내앞마을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만 봐도 일송과 내앞마을의 독립운동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1~3막으로 이뤄진 프로그램의 아리아와 노래는 대구경북오페라진흥회 이철수 단장이 전곡을 다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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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내앞마을은 1907년 안동에서 최초로 마을에 들어선 서양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와 마을의 원로 백하 김대락과 김동삼, 류인식, 김후락 등이 1909년 한일합방으로 빼앗긴 땅에서 살 것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단군이 세운 백두산 밑의 서간도로 마을 전체가 떠날 것을 결의하는 중요한 회의로 구성됐다. 실제 이 회의를 통해 1910년 내앞마을 전체 주민 150명이 만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내앞마을 150명의 만주 망명은 석주 이상룡 일가 50명이 한꺼번에 만주로 망명한 것과 함께 안동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이주(移住)사가 된다. 바리톤 솔로 손예빈과 소프라노 솔로 배혜리가 각각 김대락의 아리아 <광복의 그날까지>와 김동삼의 아내 박순부의 아리아 <나도 서방님을 따를래요>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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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희범 경북문화재단대표(전 산업자원부 장관), 김주인 (주)시즈글로벌 회장(의성김씨 종친회 고문), 김경한 일송김동삼기념사업회장(전 법무부 장관). 사진=이상곤


2막은 일송 김동삼의 만주 무장독립운동 투쟁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일송은 1911년 마을주민 150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독립군을 키운 뒤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한다는 게 일송의 계획이었다. 일송은 백서농장을 세워 오늘날의 반도체나 다름없는 쌀농사를 성공시킨다. 백서농장의 막대한 부는 만주 무장독립투쟁에 든든한 자금원이 된다. 그렇게 일송은 서간도에 군정부를 세우고 3만의 군대까지 보유해 만주독립운동의 기린아가 된 것이다. 서간도 일송과 북간도 김좌진 장군의 합작품이 청산리전투 대승이다.

 

하지만 250명의 독립군이 2500명의 일본군대를 물리친 청산리전투 승리의 후과(後果)는 참혹했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김동삼의 동생 김동만 당시 삼원보 삼광학교 교장의 목이 일본군의 칼에 날아간다. 이후 서로군정서 참모장, 통의부 총장 등 만주지역 무장독립단체 최고지휘관으로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통일을 추진한다

 

2막은 손예빈의 파락호 김용환의 노래 <!! 아무도 모르게>와 배혜리(김동만의 아내 월배댁 )<슬픈 미망인의 절규> 안동 나리여성합창단의 <그날엔 우리 돌아가리라>로 구성됐다. 여기서 파락호 김용환은 노름 등 파락호 짓을 해서 만주 서간도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당시 내앞마을 일송의 친척이다.

 

3막은 서대문 형무소라는 제목으로 일송의 체포와 순국까지로 이어진다. 청산리대첩 이후에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을 거치면서 만주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에 쫓겨 중국대륙으로 흩어진다. 일송은 이들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목숨을 건 강행군을 펼친다. 일송은 1931년 사돈 이원일과 경북 영양출신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과 함께 항일공작을 위해 하얼빈에 잠입을 했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된다.

 

여기서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열연한 실제 여성독립운동가다.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생을 하다가 국내로 압송된 일송은 평양 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선고받는다. 처음 평양 감옥에 있다가 마포형무소로 옮겨진 일송은 만 59세가 되는 1937년 옥중에서 순국했다. 장례는 평소 일송을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치렀다. 일송의 유언대로 화장해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일송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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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대구경북오페라진흥회단장(작곡가), 손예빈,배혜리,손정희 성악가. 


3막은 테너 솔로 손정희의 김동삼 장군 최후의 노래 <나라도 없는 몸, 무덤이 있어 무엇하랴>와 출연진의 피날레, 손정희의 <일송 김동산 추모가>(조지훈 작사, 이강숙 작곡)로 마무리 됐다.

 

정부는 일송 김동삼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최초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07년 만 29세에 내앞마을 협동학교 설립으로 민족운동에 나선 이래 30년 동안 조국의 독립 한길에만 매진해온 일송 김동삼 선생의 공훈을 기린 것이다.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만사(挽詞)에서 공이 돌아가시니 만주가 비었고 공이 가시매 지기(知己)가 없어지고 천지가 텅빈 것 같도다라고 노래했고 만해는 유사지추(有事之秋·나라와 사회에 비상한 사고가 있을 때)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위인이라고 일송을 추모했다.

 

6월 초록이 짙은 안동 오지 내앞마을에서 열린 일송 갈라콘서트는 규모는 작았지만 영웅들의 항일정신이 왜곡되는 시대에 뇌 때리는울림을 주었다.

입력 : 202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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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의 흐름

l9137@naver.com 전직 언론인. 포항 출생으로 성균관대와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매일신문 서울 정치부장, 청와대 행정관을 거쳐 현재 블로그 '천지인애'를 운영하며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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